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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에 대한 변명 - 이야기꾼 김희재가 전하는 세월을 대비하는 몸.마음 준비서
김희재 지음 / 리더스북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희재 작가의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을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몸이 천 냥이면 귀가 구백 냥'이라고 정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맛깔나는 대사를 잘 옮겨놓았는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흔한 대화도 귀가 좋지 않으면 이렇게 실감나게 옮길 수는 없다며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습니다. 대사를 위주로 쓰는 시나리오 작가라서 그럴까요?
사실 이 책은 나이 들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닥 유쾌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가의 적절한 대사 발췌와 그 상황에 대한 원인을 설명함으로써 젊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 들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곳곳에서 듣게 되지만 사실 예전보다 오래 산다는 게 축복일까 하는 데에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노인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갈수록 악화될 테니까요. 그런 환경에서는 더이상 살기 싫다며 박차고 나와 노인들만을 위한 나라를 따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작가도 그런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을 테구요. 잘 좀 봐달라고.
"누구에게나 절대 공평 사항으로 흘러가는 세월은 사람의 몸에 다양한 흔적을 남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가 뿌리고 간 흔적은 대체로 힘들고, 아프고, 추접스럽고,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 뿐입니다. 젊은 자식과 후배들은 나이 든 부모와 선배의 추접함이 개인의 불결함이나 게으름, 혹은 낙후된 취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역시 그런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p.9)
나이가 들수록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대체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 세고 독선적인 성향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얼마 전 들렀던 처갓집에서 저는 작년과는 많이 변한 장인어른의 모습을 보며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인근의 산을 오르셨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하던 분이셨는데, 이제는 한 손에 TV 리모콘을 꼭 쥔 채 안락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거나 그것도 지치는지 가끔 졸다 깨다 하셨습니다. 아내는 그게 못마땅했는지 아들놈에게 '할아버지는 사람을 잃고 대신 TV를 독차지했다'고 말하더군요.
작가는 뽀글이 파마, 여자의 화병, 배불뚝이 아저씨, 남자의 눈물, 깜빡거리는 기억력, 고약한 입 냄새 등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유쾌한 필치로 펼쳐보임으로써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저자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아득히 먼 미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금방이다'라고 백 번 반복하여 말한다 할지라도 변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노화의 과정을 찬찬히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던 예전 대가족 문화와 지금은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거 할아버지 방에 좀 갖다 드려."
"싫어, 엄마가 가."
"엄마 지금 바쁘잖아."
"싫어 할아버지 방에서 냄새난단 말이야!"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 그래!"
"방에서도 나고 할아버지한테서도 난단 말이야! 그래서 엄마도 할아버지 노인학교 가시면 매일 창문 열면서 '아우, 냄새야!' 그러잖아!" (p.190)
작가가 들려주는 열아홉 편의 이야기는 중,장년의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얘기인 양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또 그 속에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마다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사로 시작하여 그 상황에 이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시 한 편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세월에 보내는 연가>가 그것이지요.
누구나 흐르는 세월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월을 거슬러 젊어질 방법 또한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순리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납득시키는 것도, 무작정 이해를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쓸쓸하고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 든 사람이 수용하고 견딜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가요? 그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요. 몸으로 겪지 않으면 미처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도 말이죠.
"마음이 몸의 노화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속도를 맞춰주고, 몸이 마음의 성숙을 기다려줄 만큼 속도를 조절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빌려 쓰고, 떠나는 날에 땅에 두고 갈 내 몸과 다투지 않고 사는 방법일 것입니다. 부러지고 무너지며 다투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