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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평점 :
일시품절
"지금도 이따금, 위기를 모면하고 용케 책장과 서랍 속에 살아남은 낡은 책들을 펼쳐들 때가 있다.
낙서와 손때로 지저분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들추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어수선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그 나날들이." (p.17)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글자가 갖는 의미를 무심히 지나쳐, 스쳐가는 영상과 이미지, 손끝에 전해져 오는 감촉과 아스라히 잊혀져가던
느낌들이 낱글자의 획 하나하나에서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라는 부제가 달린 <소년의 눈물>은 작가의 서사 구조를 따라 내 어린 시절의 영상을 되살렸던 책이다. 가슴을 향해 짓쳐 오는 먹먹한 시간의 뒷편에는 배를 깔고 엎디어 책을 읽는
소년의 모습과 매섭게 몰아치던 겨울바람 소리와 탄광촌의 암울한 어둠이 마치 한 몸인 양 어우러지곤 한다. 그때의 느낌을 속속들이 표현할 자신은
내게 없다. 다만 가슴속으로부터 두서너 개의 문과 묵직한 덧문까지 밀어 제친 뜨거운 물이 눈가로 쭈뼛거리며 흘러넘칠 뿐이다.
일반 독자라면 혹 서경식을 모르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 미술계에서는 익숙한 이름일 테지만
말이다. <나의 서양 미술 순례>로 유명해진 재일 조선인 2세 서경식을 나는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서간집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논리정연하고 반듯한 그의 생각이 퍽이나 맘에 들었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게 꽤나 오래 전의 일인데 나는
이제야 그의 작품 <소년의 눈물>을 읽었다.
'독서'를 이야기하는 책들은 대개 자신이 읽었던 작품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은 다르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책들은 국내 독자들이 읽어보는 것부터가 어렵고 작가도 딱히 원하는 바는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작가가 성장해가면서 만났던 책들에
대한 감정을 이해하는 게 적절한 듯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 청년기에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종류의 책을 읽었고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등 책에 얽힌 자신의 삶을 폭넓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서경식이 '살아온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나는 아직 사랑도 죽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열 살짜리 꼬마였지만 이 한 편의 글을 애독했다.
그리고 글을 읽을 때마다 몸 한구석 어딘가가 스멀스멀 저려오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 'Fate'란 '운명' 혹은 '숙명'을
뜻한다"라는, 글 말미에 달린 주석을 보고 나 역시 공책에 "Fate, Fate"라고 써두었다. 과연 나는 어떤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운명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p.32)
작가는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을 읽던 이 무렵이 자신이 사춘기로 접어들던 입구가 아니었을까 회상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하여 고독하고 어둡고 조용한 곳으로만 찾아 헤매던 시절. 나의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광산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숙을 쳤었다. 하숙생들의 퀴퀴한 땀냄새가 밴 지저분한 방에서, 갑,을,병 하루 삼교대로 일하는 하숙생들의 부재의
시간에 나는 그들이 사서 아무렇게 방치해 둔 책을 가리지 않고 꺼내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었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가 있었다. 지면의 반을 나누어 세로쓰기 방식으로 인쇄된
<토지>의 깨알같은 글씨를 나는 정말 아껴가며 읽었었다. 하여 지금도 <토지>를 떠올리면 그 방에 떠돌던 하숙생들의 퀴퀴한
땀냄새가 먼저 맡어지곤 한다. 일부러 가둬둘 작정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 번 밴 땀냄새는 그 방의 문지방조차 넘지 못했다. 그 방의 꽃무늬
벽지를 떠돌던 <토지>의 아름다운 문장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사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혀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눈 깜짝할 사이 저 답답하고 안타깝던 지난날에서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사춘기는
벌써 저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마의 산』을 정복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사춘기 때의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p.163)
작가의 독서 체험은 다분히 그의 둘째형, 셋째형의 영향이
컸다. 서울대에 유학을 왔던 두 형들이 국보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을 때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그 한마디 말에 자신의 독서를 깊이 되돌아 볼 수 있었고 말이다. '작가는 또한 <프란츠 파농
저작집>읽었던 기억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울려퍼진 한 흑인 지성이 작가 자신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고 회고한다.
계절은 이미 가을의 언저리에 다다른 듯 밤에는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바야흐로 등화가친의 계절이 돌아온 셈인데 나는 여전히 여름 한낮의 게으름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여건들, 예컨대 수년째 지속되는 경기 불황이나 어수선한 정국 탓으로 핑계를 대고 있으니 말이다. 젊은
청년들의 눈물과 한숨이 더욱 깊어질 것만 같은 이 계절에 나는 한가로이 <소년의 눈물>을 읽었다. 요즘 내가 하는 독서는 돌로 짓누른
듯 무겁기만 하다. 올해가 가고 새 봄이 오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권의 책을 읽게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