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일입니다만 풀릴 기미가 조금도 없는 걸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됩니다.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 여건도 그렇고 대책이랍시고 내놓는 정부의 정책도 그닥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는 듯 보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저도 그럴진대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라면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의 취업 경쟁은 그야말로 전쟁에 가깝습니다. 취업 준비생이나 신입사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어찌 사나 싶은 게 측은한 마음이 절로 들게 됩니다. 게다가 취준생들이 그동안 힘들여 쌓았던 스펙들도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회사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젊은이들의 고민은 더 깊어진 듯합니다. '脫스펙'을 선언하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신입사원 채용에 있어 스펙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을 꺼내들었다지요.

 

직무 경험과 관련한 에세이를 요구하는 회사가 늘어났는가 하면 현대자동차의 입사 희망자는 지원 이유와 역량 소개 2000∼3000자, 인생의 가치관과 구체적 입사동기를 각 1000자씩 써야 하며, 공기업인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상반기 인턴공모에서 26개 항목 8200자 분량을 요구했다는데 이 정도면 단편소설의 절반 분량을 요구하는 수준입니다. 자소서 난이도가 높은 은행의 경우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오죽하면 은행 이름과 신춘문예를 결합해 ‘신한문예’ ‘우리문예’ 식으로 호칭되겠습니까. 인사담당자들도 취준생들이 제출한 방대한 분량의 자소서를 면밀히 검토하여 엄정한 점수를 매기려면 이제부터라도 문학적 소양을 길러 작가로 등단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소서 비중이 늘어난 것은 지원자의 직무수행 능력을 파악하는 동시에 허수를 솎아내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에 대해 비교해 기술하시오”라든지 “당사 브랜드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인지도를 제고시킬 참신한 아이디어와 그 실현방안을 제시하시오”처럼 추상적이거나 전문적인 항목을 만났을 때 취준생들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요. 취업 조건에서 글쓰기 역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며 그러한 추세는 유행처럼 번질 것입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할 뿐 아날로그에 취약한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현상은 형벌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겠지만 노조를 비판한 새누리당 대표의 말에가수 이승환 씨는 “친일파 청산해서 재산 환수하고 사자방(4대강사업, 자원외교, 방산사업)에 엄한 돈 쓰지 않았으면 소득 5만 불 됐을 것”이라고 글을 남겼다지요. 하나의 현실에 대해 그들이 갖는 생각과 처방은 너무도 다양한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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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흥분 - 98일간의 기록 마이 리틀 트래블 스토리
유지혜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여행지에 와서도 똑같이 할 거면 그냥 집에 있을 것이지 뭐하러 왔어?' 타박을 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다. 내게 있어서 가장 좋은 여행이란 여행지에서도 집에 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 없이 편안히 지내다가 아무일 없었던 듯 생업에 복귀하는 것이다. 장소와 시간이 바뀐 낯선 곳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즐겁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상의 여행이라는 얘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신문을 보거나 현지어로 방영되어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TV를 잠시 보는 등 여행을 왔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고 느긋하게 지내고자 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여행에서 얻은 나만의 경험 탓이기도 하지만 여행 후에 겪게 되는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여행 후에 남게 되는 것이라고는 정리하기조차 힘든 과도한 사진들과 극심한 피로뿐이다. 그것은 차라리 며칠 간의 여행이 아닌 며칠 간의 유배를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행지에서 어떤 것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그 여행지에서 내가 느꼈던 여유와 만족감이다.

 

"여행에서는 뭐가 그리 피곤한지 꼭 낮잠이 필요하다. 특히 파리의 햇살은 나를 달콤한 무기력함 속으로 몇 번이고 빠뜨렸다. 꾸벅꾸벅 졸다 머리를 박고 마는 닭처럼 말이다. 미술관, 오디오를 듣는 섹션에서 헤드폰을 끼고 예술 영상을 클릭해보다가 잠이 들어 한 시간을 꼬박 졸았다. 서점에서 그토록 열을 내어 책을 보다가 정작 돈을 내고 올라온 전시관에서는 졸음만이 나를 반긴다. 침을 흘리며 졸고 있던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혼자 킥킥대다가 끼니 걱정을 시작한다. 가끔은 유명한 작품보다 이런 게으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p.135)

 

유지혜의 여행기 <조용한 흥분>을 읽는 나의 손길은 유난히 가벼웠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의 생기발랄함이 내 손에 더해졌는지도 모른다. 스물세 살의 나이에 떠난 98일간의 유럽 여행기인 이 책은 한 달간의 첫번째 유럽 여행(1부 ‘첫 여행’)과 이후 다시 유럽으로 떠나 두 달여 동안 돈을 벌며 생활했던 두번째 유럽 생활(2부 ‘다시 여행’)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소개글에서 보면 2만여 팔로워를 보유한 인스타그램의 스타라는데 나는 정작 그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종종 이제 막 자신의 삶을 기획하거나 원하는 방향을 향해 방금 첫발을 뗀 사람들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하곤 한다. 요즘 들어 짧았던 내 청춘의 날들이 잘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뭉텅이로 나이를 먹게 되었다거나 어느 영화에서처럼 벼락이라도 맞은 후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늙어버려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다만 어떤 향수어린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더이상 그때의 일을 기억 속에서 재현하고 싶지 않은 탓인지 몇몇 특별한 사건을 제외하면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몹시도 서툴렀고, 그럼에도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은 어쩌면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비록 책을 통하거나 이따금 있는 젊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듣게되는 간접 경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을 읽는 동안만큼이라도 그때의 기분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여행기로 따진다면 이 책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작가의 이력도 세상의 이목을 끌 만큼 특이한 게 없고 말이다. 게다가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즘, 스물세 살 여자애의 철없는 유럽 여행기는 얼마나 흔해빠진 일인가. 그러나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첫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멀마 지나지 않아 작가는 런던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인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도 없이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엄마에게 단 한 푼도 받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하고, 내 힌으로 돈을 벌고 버텼다. 그렇게 두 달하고 한 주를 살았다. 호화로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돈을 벌고 생활을 만들어가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p.347)

 

책을 펼치면 목차와 그녀를 소개하는 몇 장의 사진에 이어 소설가 김연수의 말이 등장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김연수, 『소설가의 일』)” 휴대전화 메모장과 작은 몰스킨 수첩에 스스럼없이 써내려간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일 수 있던 힘은 바로 그곳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스물셋 여자애의 철없는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을 통한 그녀의 성장기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허락한 튼튼한 마음으로 새해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이전의 삶이 틀린 것도, 지금의 삶이 옳은 것도 아니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 조금씩 나다운 면모를 찾아가는 것,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발자국을 꾸준히 찍는 것뿐이다. 나는 나를 숨쉬게 하는 순간을 찾아 집중하고 있다." (p.349)

 

프란세스크 미랄레스의 소설 <일요일의 카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세상 최고의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 카페 간판에 네온사인으로 빛나던 문구이다. 여주인공 이리스는 이 문구에 끌려 카페를 찾게 된다. 책이라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도, 또는 어떤 장소라는 것도 나를 이끌었던 어떤 특별한 힘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왕의 권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내 삶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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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 - 구겐하임 문학상 작가 앤 라모트의 행복론
앤 라모트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날씨가 궂어 야외활동은 도무지 엄두를 내기 어려운 날에는 뭔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혹은 이유도 없이 속이 출출하고 허하여 뭔가 맛있는 음식이 없을까 찾게 된다. 방금 밥을 먹고 돌아섰거나 더위에 지쳐 움직일 의욕도 없으면서 말이다. 더위는 마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족쇄처럼 내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나는 이미 오래 전에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도 모자라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충성서약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런 날씨에 사람들은 대개 마약이나 술에 취한 것처럼 날씨에 취하여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나는 뭐가 먹고 싶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오늘처럼 날씨가 궂은 날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생 전체의 비교적 긴 여정에서도 사춘기의 몇 년 동안, 혹은 젊은 날의 몇 년, 아니면 쉰을 넘긴 장년의 몇 년을 마치 술이나 마약에 취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흘려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 당사자에게 떠넘기고 비난이나 멸시를 달게 받도록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또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제도가 한 개인을 극한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만 내가 날씨에 취하여 멀쩡한 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 보낸 것처럼 말이다.

 

앤 라모트의 <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조금쯤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나는 지금 두서도 없이 횡설수설 하고 있지만 말이다. 앤 라모트의 자서전과도 같은 이 책은 작가의 불운했던 과거를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산을 좋아하고 조류에 조예가 깊었으며 박식하고 잘생긴 작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했던 반면 지나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같이 마약을 하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다반사였고, 딸에 대한 친구들의 지나친 놀림도 그냥 받아 넘겼다. 단 종교에 관한 한은 무지하고 세련되지 못한 자들이나 신앙을 갖는 거라는 오만함을 보였다. 엄마는 피아노 솜씨가 뛰어났고 빈민촌 아이들을 위한 독서반을 운영하는 등 활동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부부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남편을 붙잡느라, 변호사가 되려고 법대 진학에 애쓰느라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틈이 없었다. 그렇게 달랐음에도 부부는 성적이 우수했던 앤이 B+가 하나라도 적힌 성적표를 내보이면 낙제라도 한듯 바라보는 것으로 딸을 기죽이는 공통점을 보였다.

 

"나는 내가 조금만 더 잘할 수 있다면 간절히 원하는 것들이 꼭 이루어질 것 같았다. 가족간의 결속감, 푸근한 마음의 평화, 우리집에는 별 문제가 없으며 아빠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거란 믿음...... 마약이 도움을 주었다. 내가 괜찮은 인간이며 삶이 견딜 만하다는 기분,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는 데 마약 만한 것이 없었다." (p.26)

 

정서적 배고픔을 채우려는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안정의 욕구를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어린 소녀가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내아이들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고 야구 카드를 얻어내거나, 테니스 시합 전 날 친구와 술을 진탕 마시거나, 남자애들과의 성적인 만남을 갖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마약을 하거나, 약물중독과 폭식, 유부남과의 연애, 임신과 낙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 이야기를 써내려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고 싶어 발버둥을 쳤던 작가의 처절한 몸짓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가장 친했던 친구 패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작가 자신을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았던 듯하다.

 

"패미의 유골함을 받아들 무렵에는 나에게는 샘이 잇었다. 따라서 삶의 불가해성과 혼돈을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 가운데 하나다. 아이를 낳고 나면 세상이 훨씬 덜 정연하고 덜 이성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p.107)

 

아들 샘이 태어나면서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구원을 받은 셈이었지만 이렇듯 우리는 가족으로 인해 삶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도, 그 밑바닥에서 땅을 박차고 올라올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치부하며 쿨하게 넘기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가족이란 용서의 훈련장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식구들의 온갖 괴상한 언행과 고집을 눈감아주게 된다. 그러고나면 식구들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한테도. 그것은 트랜스미션이 자주 고장나는 헌 차의 운전법을 익히는 것과 같다. 그 차의 기어 변환 요령을 마스터하면, 다른 어떤 차도 몰 수 있는 것이다." (p226)

 

삶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또는 슬픔과 용서에 대해서, 신과 기도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웠던 작은 깨달음들을 작가는 이제 유쾌하게 말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보트하우스에서 술과 약물에 취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이르곤 했던 앤 라모트는 이제 없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정말이지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앤 라모트의 삶에서 어느 한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기구한 삶을 살아서 작가가 될 수 잇었던 것인지, 작가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기구한 삶을 살게 된 것인지, 하는 생각 말이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은 거친 숨을 토하는 듯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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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해외에 사는 지인들로부터 걸려 온 안부전화를 여러 통 받았습니다. 저는 마치 임종 직전의 환자가 되어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들 속보로 타전된 한반도 소식에 매우 놀란 눈치였습니다. 게다가 남과 북이 수십 발의 포격을 주고 받는 등 군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뉴스 보도는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떠도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한껏 자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직까지는 생명에 지장이 없으며 생수와 비상식량 등을 넉넉히 준비했으니 염려할 것 없다고 농담 삼아 말했더니 막 화를 내더군요. 지금 그런 농담할 때냐고 말이지요. 사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게 다인데 말입니다. 마음이라도 여유있는 척 해야지 그들도 덜 불안하고 저도 터져나오려는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전화 중에서 단연 압권이었던 건 프랑스에서 걸려 온 후배의 전화였습니다. 현 정권이 들어서던 해에 이 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처자식을 데리고 이민을 결행한 후배였습니다. 후배는 저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며 그때(이민을 가던 때) 내가 뭐라 그랬느냐, 희망이 없으니 선배도 떠나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마치 채권자가 이자도 내지 않는 채무자를 닥달하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망연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북한의 김정은이 제시한 마감 시간이 멀지 않았군요. 이 글을 읽는 분 모두가 무사하시길. 그리고 한반도의 두 지도자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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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2015-08-2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신경쓰고 있으면 당연히 불안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꼼쥐 2015-08-25 12:41   좋아요 0 | URL
지나고 나니 남과 북에서 쇼를 한 것만 같군요.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두 나라의 지도자가 국민을 볼모로 쇼를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은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되는 대로 읽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단숨에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대체로 책에서 받는 이런 느낌을 중시하는 편인지라 때로는 책 한 권을 읽는데 두어 달이 걸리기도 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래 걸려 읽었던 책은 내용도 잘 생각나지 않아 결국에는 반드시 다시 읽게 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꼭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수중에 들어온 책도 나름의 운명이 있어서 그렇게 읽힐 운명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왜?'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책을 끌고 이리저리 다니는 바람에 군데군데 헤지고 닳아 중고서점에서 산 낡은 서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김치국물과 같은 이물질이 지저분하게 묻기도 하지만 왠지 모를 친근한 느낌도 덤으로 얻게 된다. 어쩌면 나는 가까워지기 어려운 책과 그런 방식으로 서서히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도 그와 같은 책 중의 하나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책을 다 읽는 데 아마도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의 내용이 다시 궁금해졌고, 그때는 불과 며칠만에 후다닥 읽어냈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책을 꺼내 읽었던 듯하다. 물론 그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나는 '로마의 겨울'을 읽거나 '스펫체스 섬'을 들춰보거나, 때로는 '오스트리아 기행' 부분을 정독하기도 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참, 할 일도 되게 없나보다. 여행기를 그렇게 여러번 읽어 뭐에 쓰려고'하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고.

 

이번에도 나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한 달 이상의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특별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존재했던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하루키도 어쩌면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가을까지, 3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정하고 로마와 그리스 등을 여행한 건 아니었지 싶다. 이 책이 다른 여행기와 확연하게 다른 점도 그런 것이다. 여행의 기간도 기간이려니와 작가는 자신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저 장소만 옮겨 간 채로 익숙한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생활을 일기를 쓰듯 기록한 책이 <먼 북소리>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흔하디 흔한 여행자가 아닌 '생활여행자'였던 셈이다. 작가의 본업인 글을 쓰면서.

 

"아침이 찾아오기 전의 이 짧은 시각에 나는 이처럼 죽음의 기운이 고조됨을 느낀다. 죽음의 기운이 먼 파도 소리처럼 내 몸을 떨게 하는 것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으면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조금씩 생의 깊숙한 곳을 향해 내려간다. 작은 사다리를 타고 나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려간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의 중심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는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그 바로 앞의 어둠 속에서 죽음도 또한 동시에 심하게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p.221)

 

작가는 이 시기에 가끔 번역을 하고, 장편 소설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썼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먼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삼십대 후반의 작가는 타국의 낯선 곳에 터를 잡고 이방인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이 아내와 함께 말이다.

 

"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내고 싶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화내고 싶을 때 제대로 화를 내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된다." (p.79)

 

<상실의 시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에게 큰 전환점을 맞게 한 소설이었다. 그가 작가로 전업한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크게 겪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은 물론 베스트 셀러 작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꼭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인터뷰를 기피하고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지극히 꺼리는 작가의 성향으로 볼 때, 작가로서 유명세를 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소설이 10만 부 팔리고 잇을 때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호감을 받으며 지지를 얻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가 백 몇 십만 부나 팔리고 나자, 나는 굉장히 고독했다. 그리고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왜 그랬을까? 표면적으로는 모든 일이 잘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때가 내게는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다." (p.357)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생각했던 건 그리스의 디폴트 위기가 부각된 시점이었다. 하루키는 자신의 책 <먼 북소리>에서 이탈리아의 국민과는 달리 조르바를 닮은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진지한 면이 있다고 썼었던 게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벼운 여행기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즐겨 읽는 이유는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책의 절반 이상을 화려한 사진으로 도배를 하거나, 현지 가이드처럼 유명 관광지 위주로 설명을 한다거나,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애수에 젖어 의미도 통하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는 대다수 여행기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처럼 가벼운 일상들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러다 언뜻언뜻 여행자만이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시선이 나타나곤 한다.

 

"당신들은 그리스는 관광자원이 풍부하니까 관광에 중점을 두어 나라를 발전시키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국가를 그런 식으로 만들면 매우 위험합니다. 국가재정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안정된 국가를 만들고 싶습니다." (p.395)

 

하루가 멀다 하고 봇물처럼 쏟아지는 여행 에세이 중에서 진품을 찾아내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성능 좋은 디지털카메라 하나 들고 한 두어 달 여행하면서 블로그에 간간이 올렸던 글로 사람들의 시선을 웬만큼 끌었다 싶으면 귀국하자마자 책으로 출간하는 작금의 현실이 원망스럽다. 전업 작가들의 입지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하루키 에세이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의 글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삶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자신의 위치를 문득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책을 읽는 짧은 순간만큼이라도 움켜쥐었던 삶을 잠시 내려 놓고 두 손을 가벼이 놀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는 게 뭐 별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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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8-21 21:4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두세 번 읽은 거 같은데요
꼼쥐님 리뷰를 보니 다시 또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꼼쥐 2015-08-22 14:44   좋아요 0 | URL
가끔 읽어보면 맘에 드는 문구가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때로는 그 문구들이 바뀌기도 하구요. 참, 재밌는 책입니다. 생각할 꺼리도 많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