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 자신을 방치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에 '직무태만'을 작정하는 이 시간이 어쩌면 세월의 잔물결이 짐짓 모르는 체 낙서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기억의 백사장에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금세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이런 양가감정 중에 어느 게 우선이라고 말히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아내와 아들놈은 장인, 장모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6박 7일의 짧지 않은 여행입니다. 아내는 로밍을 해도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크루즈 내에서는 전화가 되지 않는다는군요. 한 번도 크루즈를 타본 적 없는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렇답니다. 저는 이제 일주일 동안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침부터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간 기분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쓸쓸함이 되밀려 왔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기력이 다 식은 배달 음식처럼 날라 왔던 것입니다. 때 이른 더위가 눅지근하게 내려앉는 한낮, 형광등 불빛마저 짜증스럽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오늘이 '부부의 날'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날아 들어 나를 곤혹스럽게 하던 아내의 문자 메시지도 오늘은 잠잠합니다.

 

 

넝쿨 장미가 흐드러진 5월의 끝자락입니다. 약간의 쓸쓸함이 바람에 실려 오가는 듯합니다. 주말부부로 지낸 지 한참 되었건만 마음에 이는 작은 파문을 어쩌지 못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조직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조직원은 열이면 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 의견의 배후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크면 클수록 통일된 의견을 취합할 수도 없을 뿐더러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고자 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편법과 권모술수만 난무하게 된다.

 

서울대 물리학과의 김대식 교수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 형제가 대담 형식으로 엮은 <공부 논쟁>은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 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이런 까닭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  이 책의 내용에 나는 왜 적극적으로 수긍하지 못했을까?  형제이면서 둘 다 교수 직함을 갖고 있는 두 명의 엘리트에 대한 반감일까, 아니면 그들에 대한 부러움에서 오는 열등의식일까?  나는 리뷰를 대신하여 내가 느꼈던 불편함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첫번째 의문은 모든 조직의 문제점을 파악할 때 타 조직과의 비교는 필수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내 생각을 미리 말하자면 '노(no)'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현실을 타 국가의 그것과 비교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 발전하기 위한 것인데 과연 그렇게 되는가.  예컨대 부모님이 자신의 아이를 자극하여 발전을 도모코저 할 때, 소위 '엄친아'와의 비교를 밥 먹듯이 하지만 과연 아이가 '엄친아'에 근접하거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엄친아'를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좌절감과 패배의식만 심어주지 않던가.

 

"일본의 장인 씨스템이 독일의 대학 씨스템을 만나 일본 과학의 발전을 일구어냈다면, 우리나라는 선비문화가 그대로 대학문화로 이어졌어요.  조선시대에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장원급제도 해야 하지만 좋은 서원 출신일 필요가 있었잖아요.  이게 지금 우리나라의 학벌로 연결되는 거죠.  어느 대학 출신.  미국 박사라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공부로 끝장을 보면 문제가 없죠.  그런데 공부가 항상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인 게 문제예요."    (p.173~p.174)    

 

두번째는 잘못된 역사의 순환고리에서 그 사슬을 끊을 자신감과 실천의지는 문제점의 파악만으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문제점의 인식과 실천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조직원이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때로는 조직원들로부터의 욕설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즉, 문제점의 파악과 인식만으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나도 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스스로 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러나 대학 내부의 껄끄러운 제반 문제들, 엘리트주의의 한계와 우리나라 공교육 씨스템의 문제 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문제들을 언제까지 지적만 하고 있을 것인가.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 주체(학생, 교사, 학부모)의 통렬한 반성과 실천 의지가 아닐까.  그것이 없다면 역사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공부, 엘리트, 탁월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 장원급제 DNA와 장인 DNA의 차이, 과장된 이공계 위기, 영재교육의 문제점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논의는 자연스럽게 비평준화 시대의 경기고와 현재의 특목고로 상징되는 엘리트주의의 한계로 모아졌고, 고교 평준화, 대입 단순화, 서울대 개혁이라는 대안으로 이어졌습니다."    (p.10)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타 조직과 비교함으로써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야 될 문제는 비교하는 대상을 비교 당하는 대상이 비교를 통하여 우상화하고 있지는 않는지, 조직원의 자격으로 조직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나는 비록 이런 더러운 곳에 속해 있지만 적어도 문제점을 말하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깨끗하다.'는 자기변명이나 자기합리화는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부탁이나 의견에 있어 오직 '예스(yes)'만 남발하는 사람이 자신은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하고, 윗사람을 존중할 줄 알며, 희생정신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편 사교적이며, 아랫사람에게는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역겨움을 느낀다.  게다가 '노(no)'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거만하며, 성격이 까칠하고, 독선적이며 배려할 줄 모르고, 이기적이며, 예의가 없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역겨움을 넘어 인간 이하로 본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 중시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 중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노(no)'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나름의 용기가 필요했을 터이다.  그 말을 겉으로 표현하기까지의 심리적 갈등과 불안 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중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이 내키는 대로 내뱉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린애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노(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사람의 게으름과 비겁함으로 판단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부탁에 대해 '노(no)'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미지나 이해득실에 타격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장황한 설명이나 변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상황이 싫은 것이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사실 그게 편하다.  또는 어떤 논리에 대해 '노(no)'를 외칠 경우 분명한 근거로 상대방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거나 혹시 상대방으로부터 괜한 미움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대부분 '예스(yes)'라고 말하게 마련이다.  영혼도 없이 말이다.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위치에 서 있지만 무턱대고 '예스(yes)'만 외치는 사람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의사가 분명한 사람이 '예스(yes)'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진심과 정성이 담길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우리나라의 서열 중시 문화가 하나의 원인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떼거리 문화, 온정주의 비리를 혁파할 수 있는 방패라고 나는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듦에 대한 변명 - 이야기꾼 김희재가 전하는 세월을 대비하는 몸.마음 준비서
김희재 지음 / 리더스북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희재 작가의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을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몸이 천 냥이면 귀가 구백 냥'이라고 정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맛깔나는 대사를 잘 옮겨놓았는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흔한 대화도 귀가 좋지 않으면 이렇게 실감나게 옮길 수는 없다며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습니다.  대사를 위주로 쓰는 시나리오 작가라서 그럴까요? 

 

사실 이 책은 나이 들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닥 유쾌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가의 적절한 대사 발췌와 그 상황에 대한 원인을 설명함으로써 젊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 들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곳곳에서 듣게 되지만 사실 예전보다 오래 산다는 게 축복일까 하는 데에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노인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갈수록 악화될 테니까요.  그런 환경에서는 더이상 살기 싫다며 박차고 나와 노인들만을 위한 나라를 따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작가도 그런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을 테구요.  잘 좀 봐달라고.

 

"누구에게나 절대 공평 사항으로 흘러가는 세월은 사람의 몸에 다양한 흔적을 남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가 뿌리고 간 흔적은 대체로 힘들고, 아프고, 추접스럽고,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 뿐입니다.  젊은 자식과 후배들은 나이 든 부모와 선배의 추접함이 개인의 불결함이나 게으름, 혹은 낙후된 취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역시 그런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p.9)

 

나이가 들수록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대체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 세고 독선적인 성향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얼마 전 들렀던 처갓집에서 저는 작년과는 많이 변한 장인어른의 모습을 보며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인근의 산을 오르셨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하던 분이셨는데, 이제는 한 손에 TV 리모콘을 꼭 쥔 채 안락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거나 그것도 지치는지 가끔 졸다 깨다 하셨습니다.  아내는 그게 못마땅했는지 아들놈에게 '할아버지는 사람을 잃고 대신 TV를 독차지했다'고 말하더군요.

 

작가는 뽀글이 파마, 여자의 화병, 배불뚝이 아저씨, 남자의 눈물, 깜빡거리는 기억력, 고약한 입 냄새 등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유쾌한 필치로 펼쳐보임으로써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저자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아득히 먼 미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금방이다'라고 백 번 반복하여 말한다 할지라도 변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노화의 과정을 찬찬히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던 예전 대가족 문화와 지금은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거 할아버지 방에 좀 갖다 드려."

"싫어, 엄마가 가."

"엄마 지금 바쁘잖아."

"싫어 할아버지 방에서 냄새난단 말이야!"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 그래!"

"방에서도 나고 할아버지한테서도 난단 말이야!  그래서 엄마도 할아버지 노인학교 가시면 매일 창문 열면서 '아우, 냄새야!' 그러잖아!"       (p.190)

 

작가가 들려주는 열아홉 편의 이야기는 중,장년의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얘기인 양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또 그 속에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마다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사로 시작하여 그 상황에 이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시 한 편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세월에 보내는 연가>가 그것이지요.

 

누구나 흐르는 세월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월을 거슬러 젊어질 방법 또한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순리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납득시키는 것도, 무작정 이해를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쓸쓸하고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 든 사람이 수용하고 견딜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가요?  그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요.  몸으로 겪지 않으면 미처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도 말이죠.

 

"마음이 몸의 노화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속도를 맞춰주고, 몸이 마음의 성숙을 기다려줄 만큼 속도를 조절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빌려 쓰고, 떠나는 날에 땅에 두고 갈 내 몸과 다투지 않고 사는 방법일 것입니다.  부러지고 무너지며 다투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p.2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 년 전 딱 이맘때쯤 세상을 등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의 나이는 쉰두 살이었습니다.  문득 오늘 그 분 생각이 났습니다.  고3 수험생인 딸과 대학 2학년인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여서 세상 부러울 게 없다며 입에 미소를 달고 사셨던 자상한 가장이자 남편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러나 어느 토요일 오후, 공원을 산책하던 그 분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그렇게 사랑하던 가족들에게 '잘 있으라'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과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인은 비록 심장마비였지만 말입니다.

 

이따금 보는 TV에서 자식들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말하는 어느 가장의 지친 얼굴을 볼 때가 있습니다.  흔히 자식들의 재롱이나 아내의 애교가 '피로 회복제'라고 말하더군요.  물론 직장에서 퇴근하여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 사람에게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피로 회복제가 아니라 과로 촉진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역치(閾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값을 뜻하는 말이죠.  이를테면 우리에게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신경계로 그 정보를 이송하여 반응을 이끌어내게 하는 최소한의 자극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 회로는 육체와 정신이 소통하는 통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피로가 쌓이는 상황인데 아이의 웃음을 보며 육체의 피로를 잊거나 무시한다는 것은 어쩌면 육체와 정신의 소통을 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육체에는 육체에 필요한 원칙이 있고, 정신에는 정신에 필요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피로를 호소하는 육체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원칙을 무시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듯이 육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에게 짐만 될 뿐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그분처럼 앓지 않고 죽는 것도 가족을 위하는 길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나의 생각은 다릅니다.  적어도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신은 편할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됩니다.  유산만 많으면 문제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유산과 상관없는 그들의 인생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산을 남겨줬다 한들 지키지 못한다면 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른 나이에 부모 중 한 명을 잃는다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 아이들에 대한 크나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쓰다 보니 매우 우울한 얘기가 되어버렸군요.  '피로 회복제'인지 '과로 촉진제'인지 잘 판단할 일입니다.  그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