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흥분 - 98일간의 기록 마이 리틀 트래블 스토리
유지혜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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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 와서도 똑같이 할 거면 그냥 집에 있을 것이지 뭐하러 왔어?' 타박을 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다. 내게 있어서 가장 좋은 여행이란 여행지에서도 집에 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 없이 편안히 지내다가 아무일 없었던 듯 생업에 복귀하는 것이다. 장소와 시간이 바뀐 낯선 곳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즐겁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상의 여행이라는 얘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신문을 보거나 현지어로 방영되어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TV를 잠시 보는 등 여행을 왔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고 느긋하게 지내고자 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여행에서 얻은 나만의 경험 탓이기도 하지만 여행 후에 겪게 되는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여행 후에 남게 되는 것이라고는 정리하기조차 힘든 과도한 사진들과 극심한 피로뿐이다. 그것은 차라리 며칠 간의 여행이 아닌 며칠 간의 유배를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행지에서 어떤 것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그 여행지에서 내가 느꼈던 여유와 만족감이다.

 

"여행에서는 뭐가 그리 피곤한지 꼭 낮잠이 필요하다. 특히 파리의 햇살은 나를 달콤한 무기력함 속으로 몇 번이고 빠뜨렸다. 꾸벅꾸벅 졸다 머리를 박고 마는 닭처럼 말이다. 미술관, 오디오를 듣는 섹션에서 헤드폰을 끼고 예술 영상을 클릭해보다가 잠이 들어 한 시간을 꼬박 졸았다. 서점에서 그토록 열을 내어 책을 보다가 정작 돈을 내고 올라온 전시관에서는 졸음만이 나를 반긴다. 침을 흘리며 졸고 있던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혼자 킥킥대다가 끼니 걱정을 시작한다. 가끔은 유명한 작품보다 이런 게으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p.135)

 

유지혜의 여행기 <조용한 흥분>을 읽는 나의 손길은 유난히 가벼웠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의 생기발랄함이 내 손에 더해졌는지도 모른다. 스물세 살의 나이에 떠난 98일간의 유럽 여행기인 이 책은 한 달간의 첫번째 유럽 여행(1부 ‘첫 여행’)과 이후 다시 유럽으로 떠나 두 달여 동안 돈을 벌며 생활했던 두번째 유럽 생활(2부 ‘다시 여행’)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소개글에서 보면 2만여 팔로워를 보유한 인스타그램의 스타라는데 나는 정작 그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종종 이제 막 자신의 삶을 기획하거나 원하는 방향을 향해 방금 첫발을 뗀 사람들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하곤 한다. 요즘 들어 짧았던 내 청춘의 날들이 잘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뭉텅이로 나이를 먹게 되었다거나 어느 영화에서처럼 벼락이라도 맞은 후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늙어버려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다만 어떤 향수어린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더이상 그때의 일을 기억 속에서 재현하고 싶지 않은 탓인지 몇몇 특별한 사건을 제외하면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몹시도 서툴렀고, 그럼에도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은 어쩌면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비록 책을 통하거나 이따금 있는 젊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듣게되는 간접 경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을 읽는 동안만큼이라도 그때의 기분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여행기로 따진다면 이 책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작가의 이력도 세상의 이목을 끌 만큼 특이한 게 없고 말이다. 게다가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즘, 스물세 살 여자애의 철없는 유럽 여행기는 얼마나 흔해빠진 일인가. 그러나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첫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멀마 지나지 않아 작가는 런던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인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도 없이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엄마에게 단 한 푼도 받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하고, 내 힌으로 돈을 벌고 버텼다. 그렇게 두 달하고 한 주를 살았다. 호화로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돈을 벌고 생활을 만들어가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p.347)

 

책을 펼치면 목차와 그녀를 소개하는 몇 장의 사진에 이어 소설가 김연수의 말이 등장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김연수, 『소설가의 일』)” 휴대전화 메모장과 작은 몰스킨 수첩에 스스럼없이 써내려간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일 수 있던 힘은 바로 그곳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스물셋 여자애의 철없는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을 통한 그녀의 성장기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허락한 튼튼한 마음으로 새해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이전의 삶이 틀린 것도, 지금의 삶이 옳은 것도 아니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 조금씩 나다운 면모를 찾아가는 것,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발자국을 꾸준히 찍는 것뿐이다. 나는 나를 숨쉬게 하는 순간을 찾아 집중하고 있다." (p.349)

 

프란세스크 미랄레스의 소설 <일요일의 카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세상 최고의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 카페 간판에 네온사인으로 빛나던 문구이다. 여주인공 이리스는 이 문구에 끌려 카페를 찾게 된다. 책이라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도, 또는 어떤 장소라는 것도 나를 이끌었던 어떤 특별한 힘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왕의 권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내 삶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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