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 짜릿한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 저널리스트의 한 달에 한 도시 살기 프로젝트!
마이케 빈네무트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고은 시인의 시 한 편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누구나 다 아실 만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공감할 만한 시일 테구요. 그런 까닭에 책의 제목으로도 몇 번 인용되었던 듯합니다.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 한

그 꽃

 

저는 고은 시인의 시를 좋아하기도 하려니와 어떤 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문처럼 외기도 합니다. 종교 경전도 아닌데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구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단순히 시 한 구절 외웠을 뿐인데 저는 이상하게도 두근대던 마음이 금세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걸 보면 시인은 단순히 시만 쓴 게 아니라 시 속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약이라도 한 덩어리 집어 넣은 것만 같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독자들의 영혼에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를 친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이라면 중독인지도 모르겠구요.

 

암튼 제가 이 시를 인용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마이케 빈네무트의 신간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고은 시인의 시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삼 개월여 살았던 적이 있다는데 저는 사실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작가는 어느 날 독일의 유명 퀴즈 쇼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에 도전하여 50만 유로의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전하면 약 6억 7천만 원쯤 되는군요. 큰 돈이죠. 그녀는 한 달에 한 도시씩 총 열두 도시를 여행하겠다고 답했던 인터뷰를 실천에 옮기기로 작정합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꿈같은 여행을 허락한 셈입니다.

 

"여행의 묘미는 우연이 아닐까 싶어. 아니, 우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해. 뭐랄까, 세계가 말을 거는 느낌? 세계가 윙크를 보내고 나만 해독할 수 있는 암호로 쪽지를 보내는 그런 기분. 이제 겨우 두 달 째인데 벌써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우연과 일치를 경험했어.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이 기분을 꼭 묘사해야 한다면 아쉬우나마 '세계의 품에 안긴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잇을 거야. 먼 타향에서 아주 작지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친밀함, 익숙한 패턴, 관련성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란 생각이 들어." (p.66)

 

눈치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녀가 여행한 각각의 도시에서 편지를 보냅니다. 그녀의 지인들에게 말이지요. 여행의 느낌은 그때 그때마다 다른 것이기에 여행지에서 보낸 그녀의 편지는 가장 솔직한 여행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작가가 아는 열두 사람에게 열두 도시에서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오랜 친구들, 새로 사귄 친구들, 전 남자 친구, 부모님 등입니다. 2011년 1월 1일에 도착한 호주 시드니를 시작으로 1년 동안의 장대한 그녀만의 프로젝트가 실행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어쩐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여행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죠. 정말 멀리 떠나왔구나 싶었어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저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몰라요. 저는 어느 자연 속에 있는 한 인간이었고 저 외엔 아무것도 없었죠. 이것이 명확해졌을 때, 전 행복에 도취되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두 분은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요. 그것은 완전한 자유와 가벼움이었어요. 겁도 나지 않았고 패닉도 없었고 오로지 존재의 기쁨만이 가득했죠." (p.104)

 

시드니, 부에노스아이레스, 뭄바이, 상하이, 런던, 바르셀로나, 텔아비브, 아디스아바바, 아바나 등 마음속에 떠오르는 도시들을 주저 없이 포스트잇에 적은 후 그녀는 한 가지 원칙을 정합니다. 매월 1일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마지막 날에 다음 도시로 떠나는 것. 그녀는 그러나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이틀만에 영원히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녀가 게획했던 여행이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지요. 결국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그곳을 떠나게 되지만 말입니다.

 

"행복한 삶은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어요. 이혼이나 해고의 형태로 인생 설계가 갑자기 무너져요. 두 분 세대에는 이것이 재앙에 가까운 특이한 사례였겠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평범한 일이고, 이동성과 유연성이 미덕으로 통해요. 이런 시대에서 살려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해요. 그건 거의 생존의 조건이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것이 흔들릴 땐 스스로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 하니까요. 여행은 이런 존재적 물음에 답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밖으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떤 가능성들이 있는지, 삶의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를 알려줘요." (p.115)

 

우리가 작가처럼 훌쩍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비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자신이 여행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 떠나버린 자신의 삶 때문에 절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고민으로 인하여 우리는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그녀가 사는 함부르크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책들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삶이 너를 기다려주었어. 이제 네게 멈췄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돼."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고은 시인의 시를 인용했던 까닭을 밝힐 때가 온 것 같군요. 작가도 어느 여행지에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입니다. 태어나서 50년 이상을 살아온 작가의 눈에도 어쩌면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띄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생 자체가 하나의 산을 넘는 것이라면 이제 작가는 그 산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겠지요.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을 작가는 내려올 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인 백로라는군요. 풀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했다지요? 그래서인지 아침운동을 나갔던 새벽 시간에 약한 바람도 불고 날씨는 제법 서늘했습니다. 가을 하늘이 유난히 싱그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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