사랑 후에 오는 것들 세트 - 전2권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개정판)
공지영.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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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유일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비록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자식 간의 사랑처럼 서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이 끝나는 순간 본인의 삶도 함께 내려놓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도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말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간에 사랑했던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전에 비해 훨씬 풍요로워졌다는 사실을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어쩌면 비슷한 스토리의 사랑 이야기를 수많은 변주의 소설이나 시로, 혹은 음악이나 그림으로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여 감상하였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갈구하는 까닭 역시 우리 삶의 주제가 사랑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삶이 지속되는 한, 가슴의 심장이 뛰는 한 사랑을 향한 영혼의 심장도 쉼 없이 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노카시라 공원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기도 하고, 사슴 떼가 야트막한 언덕을 빠르게 질주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나는 잠시 내 환청을 믿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이 소리는 그와 아침마다 듣던 피아노 소리, 그의 어머니가 연주회에서 치던 피아노 소리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었다. 언제나 부드럽던 그의 손이 그렇게 억세게 느껴졌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p.20 '공지영 편')


오지 않는 가을을 기다리며 이제나저제나 하릴없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늦여름의 어느 시기에 내가 읽었던 사랑 이야기는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 원작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었습니다. 2005년 '한일 우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이 소설은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에 의해 여자와 남자의 시각에서 쓰인 로맨스 소설이지만 한 방송사에 의해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원작 소설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나는 사실 공지영 작가의 소설보다는 산문집을 더 좋아했던 까닭에 그녀가 쓴 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이미 읽어본 나로서는 그와 같은 기획 형태에 조금 구태의연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루룩 내처 읽고 말았습니다.


1권은 여주인공 최홍의 시선으로 써 내려간 공지영 작가의 작품입니다. 윤동주의 시집을 끼고 젊은 시절의 윤동주처럼 일본에 닿았던 홍은 우연히 만났던 아오키 준고와의 우연이 겹치면서 사랑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가족도 없는 낯선 땅에서 문득문득 외로움이 밀려들었고, 그것을 잊기 위해 매일 뛰었습니다. 서툴렀던 동거를 끝내고 홍은 결국 귀국을 결심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준고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은 떠나는 순간에도 강하게 남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긴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 감히 영원 같은 걸 갖고 싶었나 봐. 변하지 않는 거 말이야. 단단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반짝반짝 빛나고 한참 있다 돌아와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려 주는 그런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같은 거. 꿈꾸지 말아야 할 것을 꿈꾸고 말았나 봐."  (p.230 '공지영 편')


2권은 남자 주인공 아오키 준고의 시선으로 쓴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입니다. 아오키 준고와 최홍 사이에는 각자가 따로 살았던 칠 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 있습니다. 준고는 사사에 히카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가 되어 한국에 나타났습니다. 최홍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내일출판사의 편집자와 함께 준고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일본어 통역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우연은 다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지만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재회에 동요한 나머지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백합 꽃다발을 가슴에 안았다.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얀 옷을 즐겨 입던 홍이는 지금 어른스러운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 내 앞에 서 있다."  (p.14 '츠지 히토나리 편')


홍이와 헤어졌던 시간 동안 홍이를 생각하며 썼던 소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절절했고, 바다 건너 그녀에게 닿고 싶었던 준고의 간절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준고에게도 홍이에게도 그들을 사랑하는 연인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그와 같은 위기를 넘기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비극적인 결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얼마 후에 있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별을 피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동화와 같은 행복한 결말을 꿈꾸곤 합니다. 작가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결말이라고 해서 모든 소설이 다 신파로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작가의 상상력은 언제나 행복한 쪽으로 귀결되곤 합니다. 현실과는 크게 다르게 말입니다.


"홍이와 헤어진 후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을 매어 둘 수 있었다. 직업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다. 친구들의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때까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홍이와 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 갔다."  (p.237 '츠지 히토나리 편')


한낮 햇살이 계절을 희롱하고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 스푼의 가을을 떠먹고 그 황홀한 맛에 취한 터라 계절을 거슬러 여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한 편의 로맨스 소설에도 이리 설레는 걸 보면 나의 영혼에도 이미 가을이 도래한 듯합니다. 벚나무의 바짝 마른 이파리들이 도로에 흩날립니다. 주말을 맞은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만 향하는데 가을을 굳이 '독서의 계절'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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