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대한민국은 이제 국가 존립의 근거마저 상실했구나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더군요. 속에서 열불이 날까봐 나는 일부러 한동안 뉴스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뉴스를 보니 지난 정권에서 자원외교와 4대강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천문학적인 혈세를 탕진하여 국고를 바닥내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부족한 국고를 메우기 위해 자동차세, 주민세 등 각종 세금을 인상하고, 그에 더하여 지하철 및 버스 요금 인상, 고속도로 통행료 인상, 상하수도 요금 인상 등 각종 공공요금을 인상하겠다고 하더군요.

 

세월호 사건과 판교 사고에서 보았듯 국민의 안전은 뒷전이고 오직 정권 재창출에만 혈안이 된 정부. 빚더미에 앉은 국민의 생활을 도외시한 세금 정책을 펴는 정부, 과연 이 나라가 국민을 위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요. 국가의 존립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생명도, 국민의 재산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국민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대북 전단 살포에도 국가는 수수방관입니다. 다만 대통령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전단 살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체면은 국민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것을 위해 정부의 권력기관이 다 동원된 셈입니다. 국민 전체를 감시하고 사찰하는 데 검찰과 경찰이 동원되는가 하면 이를 비난하는 국민들은 종북, 빨갱이로 매도합니다. 연산군의 폭정이 이보다 더했을까요.

 

당신의 인내력은 어디까지인가요? 나의 인내력은 또 어디까지 일까요? 국민 모두에게 일일이 묻고 싶은 요즘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인내력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요. 보도를 걷는 행인의 축 처진 어깨를 볼 때마다 괜스레 눈물이 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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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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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가령 베스트셀러라거나, 추천도서라거나, 제목이 맘에 들었다거나, 한 작가를 유독 좋아한다거나, 누군가의 리뷰를 읽고 갑자기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거나 뭐 그런 것이겠지요.  나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책을 선택하는지라 내가 과연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기는 한건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기준이나 원칙을 워낙 싫어해야지요.  나의 그런 성격이 독서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따금 나는 남들이 보면 까탈스런 성격이겠거니 오해할 정도로 책 선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죠.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일입니다.  나는 저자가 아닌 역자(譯者)가 누구냐에 따라 책을 고르기도 하고 미련없이 내던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심지요?  그렇다고 내가 알고 있는 역자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작가와 김화영 작가가 고작입니다.  프랑스 문학은 김화영 작가가 번역한 책이라면 무조건 고르고, 영미권 문학은 이윤기 작가의 번역서를 고르곤 했습니다.

 

일종의 강박증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번역가라면 적어도 작품을 보는 안목과 한국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지 언어에 능통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좋은 번역서를 내놓는다고 믿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 읽게 된 책이 파트릭 모디아노가 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습니다.  번역은 물론 김화영 작가가 했습니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몇 년 뒤에 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리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역자의 이름에 김.화.영. 세 글자만 눈에 띄었을 뿐이니까요. 나는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작품의 첫 문장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p.7)

 

멋진 문장이지요?  프랑스 소설이 대개 그렇듯 열린 결말과 스토리 전개가 상당히 복잡하여 한 권을 읽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약간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일이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어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모디아노는 소설의 곳곳에 멋진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소설 속 이야기와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선물하고 있는 셈입니다.  프랑스어라고는 철자만 겨우 아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물론 그 공이 순전히 좋은 번역 덕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 탐정입니다.  그의 곁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약간의 힌트라도 줄 만한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언진 유일한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서로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점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지냈던 시간과 대면하게 되는 셈이지요.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한다."    (p.71)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모든 과거를 상실한 세대로 자란 모디아노는 이 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정을 밀도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새로 보태기도 하고 빠뜨리기도 하면서 자신을 구축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건 읽은 지 오래된 소설처럼 기억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던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내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온 기억의 총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겠지요.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p.241)

 

작중화자는 묻고 있습니다.  기억을 상실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믿었던 게 아닐까요.  나이만 들었지 그동안의 기억, 그가 살아온 삶의 축적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참담하고 막막할지 공감하게 됩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감을, 풍경에서 오는 어떤 정밀한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 풍경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들 몸짓과 우리들 생명의 메아리가, 우리들 주위의 성당 지붕 위에, 스케이트장과 묘지 위에, 골짜기를 뚫고 뻗은 긋고 있는 더 어두운 윤곽 위에 가벼운 송이로 떨어지는 저 솜 같은 눈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8~p.229)

 

과거에 내가 살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장소이건만 기억 속에서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걷고 있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작중화자의 모습에서 진한 슬픔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타자를 찾는 노력, 언젠가 우리도 그 길 위에 서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내 삶의 기억들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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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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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4: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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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하와이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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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는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를 늘 헷갈리곤 한다.  애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름이 비슷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 내가 아는 일본 여류 작가라야 손으로 꼽을 정도인지라 굳이 헷갈릴 일도 아닌데 두 사람만큼은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사람 같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묘하게도 그들은 태어난 해가 1964년으로 같다.  굳이 공통점을 만들자면 말이다.  물론 에쿠니 가오리가 약 4개월 언니이기는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를 읽으며 잠시 딴생각을 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도토리 자매>에서 읽었던 한국에 대한 묘사는 웬만한 한국 작가의 그것보다 더 세밀하고 생생했다.  아무튼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직설적이면서도 통통 튀는 문체가 맘에 들었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애정도 느껴졌고.  실제로 그녀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그녀의 공식 트위터를 통해 "한국 독자 여러분께.  안타깝고 애절한 이번 사고 소식에 제 마음이 아픕니다.  실종자 가족분들 중에 제 독자분도 계신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책을 통해서 또 개인적으로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는 작가가 하와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국땅에서 보낸 달달한 여행담을 펼쳐 보이는 책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솔직 담백한 글이 함께 실은 사진과 잘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와이키키, 사우스포인트, 카이마나힐라 등 하와이 명소에서 받은 그녀의 느낌과 이국땅에서의 신기한 체험들, 그리고 하와이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과 친구와의 우정.  훌라를 배우면서 실력이 늘지 않는 자신이 조금 약오르기도 했을 텐데 그녀의 생각은 조금 특별했다.

 

"역시 이 세상에 편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생은 멋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톱인 장소에서는(그게 일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남편이든 아이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똑같이 힘은 들어도 보기에는 근사하니까.  똑같이 꾹꾹 참고,  할 말을 삼키고, 내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그런 매일을 쌓아 간다."    (p.100~p.101)

 

작가의 초긍정적인 마음과 아이처럼 생생한 느낌은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이런 느낌은 뭘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가볍게 데워지는 느낌.

 

"수많은 곳을 찾아다니고, 앞으로만 나아가고, 이게 끝나면 다음은 이거, 네, 맞아요.  그렇게 아무 미련 없이 말해 버려야지, 안 그러면 자기 인생을 실현할 수 없다고요.  그런 목소리를 싹 쓸어버리고 우리를 지금 이 시간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이 하와이의 바람, 영원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한없이 이어지는 해변, 한없이 밀려오는 파도.  나와는 인연이 없으니까,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언젠가 신혼여행으로 가지 뭐, 평생 한 번 정도의 추억으로 만들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고, 만약 가고 싶다면 비행기 티켓을 사서 다음 날 아침에는 그 섬에 있어 보자.  정작 해 보면 의외로 간단한 일이다."    (p.160)

 

언젠가 나도 하와이 해변에 서서 요시모토 바나나를 생각하며 가볍게 미소짓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꿈꾸는 하와이>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생각하면서.  정말 모를 일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든 작가는 우리를 꿈꾸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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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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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처럼 내리던 비가 저만치 물러가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비가 지나간 후의 대기는 얼마나 투명한가! 나는 허공을 향해 종주먹을 들이대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조용히 참는다. 절제된 욕망은 실상 자신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제 영역을 넓혀갈 뿐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자가증식하는 세포처럼. 그것은 마치 파괴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에너지를 응축하는 지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알 수 없으리만치 조금씩조금씩, 그러다 어는 순간 '꽝' 하고 폭발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처럼.

 

오후가 되자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바람이 불고 힘없는 낙엽이 소리도 없이 흩날렸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는다. 그의 작품은 리얼리즘을 철저히 배제한 한 권의 판타지 소설일 뿐이다. 나는 이 작품이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창작되었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삶으로부터 축출된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그의 내면에 꾹꾹 잠재되었던 욕망이 어는 순간 틈새를 비집고 나와 한 편의 소설이 되기까지 그는 무척이나 오래 견디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설행위이다.

 

잠재된 욕망을 누군가에게 쏟아냄으로써 작가는 쾌감을 느낀다. 절정의 쾌감. 나는 오르가슴으로 치닫는 작가를 상상한다. 작가는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 명멸하는 욕망의 찌꺼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삶이 죽음의 이면인지, 죽음이 삶의 이면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얼굴이 비칠 듯 반짝이는 승강기의 전면과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승강기의 뒷면처럼 삶과 죽음은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죽음의 뒷면이 삶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습하고, 더럽고, 어느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승강기의 뒷면처럼.

 

"퍼포먼스는 달라요. 저는 직접 만나죠.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죽음과 애욕을 보죠. 제가 그날 그들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제 작업은 즉석에서 바뀌곤 하죠. 예술의 목적이 결국 아름다움을, 그것도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대면하고자 하는 욕구라면,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모든 예술은 가짜이고 타협이고 부질없는 불멸에의 욕망, 그 찌꺼기들이지 않아요? 퍼포먼스에 대한 모든 공격은 참된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 (p.113)

 

저녁이 되자 다시 잠깐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오렌지빛 석양과 함께 사라졌다. 루이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에 이를 때까지 아름다우면서도 몽환적이었다. 그러나 3부 <에비앙>에서부터 작가의 의식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현실을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타인(또는 독자)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수음을 하던 소년이 그 장면을 제 어미에게 들킨 것처럼. 작가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또는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을 때의 소설은 이미 아름다움과는 멀어지게 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처음은 섹스와 죽음을 도발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의식이 꿈의 저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린 하늘은 목화솜처럼 넓게 펼쳐진 구름으로 뒤덮였다. 오늘 밤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별은 현실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허구 속에서 존재했던 것처럼. 소설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소설 속에서 죽음을 택한 세연과 그녀와 관계를 가졌던 C와 그의 동생 K, 행위 예술가 미미,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나. 나는 고민 상담을 하며 의뢰인의 자살을 도와주는 죽음 안내인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가이다. 이를테면 나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사르다나팔의 죽음>에 등장하는 사르다나팔인 셈이다. 팔베개를 한 채 죽음의 향연을 바라보는 바빌로니아의 왕 사르다나팔. 나는 유디트(세연)와 미미의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 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 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는 않는다." (p.140)

 

밤이 깊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삶의 이면을, 죽음과 같은 또는 꿈과 같은 아름다움과 대면하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잉여적 삶이라 할지라도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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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이 소설에서 기억할 만한 문장들을 기록해 둔다. 단지 참고용으로.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의 지상 덕목이다." (p.8)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p.10)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p.16)

"가끔 허구는 실제 사건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실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구차해질 때가 많다. 그때그때 대화에 필요한 예화들을 만들어 쓰는 게 편리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적에 배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즐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한 세상이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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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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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몇 권의 책을 소장해야 장서가로 불릴까요? 오천 권? 만 권? 아니면 적어도 몇 만 권 이상은 되어야 할까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애독자에서 책 수집가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본의 아니게 말입니다. 한두 권 사들이던 책이 어느새 몇 십 권이 되고 금세 몇 백 권이 되었다가 이제는 셀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합니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책을 보유하게 된 셈이죠. 때마침 이사라도 할라치면 이건 숫제 애물단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이삿짐에 슬쩍 끼워넣자니 짐의 부피며 무게가 여간해야지요.

 

"책이 아무리 많더라도 책장에 꽂아두는 한 언제든 검색할 수 있는 듬직한 '지적 조력자'다. 하지만 책장에서 비어져 나와 바닥이며 계단에 쌓이는 순간 융통성 없는 '방해꾼'이 된다. 그러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범람은 결국 '재해'로 치닫는다. 아직은 책의 범람이 지하에 머물러 다행이지만, 이윽고 1층을 잠식하고도 성이 차지 않아 계단을 따라 2층까지 밀고 올라오면 정말이지 '대참사'가 따로 없다." (p.19)

 

서평을 중심으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는 오카자키 다케시는 이 책 <장서의 괴로움>에서 넘쳐나는 책 때문에 겪었던 자신의 경험과 같은 경험을 했던 여러 작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일본 작가인지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감탄하게 만드는 일화들이 재미있게 씌어 있어서 책을 읽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예컨대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집이 무너졌다거나 무너지기 직전의 사례가 잇달아 나옵니다.

 

나도 한때는 책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짬짬이 했던 여러 아르바이트 덕분에 벌어들이는 고정수입이 짭짤하던 시기였죠. 그 돈으로 동네 서점을 제집 드나들듯 했었고, 책은 나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마땅한 책장도 없었던지라 바닥에 쌓아 놓는 것으로 책정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간이 비좁아져서 잠을 잘 수도 없는 처지에 이르고 보니 어떤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그대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집 주변의 건재상에 들러 널빤지 몇 장과 빨간 벽돌을 사서는 방 안의 사방 벽면에 책꽂이를 만들었고, 그럭저럭 책도 정리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방은 다시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사들인 책도 책이었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이 빼서 읽고는 제멋대로 던져 놓은 탓에 책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죠. 다시 정리하기를 몇 번, 안 되겠다 싶어 필요없는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하더군요. 결혼을 하고 한동안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낸 적도 있었지만 책을 사들이는 병(?)은 다시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주말부부로 지내는 게 문제였습니다. 아내의 잔소리가 없으니 책은 날로 불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더군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숙소 주변의 아이들에게 책을 나눠주는 일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각자가 읽고 싶은 책을 빌려주었더니 반납하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책의 양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아끼던 책이 보이지 않아 가끔 속상한 적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합니다. 요즘은 아예 새로운 책을 구입하거나 공짜로 받은 책이 생기면 내가 먼저 읽은 후 아이들을 불러 나누어주곤 합니다.

 

"원고를 집필하는 동안 여러 사람이 '장서의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심지어 내게 곤혹스러운 사정을 털어놓은 이도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됐다. '책이 너무 늘어 걱정'이던 투정은 결국 자랑삼아 자기 연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p.235)

 

작가는 책의 말미에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 신념을 밀고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괴로워'하며 살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나도 그가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전자서적이 난무하는 세상에 아직도 촌스럽게 종이책을 읽느냐 타박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기술이 지금보다 더 발달한다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들였던 버릇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잠들기 전에 읽는 종이책의 푸근한 느낌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괴로움을 안고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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