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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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로봇 기술이 날로 발전하면 언젠가는 살인 청부업자가 할 일도 로봇이 대신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거라고 말이다. 지금도 내가 모르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그러한 일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을 지시한 범인은 과연 찾아낼 수 있기나 한 건지, 그리고 로봇에 의한 살인이 돌연사나 미제 사건으로 처리되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궁금증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로봇을 살인 혐의로 기소할 수도 없는 일이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높아진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테러와 같은 대량살상이나 대형사고로 인한 인명 손실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목숨은 이제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명 손실의 뉴스는 이제 그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도 전달하지 못한 채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어쩌면 로봇에 의한 살인이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을런지도 모르겠다.

 

김언수의 소설 <설계자들>은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구성이나 배경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리 차일드 못지 않다는 얘기다. 소설은 청부살인을 계획하는 설계자와 암살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하나씩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브로커와 암살자에 의해 살해된 사람의 시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사람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었지. 문명이건 예술이건 종교건 하다못해 평화도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것이 인간이란 종이야. 인간이라는 종은 처음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거지. 살인자의 편에 기생하거나 아니면 상대편을 죽이거나.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지. 인류는 그런 아포토시스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거야. 그게 이 세계의 참모습이지.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p.212)

 

소설의 주인공인 래생(來生)은 쓰레기통에서 수녀님들에게 발견된 뒤 '개들의 도서관'에서 성장한다. 말하자면 이 도서관의 관장인 '너구리 영감'이 그를 양자로 받아들인 셈이었다. '개들의 도서관'은 일제시대 이래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집단으로 평가받아 왔지만 민주화와 함께 도서관은 암살의 중심부에서 서서히 밀려난다. 이런 와중에 도서관 출신의 유학파 경영인인 '한자'가 기업형 보안 회사를 설립하게 되고 고가의 암살 청부는 모두 '한자'에게 몰린다. 본의 아니게 '한자'와 '너구리 영감'은 동종 업종의 경쟁자가 된 셈이었다. 물론 '개들의 도서관'과 '한자'가 세운 보안 회사는 모두 위장 사업체라고 할 수 있다.

 

"암살 사업의 팽창을 가속화시킨 것은 자신의 정부를 도덕적으로 포장하고 싶은 새로운 권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여러분, 안심하세요.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라는 표어를 이마에 붙임으로써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무늬가 어떤 것이든 권력의 속성이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p.81)

 

소설은 래생이 전직 장군의 암살 설계를 변동하면서 한자의 회사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충돌하기 시작하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을 빚게 된다. 래생을 전문 킬러로 길러낸 훈련관 아저씨 '추'는 암살 대상자였던 여자를 살려줌으로써 '한자'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 그에 의해 살해된다. 래생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추'가 살해되고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정보 수집원이었던 정안마저 한자와 한자의 암살자인 이발사에게 살해당하자 래생은 도서관과 별개로 움직이기에 이른다.

 

"정안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그림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민첩함, 위장과 잠복 능력, 화려한 변장 기술 같은 것들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사람들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거나 기억을 떠올려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p.224)

 

한편, 설계자에게 아버지를 잃은 미토가 설계의 세계를 전복하기 위해 래생에게 접근해오면서 엄청난 사건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게 된다. 생각해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입과 입을 통하여 알려지게 된 까닭은 긴박한 사건 전개와 시적인 문장, 여러 인물들의 심리를 그럴 듯하게 그려낸 점,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번번이 등장했던 의문사가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멋지게 재탄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장르소설의 특성상 글을 풀어가는 솜씨는 전적으로 작가의 능력에 달려있음은 물론이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 너구리 영감도, 추도, 털보도, 미토도, 이발사도 그리고 심지어 한자도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으로 분노를 키우고, 서로를 증오하고, 또 서로를 죽인다. 모두들 자기 사연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자신의 상처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할까?" (p.350)

 

이 소설을 읽고 문득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장자의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장자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를 향해 화살을 날리려는 순간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매미가 눈에 들어왔고, 매미를 보느라 활쏘기를 멈추었던 그 순간에 장자는 매미를 향해 다가가는 사마귀 한 마리를 보게 된다.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와 사마귀를 노리는 새, 그리고 새를 잡으려는 자신, 장자는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활을 든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화살을 거두고 숲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설계자인 동시에 그 계획을 실현시키는 킬러이며 또한 그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장자가 생각하는 인생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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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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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따금, 위기를 모면하고 용케 책장과 서랍 속에 살아남은 낡은 책들을 펼쳐들 때가 있다. 낙서와 손때로 지저분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들추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어수선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그 나날들이." (p.17)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글자가 갖는 의미를 무심히 지나쳐, 스쳐가는 영상과 이미지, 손끝에 전해져 오는 감촉과 아스라히 잊혀져가던 느낌들이 낱글자의 획 하나하나에서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라는 부제가 달린 <소년의 눈물>은 작가의 서사 구조를 따라 내 어린 시절의 영상을 되살렸던 책이다. 가슴을 향해 짓쳐 오는 먹먹한 시간의 뒷편에는 배를 깔고 엎디어 책을 읽는 소년의 모습과 매섭게 몰아치던 겨울바람 소리와 탄광촌의 암울한 어둠이 마치 한 몸인 양 어우러지곤 한다. 그때의 느낌을 속속들이 표현할 자신은 내게 없다. 다만 가슴속으로부터 두서너 개의 문과 묵직한 덧문까지 밀어 제친 뜨거운 물이 눈가로 쭈뼛거리며 흘러넘칠 뿐이다.

 

일반 독자라면 혹 서경식을 모르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 미술계에서는 익숙한 이름일 테지만 말이다. <나의 서양 미술 순례>로 유명해진 재일 조선인 2세 서경식을 나는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서간집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논리정연하고 반듯한 그의 생각이 퍽이나 맘에 들었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게 꽤나 오래 전의 일인데 나는 이제야 그의 작품 <소년의 눈물>을 읽었다.

 

'독서'를 이야기하는 책들은 대개 자신이 읽었던 작품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은 다르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책들은 국내 독자들이 읽어보는 것부터가 어렵고 작가도 딱히 원하는 바는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작가가 성장해가면서 만났던 책들에 대한 감정을 이해하는 게 적절한 듯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 청년기에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종류의 책을 읽었고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등 책에 얽힌 자신의 삶을 폭넓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서경식이 '살아온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나는 아직 사랑도 죽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열 살짜리 꼬마였지만 이 한 편의 글을 애독했다. 그리고 글을 읽을 때마다 몸 한구석 어딘가가 스멀스멀 저려오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 'Fate'란 '운명' 혹은 '숙명'을 뜻한다"라는, 글 말미에 달린 주석을 보고 나 역시 공책에 "Fate, Fate"라고 써두었다. 과연 나는 어떤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운명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p.32)

 

작가는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을 읽던 이 무렵이 자신이 사춘기로 접어들던 입구가 아니었을까 회상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하여 고독하고 어둡고 조용한 곳으로만 찾아 헤매던 시절. 나의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광산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숙을 쳤었다. 하숙생들의 퀴퀴한 땀냄새가 밴 지저분한 방에서, 갑,을,병 하루 삼교대로 일하는 하숙생들의 부재의 시간에 나는 그들이 사서 아무렇게 방치해 둔 책을 가리지 않고 꺼내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었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가 있었다. 지면의 반을 나누어 세로쓰기 방식으로 인쇄된 <토지>의 깨알같은 글씨를 나는 정말 아껴가며 읽었었다. 하여 지금도 <토지>를 떠올리면 그 방에 떠돌던 하숙생들의 퀴퀴한 땀냄새가 먼저 맡어지곤 한다. 일부러 가둬둘 작정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 번 밴 땀냄새는 그 방의 문지방조차 넘지 못했다. 그 방의 꽃무늬 벽지를 떠돌던 <토지>의 아름다운 문장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사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혀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눈 깜짝할 사이 저 답답하고 안타깝던 지난날에서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사춘기는 벌써 저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마의 산』을 정복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사춘기 때의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p.163)

 

작가의 독서 체험은 다분히 그의 둘째형, 셋째형의 영향이 컸다. 서울대에 유학을 왔던 두 형들이 국보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을 때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그 한마디 말에 자신의 독서를 깊이 되돌아 볼 수 있었고 말이다. '작가는 또한 <프란츠 파농 저작집>읽었던 기억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울려퍼진 한 흑인 지성이 작가 자신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고 회고한다.

 

계절은 이미 가을의 언저리에 다다른 듯 밤에는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바야흐로 등화가친의 계절이 돌아온 셈인데 나는 여전히 여름 한낮의 게으름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여건들, 예컨대 수년째 지속되는 경기 불황이나 어수선한 정국 탓으로 핑계를 대고 있으니 말이다. 젊은 청년들의 눈물과 한숨이 더욱 깊어질 것만 같은 이 계절에 나는 한가로이 <소년의 눈물>을 읽었다. 요즘 내가 하는 독서는 돌로 짓누른 듯 무겁기만 하다. 올해가 가고 새 봄이 오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권의 책을 읽게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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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어서 자신의 여행담을 자랑하거나 크게 부풀려 말할 거리도 되지 못하지만 나는 유독 여행지의 호텔에서 보내는 무료한 시간에 대해 말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재미도 없고 특별한 사건이 있을 리 없는 휑한 풍경을 나는 왜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혹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나는 늦은 밤이나 새벽녘에 도착한 호텔방에서 몸은 천 근 만 근 늘어지는데 말똥말똥 잠은 오지 않아 무심코 틀었던 TV에서 낯선 언어로 듣게 되는 그 나라의 소식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한다. 사건도 많고 들려줄 사고 소식도 많은 우리나라의 뉴스와는 다르게 어쩌면 그렇게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뉴스라고 보도하는 것인지... 나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의 어느 도시에 불시착 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나는 어제 밤 늦은 시각에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런 긴급속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긴급 속보]‘김무성, “딸 32년간 한 번도 속썩인 적 없어”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처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아무리 기삿거리가 없기로서니 남의 집 가정사가 긴급속보로 뜨다니... 어찌나 놀랍던지 혹시 꿈이 아닌가 팔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다.

 

마약 상습 복용자와 결혼한 자신의 딸을 감싸주기 위한 애끓는(?) 부정은 이해하겠는데 그걸 긴급 속보로 전하는 언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의 언론이 딸을 사랑하는 한 아버지의 부정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나?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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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5-09-11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호텔이 좋은 이유가 청소 안해도 되는 것. ㅎㅎ 자고 먹고 쉬고 난 후 툭 털고 팽하니 뒤돌아 보지 않고 나와도 되는 점을 좋아해요.

꼼쥐 2015-09-12 11:31   좋아요 0 | URL
저는 오히려 지저분하게 사용하고 나오면 제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아 뒷꼭지가 따끔거리더군요. 그래서 청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정리는 하고 나와요.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죠.

보슬비 2015-09-1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것 같아요... -.-;;

꼼쥐 2015-09-12 11:30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뭔 할 짓이 없어서 아직 성사되지도 않은 권력 앞에 아부를 하는 것인지...

yamoo 2015-09-1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썅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군요!ㅎㅎ

꼼쥐 2015-09-12 11:29   좋아요 0 | URL
권력에 대한 아부가 도를 넘은 것이지요. 이런 놈들도 기자라고 할 수 있는지 정말...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사회인대학교 낯가림학과 졸업하기 - 낯가림 심한 개그맨의 우왕좌왕 사회 적응기
와카바야시 마사야스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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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아랫글에는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는 비속어가 섞여 있으니 아이들의 교육에 저해된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읽지 말 것을 권함.)

 

다른 사람의 말을 설렁설렁 듣다가 혼쭐이 났던 적이 몇 번 있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학교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닌데 이따금 멍 때리거나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는 게 더 쪼잔하지 않나, 하는 게 내 생각이고, 그렇게 집중이 안 되면 '내가 지금 집중할 수 없으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할 것이지 왜 그런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느냐, 는 게 아내 생각이다. 흠,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닌 듯싶다. 내 변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이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할 때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아무리 듣기 싫은 말이라 할지라도 꾸역꾸역 들어주는 편이다. 양념 삼아 이따금 멍 때리거나 딴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요 앞에 함정이 있어"라고 주의를 줘도 "그건 당신이 가는 길이니까 그렇지"라고 귀담아 듣지 않다가 함정에 빠지고 나서야 "아, 그 사람이 말한 대로잖아!" 하고 깨닫는다. 아집이 강한 것이다. 천재라면 아집이 강해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해서 결과를 낸다. 하지만 내 경우는 아집에서 출발해 결국 통념으로 귀결한다. 그리고 전부 내 잘못이야, 라고 반성한다. 그런 일이 내 인생에는 숱하게 많다. (p.168)

 

<사회인대학교 낯가림학과 졸업하기>를 읽다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오랜 무명 생활과 강한 자의식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저자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한 개그맨이 되어 세상과 만났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남달랐을 것이다. 2009년과 2010년에 방송 출연 횟수 1위를 기록하였고 그 후 저자는 월간 잡지 <다빈치>로부터 칼럼 연재 청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사회인 2학년'이라는 제목으로 그때 썼던 칼럼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는 법은 없다. 아니, 어떤 행운으로 인해 그 자리에 오를 수는 있어도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내기는 어렵다. 우리 주변에서도 벼락출세를 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미처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은 언제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짧은 순간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예컨대 도박이나 음주운전, 성추문, 폭력이나 막말 등 그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결국 그는 그 자리를 유지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셈이다. 본인도 자신의 능력에는 버거운 그 자리가 심히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그런 부담이 행동으로 튀어나왔을 뿐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수업을 빼먹고 공원에 앉아 있곤 했다.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 벤치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란 의외로 어렵구나. 좋아, 더욱 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보자!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버렸잖아! 바보, 생각하지 말자니까!'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p.58)

 

나도 학창시절에는 저자처럼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다. 발표할 사람 손들어 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앞장서서 따라본 적도 없었고, 누군가 등 떠밀어 발표를 시킬까 봐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선생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연단에 나설 때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물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고 어찌나 심장이 두근대던지 혹시 이러다가 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저자와 내가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빨랐다는 것이다. 형제가 여럿인 집에서 자란 탓일 게다. 이 사람한테 까이고, 저 사람한테 욕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치만 늘어난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사회에 나가면 꽤나 유용하게 쓰이는 건 확실하다.

 

눈치가 없는 저자는 딱히 취미라고 말할 게 없어서 애먹고, 술자리에서는 재미없는 인간이라고 타박이나 듣고, 너무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가 지적이나 당하고, 평화롭고 한가한 시간에는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되고 도무지 대책이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한테 차이고 저 사람한테 핀잔을 들으면서 저자는 이제 '사회인대학교'의 졸업논문을 쓸 위치에 올랐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은가.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저자의 경험에 실없이 웃다가도 그 일이 마치 내 지난 날의 모습과 닮은 듯하여 짠해지기도 할 것이다.

 

" '나를 바꾸는 책'을 읽은 후에는 내용을 의식하고 있어서 3일 정도는 달라지지만, 일상에 젖어 지내면 곧 원래의 내 모습을 되찾는다. 성격이란 형상기억합금과 같아서 타고난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게 된 점이 '나를 바꾸는 책'을 읽은 수확이었다." (p.81)

 

사회에 진출하면 저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미리부터 조금씩 준비하거나 선배들로부터 몇 가지 요령을 배운다 한들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세월만큼 좋은 선생님도 없다. 다만, 어렵고 힘들다 하여 징징거리거나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저자처럼 누구나 사회인대학교의 졸업논문을 쓰는 날이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간을 어떻게 견디느냐의 문제이다. 내 경험으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중 하나만 택하라면 나는 '글쓰기'를 택하고 싶다. 나를 돌아본다는 것, 객관적으로 나를 살피기 위한 방법으로 독서는 부족한 면이 있다. 저자도 그랬을 듯싶다.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칼럼을 연재하면서 자신을 차분히 살펴보고 그 요령을 하나하나 터득해갔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공짜는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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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09-10 19:31   좋아요 1 | URL
아무리 읽어봐도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는 비속어”는
섞여 있지 않은 것 같은데요~??? ^^
제가 너무 ‘센스’가 떨어지는 건가요?
이거이거 댓글 달면서 ‘눈치’ 없는 사람으로 들통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여엉~ㅋ

꼼쥐 2015-09-11 12:09   좋아요 0 | URL
`멍 때리다`나 `까이다`라는 단어는 사실 비속어이죠. 요즘 아이들도 많이 쓰는 단어이긴 하지만 바람직한 단어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까이다`라는 단어는 표준어로 쓰이는 경우도 있죠. 다른 뜻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ㅎㅎ
쓰고 보니 답변 치고는 제가 너무 진지했던 것 같아요. 다 웃자고 하는 일인데...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 짜릿한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 저널리스트의 한 달에 한 도시 살기 프로젝트!
마이케 빈네무트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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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은 시인의 시 한 편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누구나 다 아실 만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공감할 만한 시일 테구요. 그런 까닭에 책의 제목으로도 몇 번 인용되었던 듯합니다.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 한

그 꽃

 

저는 고은 시인의 시를 좋아하기도 하려니와 어떤 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문처럼 외기도 합니다. 종교 경전도 아닌데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구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단순히 시 한 구절 외웠을 뿐인데 저는 이상하게도 두근대던 마음이 금세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걸 보면 시인은 단순히 시만 쓴 게 아니라 시 속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약이라도 한 덩어리 집어 넣은 것만 같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독자들의 영혼에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를 친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이라면 중독인지도 모르겠구요.

 

암튼 제가 이 시를 인용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마이케 빈네무트의 신간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고은 시인의 시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삼 개월여 살았던 적이 있다는데 저는 사실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작가는 어느 날 독일의 유명 퀴즈 쇼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에 도전하여 50만 유로의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전하면 약 6억 7천만 원쯤 되는군요. 큰 돈이죠. 그녀는 한 달에 한 도시씩 총 열두 도시를 여행하겠다고 답했던 인터뷰를 실천에 옮기기로 작정합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꿈같은 여행을 허락한 셈입니다.

 

"여행의 묘미는 우연이 아닐까 싶어. 아니, 우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해. 뭐랄까, 세계가 말을 거는 느낌? 세계가 윙크를 보내고 나만 해독할 수 있는 암호로 쪽지를 보내는 그런 기분. 이제 겨우 두 달 째인데 벌써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우연과 일치를 경험했어.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이 기분을 꼭 묘사해야 한다면 아쉬우나마 '세계의 품에 안긴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잇을 거야. 먼 타향에서 아주 작지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친밀함, 익숙한 패턴, 관련성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란 생각이 들어." (p.66)

 

눈치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녀가 여행한 각각의 도시에서 편지를 보냅니다. 그녀의 지인들에게 말이지요. 여행의 느낌은 그때 그때마다 다른 것이기에 여행지에서 보낸 그녀의 편지는 가장 솔직한 여행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작가가 아는 열두 사람에게 열두 도시에서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오랜 친구들, 새로 사귄 친구들, 전 남자 친구, 부모님 등입니다. 2011년 1월 1일에 도착한 호주 시드니를 시작으로 1년 동안의 장대한 그녀만의 프로젝트가 실행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어쩐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여행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죠. 정말 멀리 떠나왔구나 싶었어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저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몰라요. 저는 어느 자연 속에 있는 한 인간이었고 저 외엔 아무것도 없었죠. 이것이 명확해졌을 때, 전 행복에 도취되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두 분은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요. 그것은 완전한 자유와 가벼움이었어요. 겁도 나지 않았고 패닉도 없었고 오로지 존재의 기쁨만이 가득했죠." (p.104)

 

시드니, 부에노스아이레스, 뭄바이, 상하이, 런던, 바르셀로나, 텔아비브, 아디스아바바, 아바나 등 마음속에 떠오르는 도시들을 주저 없이 포스트잇에 적은 후 그녀는 한 가지 원칙을 정합니다. 매월 1일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마지막 날에 다음 도시로 떠나는 것. 그녀는 그러나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이틀만에 영원히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녀가 게획했던 여행이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지요. 결국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그곳을 떠나게 되지만 말입니다.

 

"행복한 삶은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어요. 이혼이나 해고의 형태로 인생 설계가 갑자기 무너져요. 두 분 세대에는 이것이 재앙에 가까운 특이한 사례였겠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평범한 일이고, 이동성과 유연성이 미덕으로 통해요. 이런 시대에서 살려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해요. 그건 거의 생존의 조건이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것이 흔들릴 땐 스스로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 하니까요. 여행은 이런 존재적 물음에 답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밖으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떤 가능성들이 있는지, 삶의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를 알려줘요." (p.115)

 

우리가 작가처럼 훌쩍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비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자신이 여행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 떠나버린 자신의 삶 때문에 절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고민으로 인하여 우리는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그녀가 사는 함부르크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책들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삶이 너를 기다려주었어. 이제 네게 멈췄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돼."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고은 시인의 시를 인용했던 까닭을 밝힐 때가 온 것 같군요. 작가도 어느 여행지에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입니다. 태어나서 50년 이상을 살아온 작가의 눈에도 어쩌면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띄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생 자체가 하나의 산을 넘는 것이라면 이제 작가는 그 산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겠지요.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을 작가는 내려올 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인 백로라는군요. 풀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했다지요? 그래서인지 아침운동을 나갔던 새벽 시간에 약한 바람도 불고 날씨는 제법 서늘했습니다. 가을 하늘이 유난히 싱그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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