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꿀처럼 내리는 비.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비는 밤새도록 나의 잠을 방해하면서 늦도록 잠 못 들게 했다. 마치 한가로운 쇼핑에 억지로 끌려 나간 사람처럼 나는 빗소리에 이끌려 내 기억의 골목 여기저기를 하염없이 헤매었다. 간헐적으로 빗소리는 강해졌다가 다시 약해지곤 했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아침운동에 나섰다. 구름에 가린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가는 빗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먼지 풀풀 날리던 등산로는 반가운 듯 조용히 비에 젖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침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들 울음 소리. 소리가 클수록 침묵이 깊었다.

 

빗줄기는 오전 내내 이어지다가 슬몃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습습한 대기의 흐름은 한결 여름다워졌음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도 나이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얼굴을 갖게 되는 것처럼 계절에도 그 계절에 어울리는 풍경이 있는 법이다. 봄처럼 메말랐던 대기는 이제 여름을 닮아가고 있다. 주말을 앞둔 하루의 기억들이 순번을 정하지 않은 채 쌓여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