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산
낸 셰퍼드 지음, 신소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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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유년 시절의 나를 떠올릴라치면 자연과 동떨어졌던 기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숫제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몇몇 가지가 있었지만 기억에서 모두 지워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현재의 내 머릿속에는 남아 있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어느 가을날 억새밭에 누워 바라보았던 푸른 하늘이나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짚으로 만든 김치광 안에서 느꼈던 안온한 풍경, 뽀얗게 비질을 마친 마당으로 어미닭과 함께 걸어 나오던 노란 병아리 떼 등 선명한 기억 속에는 언제나 사람보다는 먼저 그날의 풍광이 선연한 기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뒤늦게 태어난 여동생 덕분에 막내 자리는 물려주게 되었지만)로 성장했던 나는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은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은 물론 전화도 없었던 까닭에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려야 했던 공중전화도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용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내가 조선시대에서 환생한 '별에서 온 그대'쯤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엄연히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혜택을 남들보다 비교적 늦게 받았을 뿐 드라마에서나 나올 만한 그런 구시대적 인물은 아니라는 말씀 되시겠다. 나의 성장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인 낸 셰퍼드의 산문집 <살아 있는 산>을 읽는 동안 '나는 왜 여전히 산과 자연을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의 가장 섬뜩한 특징은 그것이 지닌 힘이다. 나는 물의 반짝이는 광채가 좋다. 음악적인 소리, 유연하고 우아한 움직임, 내 몸을 때리는 감촉도 좋다. 하지만 그 완력만큼은 두렵다. 자연의 힘을 두려워했기에 숭배했던 조상들처럼 나 역시 자연이 두렵다."  (p.52)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나는 매일 아침 산책 삼아 집 근처의 산을 오른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습관으로 인해 다른 조건이 엇비슷하다면 집 근처에 산이나 공원이 존재하는 것이 집의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거닐며 잠시나마 도시 생활의 번잡함과 여러 고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시골에서의 성장 배경을 지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골에서 도시로 퇴출된 나와 같은 도시 난민들에겐 인근의 야산이나 공원처럼 일시적으로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공간이 무엇보다 필요할지도 모른다. <걷기 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이나 낸 셰퍼드의 산문집 <살아 있는 산>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는 까닭도 그와 같은 배경 때문일 테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이제는 몸과 마음을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할 차례다. 다양한 감각을 사용해야 한다. 귀로 말하자면, 산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이다. 침묵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침묵이 얼마나 드문 존재인지 깨닫는다. 항상 무언가가 움직인다. 공기가 완벽하게 정지해 있을 때도 물은 흐르게 마련이니까. 산에서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고원의 물줄기는 대부분 돌 아래를 지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따금 사방이 너무 적막하게 느껴질 때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p.152)


<살아 있는 산>은 스코틀랜드 케언곰 산맥 지도를 시작으로 머리말을 지나 1장 '고원', 2장 '계곡', 3장 '산봉우리들', 4장 '물', 5장 '서리와 눈', 6장 '공기와 빛', 7장 '생명체:식물', 8장 '생명체:새와 동물과 곤충', 9장 '생명체:인간', 10장 '잠', 11장 '감각', 12장 '존재'로 구성되었으며 뒤에는 영국의 산악인이자 문학가인 로버트 맥팔레인의 해설이 실려 있다는 게 특이하다. 1년 내내 산을 찾는 산 애호가로서 낸 셰퍼드의 글은 케언곰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하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도시내기가 읽는다 할지라도 대리만족을 느낄 정도의 감각적인 묘사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산』이 현대에도 의미 있는 책인 것은 신체적 사고에 대한 셰퍼드의 믿음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점점 더 심하게 분리되어 살아간다. 우리의 마음이 물려받은 유전 특성과 습득하는 관념뿐만 아니라 공간, 질감, 소리, 냄새나 습관처럼 신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은 점점 더 잊혀간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접촉을 잃고 있으며 과거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더 몸과 단절되는 중이다."  (p.204 '로버트 맥팔레인의 해설' 중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듯하던 여름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루라도 더 자연을 만끽하고자 욕심을 부리는 일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네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각박하고 단조로운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기의 기억에서 먼저 그날의 풍광이 떠오르는 것도 그런 까닭일지 모른다. 힘겹게 건너온 시간이었지만 자연이라는 뒷배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의 영혼이 내 몸과 단절되는 것을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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