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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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사람의 의식의 세계, 말하자면 생각의 영역인 그곳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의 영역과 중첩되거나 공유될 만한 그런 공간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겠군요.  고성능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곳은 결국 '촬영 불가'의 견고한 딱지를 붙인 채 굳게 잠겨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나는 오늘 의식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 두 곳 모두를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둘러 메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예컨대 <어둠의 저편>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어둠의 저편>을 소재로 말입니다.  핼리캠을 타고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의식의 총합은 현실에서의 거대 도시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서 바라볼 때, 개개인의 영역은 너무도 희미하고 작은 것이기에 부분으로서의 개인적 영역은 눈에 띄지도, 주목을 받지도 못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 같은 것을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세계에 혼자 있으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일부러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세계란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세계에 불과하잖아요.  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처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듯한......"     (p.231)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군요.  지금 시각은 오후 11시 56분입니다.  마리는 지금 도시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건은 '마리'의 언니 '에리'의 동창이며, 한때 언니와 함께 더블 데이트를 하기도 했던 '다카하시'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때마침 아버지는 교도소에 복역하는 바람에 고아 아닌 고아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다카하시'는 우연히 만난 '마리'가 그저 반갑기만 합니다.  '다카하시'는 지금 트럼본 연습을 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다카하시'는 음대생이 아닌 법률을 공부하는 법학도이지만 트럼본의 매력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악기에 빠져 지내는 중입니다.

 

그 시각 언니 '에리'는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에리'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행위만 하면서 두 달째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에리'의 방에는 텔레비전이 한 대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에리'만의 생각의 영역, 그 무의식의 세계가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리'보다 두 살 위인 언니 '에리'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외모와 약한 체질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에리'는 잡지 모델로 활동하며 TV에도 출연하였죠.

 

"하지만 에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하고,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처럼 돼버렸으니까.  마리의 말을 빌리면, 어엿한 백설공주가 되려고 애써 노력해 왔던 거지.  확실히 남들이 잘한다 하고 떠받들어 주었다고 해도, 그건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기라는 개성을 확립해 나갈 수가 없었을 테니까."    (p.179)

 

'다카하시'의 말입니다.  '에리'에 대한 '다카하시'의 분석인 셈이죠.  때로는 가까이 있는 가족보다 멀리 있는 타인이 그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니스'에서 책을 읽던 '마리'는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인 '카오루'를 만나게 됩니다.  '다카하시'는 이미 지하 연습실로 떠난 뒤였죠.  '알파빌'에서는 그날 밤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던 중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다카하시'가 '카오루'에게  '마리'를 소개한 것입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에 빠져있습니다.  미동도 없이 말입니다.  어느 순간 '에리'는 침대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은 어떤 풍경도 없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에리'는 그 공간에서 잠이 깹니다.  그러나 이곳, 즉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는 없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 외침만 보일 뿐이죠.

 

'마리'는 중국인 매춘부를 무사히 보냈습니다.  '알파빌'에는 '카오루'와 같이 일하는 '고오로기'가 있습니다.  귀뚜라미라는 뜻의 그녀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회사원이었던 '고오로기'는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러브호텔이라는 익명의 공간을 전전하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죠.  '마리'에게 고마움을 느낀 '카오루'는 스카이락'에서 음료를 대접합니다.  중국인 매춘부를 때리고 옷과 소지품을 탈취한 범인은 평범한 회사원인 사리가와입니다.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언니 '에리'는 다시 현실 속의 자신의 방으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다카하시'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마리'가 있는 '스카이락'으로 찾아옵니다.  그들은 공원으로 이동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헤어집니다.  '마리'는 다시 '알파빌'로 자리를 옮겨 '고오로기'와 대화를 합니다.  '고오로기'로부터 들었던 인상깊은 말이 있군요.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똑같은 종이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아,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235)

 

연습을 마친 '다카하시'는 '마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역으로 향합니다.  이제 어둠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데이트 요청을 하는 '다카하시'에게 '마리'는 다음 주에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긴 편지를 쓰겠노라고, 그리고 느긋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  집에 돌아온 '마리'는 언니 '에리'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꼭 안아주고 위로해주던 어린 시절의 언니 '에리'는 '마리'의 의식에서도 이미 멀어진 상태라는 걸 자각합니다.  '마리'는 언니의 침대에 같이 누워 눈물로 호소합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오전 6시 52분입니다.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작인 <어둠의 저편>은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과는 다소 이질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를 깊이 파고든 점도 그렇고, 카메라의 영상이 바뀌는 것과 같은 화면 전환도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 속에서 인간 의식의 단절과 개개인의 고독을 무미건조한 문체로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카하시'와 '마리'의 만남을 통하여 개별적 인간의 의식의 공유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어둠이 다 끝나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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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사람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다거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즐거운 경험입니다.  그들은 마치 주제가 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 시야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소리도 없이 금세 사라져갑니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낄까?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일까?  부모님은 모두 살아계시겠지?  나와 연관도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별의별 의문과 추측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사는 재미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무덥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지면으로부터 층층이 쌓여가는 열기의 층화를 온 몸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른한 졸음이 오후의 햇살 속에 길게 깔릴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죠.  무언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이쪽 그늘 속에서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구경꾼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어쩌면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사람들은 목적하는 곳을 향하여 끝없이 오가더군요.  그들과 나 사이에는 마치 투명한 창유리로 가로막힌 듯한 무위의 공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구명보트에 몸을 누인 채 시간의 하류를 향해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덩어리들이 제각각 흩어졌다가 때로는 커다란 단위로 뭉쳐지기도 하고, 또 다시 분화되는 과정을 몇 번인가 반복하면 결국에는 작은 알갱이들로, 혹은 그보다 작은 먼지로 흩어지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날씨 탓인지 축축 늘어지는 게 육체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괜한 잡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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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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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감나무의 잎사귀로부터 진한 생명력을 느꼈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아무튼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설마 죄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지금 바흐의 '영국조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마치 봄 햇살에 겨워 온 몸을 부르르 떠는 은사시나무 잎새의 떨림 같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조용한 하루.  아, 잊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들 그렇게 부르는)'불금'입니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두 번 읽었습니다.  머리가 나쁜 탓이죠.  꼼꼼히 읽는다고 했는데도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 훌훌 넘기며 다시 읽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번째는 필요한 부분만 읽고 지나쳤으니 한 번 반쯤 읽은 셈입니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의 편지들을 엮은 서간집입니다.  아마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품의 이곳저곳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이름을 여러 번 접하셨을 줄 압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정작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단 한 편도 읽지 않았으면서도 어느 순간 친숙한 이름이 되더군요.  하루키는 심지어 한 인터뷰에서 "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잘 모르는(어쩌면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매우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은 때로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솔직하다는 건 결국 모든 오해를 감수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챈들러가 그의 독자, 여러 작가, 편집자, 기자, 감독 등 여러 사람에게 보낸 편지 중 68편을 골라 엮었습니다.  거침없는 비판과 독설, 그만의 위트와 유머, 30년을 해로한 아내의 죽음에 맞선 사랑 등 서간집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간 많은 동정과 위로와 편지들을 받았지만 당신의 편지는, 게속되고 있는 상대적으로 쓸모없는 삶을 위로하기보다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며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삼십 년 동안 내 심장박동이었지요.  정말로 아내에게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거나, 아내에게 헌정할 수 있는 작품을 쓰지 못했던 것이 나의 가장 큰 후회이자 이제는 해 봤자 소용없는 후회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책을 쓰려고 했죠.  생각은 했지만, 쓰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216~p.217)

 

책의 구성은 챈들러의 작품론을 모아 놓은 1장과 다양한 작가들에 대해 논하는 2장, 할리우드 시절을 담은 3장, 그의 작품에서 탐정 캐릭터로 유명한 필립 말로에 대해 말하는 4장, 그의 아내와 고양이 등 일상을 담은 5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1장의 작품론 부분을 읽으면서 챈들러 자신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얻은 지혜란, 글쓰기 기술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빈약한 재능이나 재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시일 뿐이라는 믿음과 상통하니까요."     (p.37)

 

"나는 돈이나 어떤 특권 때문에 글을 쓰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랑 때문에, 어떤 세계에 대한 이상한 미련 때문에 글을 쓰는 거죠.  사람들이 치밀하게 생각하고 거의 사라진 문화의 언어로 말을 하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  나는 그런 세계가 좋습니다."    (p.194)

 

책을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은 '챈들러의 생각은 어쩌면 그만의 스타일로 남을지도 모르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평범함이란 너무도 익숙하고 벗어나기 힘든 유혹이어서 만일 누군가가 그동안 나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어떤 것을 말할 때, 그 사람은 그저 나보다 우월하다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고 말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방식을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말입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가 속한 영역의 밖에 홀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채.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하는 전문직 두세 종을 제외하면, 이 시대에 한 남자가 어느 정도 타락하지 않고, 성공이란 언제 어디서나 부정한 돈벌이이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에서 적절한 풍족함을 누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죠."    (p.171)

 

사실 이 책은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 지망생이 읽어야 할 책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그곳으로부터 끝없이 탈출하고자 했던 유명 추리소설 작가의 삶의 기록이자, 자신만의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했던 자유인의 기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챈들러 스타일은 작가 챈들러의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우리와는 조금 다른, 그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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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다가서면 또 한 발 물러서는 무지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하나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데올로기'를 가장 싫어하는 단어로 꼽고 있습니다만 저라고 왜 이데올로기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제가 여태껏 살면서 이것만큼 털어내기 어려운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살고 있는 셈이죠.  저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겠지요.  공교육이라는 시스템 내에서 적당히 배운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생각하면 한심한 노릇입니다.

 

사람에게 아귀처럼 들러붙은 이 '이데올로기'란 놈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한없이 넓게 벌려놓는 걸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던 것도 이제는 서서히 옛일처럼 지워지고 잊혀져간다 할지라도 그 책임 소재를 따져 철저히 처벌해야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한 일이건만 그놈의 '이데올로기'가 뭔지 그에 따라 정부를 옹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되는 걸 보면서 참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인륜의 문제도 이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구나 생각할 때 뭐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는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국 순위가 실렸더군요.  보수 성향의 국제인권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에 의해 발표된 <2014 언론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언론자유지수 32점으로 조사 대상 197개 국가 중 68위로 '부분적 언론자유국(PARTLY FREE)'으로 분류되더군요.  이것은 나미비아나 칠레보다도 못한 창피한 순위였습니다.

 

한 나라의 언론자유도는 국민 개개인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국민 통합의 밑바탕이 되는 기본적 전제조건이 아니겠습니까.  2004년에 26위까지 올랐던 우리나라의 언론자유국 순위는 이제 전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셈입니다.  독일의 진보언론 타츠(Taz)는 '대한민국에서의 언론의 자유, 대통령의 무릎에서 노는 애완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더군요.

 

상황이 이럴진대 국가적 재난에 대한 대비인들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재난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나 자세도 그렇구요.  썩어빠진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했는데도 제 잇속을 챙기려는 작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함에 있어 그 사람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집착도를 기준으로 삼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저부터 내려놓아야겠지요.  당연합니다.(오늘 낮에 뉴스를 보며 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하도 가관이어서 한마디 적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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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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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혼한 친구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이혼한 전 부인에 비하면 미모나 교양이 형편없다는 둥 나은 게 있다면 젊다는 것뿐이라는 둥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한참을 찧고 까불다가 다들 제풀에 지쳐 스러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재혼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요즘 재혼한 커플이 한두 쌍일까마는 그렇게 말했다가는 나 또한 이상한 놈으로 몰릴 분위기였다.

 

남자에게 있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수태능력을 끝없이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어서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나이가 들면 순간순간 확인해 봐야 안심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웬만큼 나이가 든 남자에게는 미모나 능력보다는 상대방의 젊음, 즉 생명력이 먼저 눈에 띄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재혼한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만.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풍화된 자만심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질료로 화(化)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자만심이 강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어도 자만심만은 굽히지 않았다.  그 절정은 아마도 대학시절이었겠지.  나이가 들면서 내가 의도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자 산처럼 솟았던 자만심은 하루가 다르게 깎여나갔었다.  그리고 나 이외의 타인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가볍고 유쾌한 책이지만 남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사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잔뜩 무게를 잡고 뭔가 거창한 것을 얘기하게 마련이지 작가처럼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을 만나 하루 종일 수다를 떨며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남자들의 삶이라는 게 문득 불쌍하게 보였다.  단순하고 경직된, 그러면서도 변화가 없고 늘 비슷한 모습의 삶.  그게 남자들의 삶이라고 말한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그중에는 젊은 여성들에게만 나눠주는 휴대용 티슈나 전단도 있다.  광고 대상이 그렇게 한정된 것이리라.  나눠주는 사람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인파 속에 서서 '이 사람, 줘야 할 사람, 저 사람 주지 않아도 될 사람'을 판단한다.  그들 앞을 지날 때, 나는 매번 시험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지 않아도 될 사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불과 3,4년 전까지는 떠맡기듯이 해서 받았던 티슈였는데 지금은 거들떠봐주지도 않는다.  내 마흔두 살의 외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p.52~p,53)

 

이따금 미소를 지으며 읽다가도 어느 순간 짠해지는 느낌이 든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누구나 나이가 들고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우울한 느낌만 울컥울컥 솟는다.  사랑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 믿다가도 어느 날 길거리에서 거침없이 뽀뽀를 하는 연인이라도 만날라치면 '저게 뭐하는 짓거리야. 버릇없는 것들.'하고 괜한 심술에 욕부터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웬간히 나이를 먹었나 보다 느낀다.

 

"대화에 꼭 노후를 소재로 넣는 것은 웃어넘기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누구도 장래희망이 뭐냐고 묻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도 장래는 있다.  연금은 얼마 받을 수 있을까, 소비세도 오를 것 같은데.  병에 걸리면 어쩌지......  이것저것 불안하다.  그렇지만 마지막 전철을 앞두고 가까운 역에서 헤어질 때는 다음달 열리는 불꽃놀이 대회 일정을 서로 확인하는 우리였다."    (p.197~p.198) 

 

언젠가 나는 공원 벤치에 옹기종기 앉아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어르신들을 본 적이 있다.  대화 내용이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별로 신통치도 않은 옛날 이야기를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말하고 그 얘기를 또 골똘히 듣고 있었다.  그분들이 서로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아마도 수도 없이 들었을지도 모를 그 얘기를 마치 처음 듣는 얘기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거나 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분들처럼 먼 과거를 현재처럼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자신이 하는 말을 상대가 묵묵히 들어주고 있다는 그 두려움, 민망함, 미안함, 고마움, 기쁨, 과분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다."    (p.181)

 

즐겁게 나이든다는 것(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은 작가처럼 나이를 잊고 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따금씩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면 되는 게 아닐까.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으며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기에는 인생은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심각하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하루하루즐 즐기며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리라.  작가 마스다 미리처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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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5-08 12:36   좋아요 0 | URL
전 여자라 그런지 완전 공감했어요

꼼쥐 2014-05-08 19:54   좋아요 0 | URL
그러셨을 것 같아요.
저로서는 정말 부러운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