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산을 찾는 사람 중에는 몸과 마음 중 어느 하나가, 또는 둘 모두가 아픈 사람이 많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저는 숫제 그런 쪽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지냈습니다. 적어도 그런 사람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종편 프로그램의 <나는 자연인이다>에나 나올 법한 그런 곳에서나 살아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었기에 지병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야산을 매일마다 오르내릴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산에 올라 가볍게 몸을 풀고는 등산로를 따라 걷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마주치던 분이었습니다. 일년 사계절 동안 거르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아주머니도 그 중 한 분이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걷다 보니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아주머니의 등산 연륜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치는 분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방금 지나간 사람은 나이가 에순이 넘었고, 그전에 지나쳐 간 빼빼한 여자는 대장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고..." , 아주머니는 마치 중계를 하듯 말씀하셨습니다. 본인도 산을 오르기 전에는 많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젊어서는 안 해본 일 없이 억척스럽게 일을 해서 아이들 교육시키다 보니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산을 찾기 시작했답니다. 어떤 날은 밥도 거른 채 하루 종일 걸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먹는 약 때문에 한동안 빠지지 않던 붓기도 그렇게 걸으면서 뺐다고 했습니다.

 

왜 아내와 같이 나오지 않았느냐 묻기에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주말부부로 지낸다고 하면 이런 저런 질문이 한동안 이어질 것 같아서 말이죠. 아내는 산에 오는 걸 싫어해서 나 혼자 다닌다고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더 멀리까지 간다는 아주머니와 헤어져서는 왔던 길을 되짚어 산을 내려왔습니다. 아주머니의 보조에 맞추느라 천천히 걸었던 탓에 시간은 꽤난 지체되었더군요. 산을 찾는 사람 대부분이 산을 오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게 마련이라던 아주머니의 말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뱅뱅 맴을 돕니다. 나는 산을 찾는 사람 대부분이 나처럼 그저 산이 좋아서 찾아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 아픔을 보지 못했습니다. 귀찮다는 이유로 일부러 외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장소] 2015-07-03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인지 몸인지 동병상련은 어딘가 흔적을 지문같이 나타내는 건가 하고말이죠,
드러나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어디를 이동하거나 턱없이 서있는
길에서도 저한텐 아무나 말을 걸어옵니다. (도를..이 아니고..) 무슨 말이든 자꾸
하고 싶은 건지, 시키고 싶은 건지, 사정을 말하곤 해요. 어디가 아팠다는 둥...
지금은 어떠하다는 식으로..저는 들리니 듣는 것 뿐..처방을 하는 사람도 뭣도 아닌데..
금방 제 볼일이 있음 지나쳐 가야 하는 데도..그럽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그렇게 말하는 이, 그런데 그러고 나면 가벼운 모양입니다. 어쩐지 제게 올 때 보단
가면서의 인상이 한결 편안해 뵈는, 웃으니까 그런가 하고 느낍니다. 별일 이죠..^^

꼼쥐 2015-07-07 13:04   좋아요 0 | URL
유난히 편해 보이는 인상의 사람이 있지요. 다가가기 거북하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아마도 그장소 님의 인상도 그렇게 편하고 푸근해 뵈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편한 인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만만해 뵈는 인상이 아닐까 싶어요. ㅎㅎ

[그장소] 2015-08-13 18:04   좋아요 0 | URL
^^ 만만이..맞을것 같아요..제게도 역시. 부러 낮추자 하는 것이 아니라.싱거운 거죠. 슥~ 지나도 될 정도로요! 벽이나 뭐..그런 것과 같이..그런 것이 저는 또 싫지 않고요. 그것도 좋다고..생각하거든요.
 

밤새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꿀처럼 내리는 비.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비는 밤새도록 나의 잠을 방해하면서 늦도록 잠 못 들게 했다. 마치 한가로운 쇼핑에 억지로 끌려 나간 사람처럼 나는 빗소리에 이끌려 내 기억의 골목 여기저기를 하염없이 헤매었다. 간헐적으로 빗소리는 강해졌다가 다시 약해지곤 했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아침운동에 나섰다. 구름에 가린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가는 빗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먼지 풀풀 날리던 등산로는 반가운 듯 조용히 비에 젖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침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들 울음 소리. 소리가 클수록 침묵이 깊었다.

 

빗줄기는 오전 내내 이어지다가 슬몃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습습한 대기의 흐름은 한결 여름다워졌음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도 나이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얼굴을 갖게 되는 것처럼 계절에도 그 계절에 어울리는 풍경이 있는 법이다. 봄처럼 메말랐던 대기는 이제 여름을 닮아가고 있다. 주말을 앞둔 하루의 기억들이 순번을 정하지 않은 채 쌓여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 대한 느낌이나 감상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별점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나는 사실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어찌나 궁금했던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서평을 쓸 생각은 도통 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어떤 식으로 서평을 쓸까, 어떤 구절을 인용할까 궁리하기보다는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만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서평 대부분을 훑어 보았나 봅니다. 클릭을 해대느라 어깨가 다 아플 지경으로 말이지요. 사실 서평의 내용보다 내가 더 궁금해 했던 것은 별점이었습니다. 다들 3개 내지는 4개의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더군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의 예감이 적중했던 것에 대한 묘한 흥분이 컴퓨터 모니터 위에 한동안 떠돌았거든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잡동사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서평에 드러난 본심과 별점에 주어지는 형식적인 점수가 서로 별개의 것인 양 사뭇 달랐기에 독자 개개인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평을 꼼꼼히 읽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소설 <잡동사니>의 문체 또한 맑고 투명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약 다른 작가가 같은 스토리의 소설을 썼더라면 아마도 삼류 로맨스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소설의 내용만 보자면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관점에 따라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현실에서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격정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독자들의 서평을 쭈욱 읽어본 바로는 정말 그렇게 읽으셨던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은퇴를 선언한 임모 드라마 작가의 작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막장 드라마'로 통칭되는 그이 작품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도 끝까지 '본방사수'를 고집하던 시청자가 의외로 많았으니까요. <잡동사니>도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읽어냈던 듯합니다. 얼마나 맑고 투명하게 그려내고 있는지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욕을 하면서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차마 책을 덮을 수도 없었나 봅니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외설적이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할까 궁금해 하실 분들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윤리적 정서로 본다면 '일탈적 사랑'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미우미는 열다섯 살의 소녀입니다. 그럼에도 미우미는 중년의 남성을 유혹하여 관계를 맺습니다. 돈을 원해서도 아니었고, 강압에 의한 추행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미우미 본인의 의사였지요.

 

나는 이 책에서 스토리 전개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배경 설명에 주의해서 읽었습니다. 제목의 '잡동사니'는 사람이 아닌, 물건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10대 소녀인 미우미와 40대 여성 슈코의 상반된 감성을 번갈아가며 보여줌으로써 전체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남편과 사별하여 혼자 살고 있는 슈코의 어머니 기리코와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미우미의 엄마, 그리고 미우미 아빠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와타루와 그의 엄마 사야카에 대하여 작가는 그들의 성격이나 습관보다는 오히려 배경, 즉 그들이 소유한 물건에 집중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부유한 기리코의 집에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구입했던 고급 가구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고, 남편과 이혼하고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미우미의 엄마는 사귀는 남자와의 관계가 좋을 때는 집안의 물건을 잘 정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내팽개치고, 남편과 사별한 사야카는 남편과의 추억이 서린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안고 삽니다. 반면 남편에게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 슈코는 어떤 물건이든 완벽하게 정리를 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이것이다' 정의할 수는 없지만 에쿠니 가오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사물에 투영된 열정의 강도'인 듯합니다. 지금은 없는 과거의 사랑만 남은 기리코에게 사랑은 기억 속에서 뒤죽박죽인 것처럼 그녀가 소유한 물건 또한 정리되지 않는 어떤 것일 터이고 지금의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은 슈코에게는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 없으며.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 미우미에게 지금 당장 물건에 대한 소유나 집착은 전혀 필요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은 퍼펙트해." 엄마는 말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인생이란 게 있을까. 모든 인생은 일종의 완벽이며, 나는 그것을 정사情事로부터 배웠다." (p.10)

 

사랑을 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정작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랑을 잃게 되는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 손에 남겨진 것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동사니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그 순간에 함께 소유했던 물건들 중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나이가 어렸을 때의 사랑은 단순한 환상이며 언젠가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미우미가 슈코의 남편을 유혹했던 것은 그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뿐 결코 사랑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테지요.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는 있어도 독차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정사를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독차지하고 싶다면, 원치 않는 것들까지 포함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남편의 여자 친구들이라든지......" (p.27)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추억을 공유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만남을 방해하는 일부일처제는 어찌 보면 윤리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잡동사니>를 읽으며 독자들이 간과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스스로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나이와 신분에 걸맞지 않는 두 남녀의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속 주인공 슈코의 말처럼 너무도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 채 윤리적 잣대로만 이 소설을 읽는다면 임모 작가의 막장 드라마와 하나도 다를 게 없겠지요.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연애 관계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애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그리고 호의와 경의,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그 다섯 가지를 받고 만족하지 않는 남성은 없다." (p.160~p.161)

 

우리는 살아가면서 결국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 하나하나의 사랑은 모두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고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개별적이고도 독자적인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런 듯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삶과 비슷하게 살려고 아무리 노력해본들 완전히 똑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나하나가 다 다르기에 우리의 삶은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결국 삶의 일부분으로서의 사랑도 각각 다 다른 것이기에 완벽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일이 떠오르자 어쩐지 무서워진다. 슈코 씨는 냉정하고 온화하며, 아줌마 말투의 사야카 씨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같은 말을 했다. 두고두고 간직해두는 것. 두 사람에게 그것은 아마도 중요한 일이리라." (p.2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아, 신경숙 작가는 여전히 젊구나' 하는 것이었다. 표절을 주장한 이응준 작가도 참 까칠하다거나 신경숙 작가가 잘못했다거나 하는, 사태의 본질에 대한 내 자신의 어떤 의견이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보다는 오히려 신경숙 작가가 아직은 젊구나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먼저 들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사실 나는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애독자인 셈이다. 꼭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표절 의혹에 대해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작가가 젊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그녀의 물리적인 나이도 나이려니와(사실 그녀는 5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다) 그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세상 이치를 어느 정도 알 만도 할 텐데 여전히 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인생이란 어차피 나와 세상과의 한판 싸움이다. 그러나 지는 쪽은 항상 나라는 사실이다. 삶에서 배우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수백 번, 수천 번 지고, 그로 인하여 상처 받고,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아파보았으면 이제 세상에 맞서 싸우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도 한데 작가는 여전히 세상과 맞서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못해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말한다고 해서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지 않고 버틴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사죄하지 않고 버티면서 너희들은 너희들, 나는 나 따로 분리되어 사는 방법과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미안하다, 죽을 죄를 지었다 사과하고 그들이 용서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 방법이 그것이다.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사과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바꿔볼 요량이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세상을 덜 산 사람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오직 시간과 환경에 의해 바뀔 뿐 내 사과의 말 한 마디로 금세 바뀌는 건 아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나면 세상 살기가 조금 편해진다. 그들이 나에 대해 믿고 생각하는 대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옳다고 인정해주면 된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고 세상과 싸울 일도 없다. 그보다 편한 방법을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 황희 정승이 했듯이 당신도 옳고 또 당신도 옳다고 인정하면 된다. 굳이 나를 내세워 분란을 만들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하여 나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바뀌는 건 결코 아니다. 다들 경험해 보았겠만 내가 아무리 얼르고 구슬른다고 해도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의 생각조차 바꾸지 못한다. 평생 동안 말이다. 다만, 내가 배우자의 생각을 무작정 인정하면 그 순간부터 배우자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한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의 사적인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짧은 시간 안에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일들과 마주칠 때면 아직 오지도 않은 가까운 미래를 향해 심통 사나운 노크를 해대곤 한다. 물론 그 시발점은 언제나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말이다. 예컨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날, 한동안 미루기만 했던 방청소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거나, 몇 개 되지도 않는 밥그릇을 적당히 돌려가며 사용하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될 때, 우렁각시도 기대할 수 없는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설거지며, 빨래며, 청소 등등을 말끔하게 끝마치고 식탁에 느긋하게 앉아 냉커피 한 잔을 달게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곤 한다. 이를테면 나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셈인데 그렇게 하고 나면 이따금 움직거릴 힘이 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긴 기다림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야금야금 아껴가며 취해야 할 대상인 듯 여겨져 상상도 가끔 미안해진다. 내가 상상한다고 그 달콤한 기분이 쉬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동시에 예술가로도 이름이 난 박상미를 알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번역을 맡았던 그녀에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게다가 나는 번역 문체를 꼼꼼히 따지는 까탈스러운 독자가 아니던가. 박상미 작가는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 풍기는 차분하고도 따뜻한 느낌을 무리없이 제법 잘 표현했었다. 영어로 씌어진 작품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 영어만 잘한다고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작가로서의 기질과 섬세한 감성뿐 아니라 뛰어난 한글 실력이 덧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작 <나의 사적인 도시>를 읽는 내내 여동생 생각이 났다. 1996년 대학을 졸업한 후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는 작가와는 달리 여동생은 그보다 늦은 2003년에 단순히 그곳에 살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같은 도시에 살고는 있지만 그 큰 도시에서 동생과 작가가 서로 안면이 있을 것이다 장담할 수만은 물론 없다. 애 둘을 키우며 이제는 완전한 미국 아줌마의 태가 나는 동생은 지난해 있었던 아버지의 장례식에 뒤늦게 참석했었다. 그 자리에서 동생은 꺽꺽 울음을 삼키며 대상도 없는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내었었다.

 

작가가 말하는 '사적인 도시' 뉴욕은 그야말로 '사적'이다. '사적인 도시'를 나는 '고향'과 '여행지'의 중간쯤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삶의 권태와 익숙함에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낯섦과 긴장감이 상존하는 공간일 터이다. 작가에게 뉴욕은 딱 그런 곳이다. 삶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지만 여행자의 외경과도 사뭇 거리가 있는... 동생이 사는 뉴욕은 또 다른 '삶의 기착지'였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주소와 우편번호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작가에게 뉴욕은 취미 생활을 하는 어느 공간처럼 가볍고 분주하다. 살짝 긴장감이 묻어나지만 진득한 땀냄새는 없는, 매일매일이 소풍을 가는 어느 봄날처럼 설레는 그런 곳이다.

 

"내가 태어난 도시가 아니라 내가 살기로 선택한 도시, 뉴욕은 나라는 개인에게 매우 사적인 은유였다. 내가 자라나며 불만을 품었던 중산층적 가치들의 전복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 안정과 위생과 효율보다 도전과 거침과 우회가 인정되는 곳. 불가능하게 치솟은 빌딩처럼 위대함이 꿈꾸어지고 시도되는 장소로서의 은유. 뉴욕은 내 삶의 변명들을 뭔가 다른 것으로 바꾸어가는데 필요한 나만의 내면적 장치였다." (p.87~p.88)

 

<나의 사적인 도시>는 삶의 진실성보다는 약간의 겉멋을 부린 그런 책이다. 몸빼 바지가 아닌 원피스와 스카프로 한껏 멋을 부린 어느 여인이 연상되는.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2005년 11월부터 2010년 6월까지 4년 반의 시간 동안 뉴욕에서 써 내려간 블로그의 포스트를 간추리고 재구성해 묶은 산문집이라고 한다. 지인들은 물론 다수를 차지하는 익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블로그에서 포스팅 주제로 쓰기에는 땀내 풀풀 나는 일상보다는 오히려 공연과 전시회와 문학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도 우아함을 잃지 말라고,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다고 상상할 때가 있다. 뜻은 높고, 판단과 실행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해야 하고, 태도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외롭고 외로운 여왕이나 장군을 떠올리라고. 영예로운 뜻과 반듯한 말과 생각, 칼날 같은 실행이 있다 해도 관용이나 인간적 연민이 없다면 우아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곧음만을 자랑하던 직선이 몸을 살짝 구부려 공간을 품을 때 비로소 우아한 곡선이 된다. 베라자노 브리지는 브루클린의 한 지점에서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지점까지 그렇게 건너간다." (p.237)

 

어느 곳에서 산들 한 점 삶의 애환이 어찌 없을까. 나도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반짝거리는 빌딩의 유리에도 칙칙한 삶의 시간이 주책없이 달라붙는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뉴욕, 그곳이라고 삶의 번잡함이 왜 없으랴. 작가라고 이방인의 슬픔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는 예술과 문학과 공연과 전시회와 자신의 일과 만남만 이야기할 뿐 보편적 삶이 수놓는 저지대의 풍경은 그리지 않는다. 내가 공감할 수 없었던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내가 사는 지구위 어느 곳의 또다른 삶이 아닌, 다른 우주의 한 귀퉁이를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나의 모습을 수백 번 상상해야만 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