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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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는 거짓말처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밤새 비가 내렸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더위도 빗줄기에 한풀 씻겨 내려간 듯했다. 돌이켜보면 지독한 여름이었다. 직장인의 삶이라는 게 늦가을 해거름녘의 느린 산책처럼 여유롭고 한가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여름의 나는 입에서 단내가 물큰물큰 날 만큼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고 썼던 박성원의 소설집 <하루>를 읽는 내내 길었던 추석 연휴가 흘러갔고, 하루가 천 년 같았던 연휴 뒤끝의 근무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주말.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맥락도 없이 뒤섞였다.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게 진짜 세상이라기보다 누군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은 슬며시 구부러지고, 건물들은 마주 보거나 아니면 서로 등을 돌리고 서 있다. 바깥은 여름이고, 나는 마흔이다. 알고 있다. 바보 같은 나이다."  (p.43 '볼링의 힘' 중에서)


어제부터 내린 비로 도로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계속해서 물동그라미를 그린다. 선명하게 퍼지던 물동그라미의 파문이 이내 사라지고, 새로운 빗줄기에 의해 다시 또 생겨나는 물동그라미의 파문. 어디서 날아왔는지 마른 낙엽 한 장이 종이배처럼 떠 있다. 그 위로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이 이어졌고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렸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데 더위를 겨우 씻어낸 올해의 가을비는 한여름 장마처럼 끝이 길다.


"여자는 차창에 얼굴을 꼭 댄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허브냄새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몸이 악기 같다고 생각했다."  (p124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하루'를 비롯하여 '볼링의 힘', '얼룩',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 '분노와 복종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줘', '저녁의 아침', '흔적' 등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각각의 단편을 이끄는 중심인물들은 성격도, 직업도 제각각이지만 하나 비슷한 것은 그들의 이름이 모호하거나 알 수 없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그녀 혹은 그 남자이거나 남편이나 아내, 때로는 여자나 남자 혹은 주인으로 명명될 뿐이다. 그런 까닭에 책을 읽는 독자는 소설의 얼개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한 개인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가 무수히 많은 까닭에 그들의 이름조차 혼란스러운 것처럼. 그럼에도 소설은 무리 없이 읽힌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은 죽음과 금뿐이구나. 죽은 그것들은 이제 콧구멍도 없고 숨을 쉬는 허파도 없으며 되새김질할 수 있는 위장도 없다. 지금에 와선 그것이 부럽다. 죽음의 가장 큰 미덕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이다. 그 점에선 내 삶이나 죽음이나 똑같구나."  (p.179 '저녁의 아침' 중에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강우량을 늘리고 있다. 사람들은 명절 연휴의 피로가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씻겨 내려가기를 바라며 하염없는 시선을 이어갔다. 스러지는 물동그라미의 파문 위로 속절없는 시간들이 지워지고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가 꿈인 양 되살아났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스러지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이 아련하고 끊이지 않는 빗소리가 익숙한 자장가처럼 잠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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