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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그러나 기억해야 할 많은 것들이 당신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지 않았던가요? 시간의 점멸과 함께 말이지요. 그런 대부분의 인생을 두고 '덧없다' 평하는 것도 아주 일리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세월의 이편에 서서 세월의 저편에 속한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마치 당신과 함께 몇 번 다녀온 기억이 있는 어느 음식점을 우연히 다시 찾았던 어느 날, 종이에 휘갈겨 쓴 폐업 문구와 낡은 문짝에 덩그러니 매달린 녹이 슨 자물쇠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것은 분명 우리의 안타까운 시선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던 일이지요. 그렇다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주인을 향해 우리의 추억을 돌려달라거나 부당함을 항변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이 휩쓸고간 몇몇 기억들에 대해 더러 억울한 생각은 들겠지만 누구에게도 반환을 요구할 수 없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혼쭐이 난 아이처럼 시무룩한 하루가 또 저물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풍경처럼 붙박인 자동차 소음과 간혹 낯설게 파고드는 이웃집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간의 경과는 아랑곳없이 우리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얼마쯤 세월이 흐른 뒤에 아주 조금 남아 있는 미약한 기억에 의지하여 지금의 나를 재구성하는 일은 타인의 삶을 소설로 옮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여름날 쉽게 상하는 음식처럼 박제되지 않은 상온의 시간에서 제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폴 오스터의 <내면 보고서>는 그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십대 후반의 나이에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더듬는다는 건 작가가 보았거나 기억 속에 응집된 어떤 장면을 소설처럼 풀어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말이지요. 하여, 이 책을 쓰는 작가는 '당신'이라는 이인칭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작가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타인처럼 낯설거나 완전한 타인으로 기억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였나? 어떻게 당신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 당신이 생각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생각은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갔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파고들어 가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헤집어 보고 파편들을 들어 올려 빛에 비춰 보기로 하자. 그렇게 해보자. 한번 해보는 거다." (p.11)

 

책은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면 보고서'라는 소제목의 1부는 작가의 유년기부터 열두 살 이전까지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밀려난 듯한 그 기억들은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기억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육십대 후반의 작가에게는 세월의 간극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기억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한동안 머무르는 걸 좋아하게 됩니다. 여섯 살의 어느 행복했던 토요일이나 구체적인 사건도 없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풍경이나 사람들. 우리의 기억이란 때때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안온한 도피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 시절을 기록하는 작가도 아마 그러했겠지요.

 

"그러나 트로피가 부서진 밤으로부터 꼭 26년 후에 스무 번째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을 때, 캐런이 서른여덟 살의 젊은 미망인이 되어 그곳에 있었다. 당신은 다시 그녀와 춤을 추었다. 이번에는 느린 춤이었다. 그녀는 당신들이 열두 살이었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고, 마치 어젯밤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p.109)

 

2부는 '머리에 떨어진 두 번의 타격'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1957년 작가가 열 살 때 보았던 영화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The incredible shrinking man)> (1957년 4월 개봉, 상영 시간 81분, 잭 아널드 감독, 리처드 매시선 원작, 그랜트 윌리 주연)와 1961년 열네 살 때 보았던 영화 <나는 탈옥수(I am a fugitive from a chain gang) (1932년 11월 개봉, 상연 시간 93분, 머빈 리로이 감독, 폴 무니 주연)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십대 시절에 보았던 두 편의 영화가 작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타임캡슐'이라는 소제목의 제3부는 작가의 첫 번째 아내였던 리디아에게 보냈던 작가의 편지들이 실려있습니다. 편지는 주로 1966년 여름부터 1970년대 말에 쓰인 것들이고, 작가의 나이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이던 1967년과 1968년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직 작가가 되지 않았던 풋내기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폴 오스터는 시나리오나 시, 소설을 마구잡이로 쓰면서 창작열에 불타올랐던, 조금은 우쭐하거나 오만했던 자신만만한 젊은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앨범'이라는 소제목의 제4부는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사진이나 이미지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일기를 쓸 때의 문제는 당신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인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향해서라면 너무 이상하고 당혹스러워 보였다. 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굳이 수고스럽게 자신에게 들려준단 말인가. 왜 벌써 경험한 것을 다시 되새기는가 말이다.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이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일기 쓰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그 당시에 너무 어려서 나중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될지 몰랐다. 현재에만 갇혀 있어서 당신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가 실은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일기장을 내려놓았고, 그 후로 47년 동안 조금씩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p.193)

 

늘 그렇듯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또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잘 간추려 책의 내용과 어울리도록 문장을 만들고 나열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우리의 기억이 두서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웃자란 생각들이 이리 건들 저리 건들 방향도 없이 흔들리고 먼 기억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지요? 폴 오스터는 자신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세한 자료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면 보고서>를 읽는다는 건 '폴 오스터 도서관'을 견학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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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에서 늘 소설 같은 현실을 꿈꾼다.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마저 없다면 도무지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우리는 주말마다 로또 복권을 사고, 행복에 겨워 숨이 꼴딱 넘어갈 듯한 가족만 등장하는 주말 드라마를 본다. 이번 주말이면 나도 또한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액수의 로또 당첨금을 받고 숨이 꼴딱 넘어갈 만큼 행복해 하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메워주는 것 중 8할은 슬픔 또는 연민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고운 채에 받쳐 주루룩 흘러내릴 듯한 슬픔만 제거하고 나면 모래에서 사금을 찾듯 행복 알갱이 몇 알쯤 발견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은 순전히 개별적인 것일 뿐, 너와 나를 이어주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하여, 어떤 관계에서든 그 속에 놓인 잠재된 슬픔을 제거하고 났을 때의 가볍고 맨송맨송한 느낌은 둘 사이의 관계를 길게 이어주지 못한다. 말하자면 관계에 있어서의 연민은 둘 사이를 공고히 하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모는 고생하는 자식들이 안쓰럽고, 자식은 또한 세월에 희석되는 부모가 애잔하다. 아내는 밖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불쌍하고, 남편 또한 없는 살림에 동동거리며 식구들 뒤치다꺼리를 하는 아내가 왠지 모르게 짠한 것이다.

 

꿈에서나 그리던 소설 같은 일들이 어느 가을날 감나무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감이 툭 하고 떨어지듯이 당신의 현실에 짠하고 나타난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영혼에 깃든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빨아들이고 당신이 맺고 있던 관계란 관계는 모두 끊어놓을런지도 모른다. 하여, 행복은 가볍고 짧은 것일수록 좋다. 그러나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행복에 관심을 두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올 뿐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오직 행복의 발원을 생각할 뿐 행복 자체를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는다. 어제 편의점에서 복권을 사던 너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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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배신
마크 쉔 & 크리스틴 로버그 지음, 김성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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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제 모처럼 들렀던 도서관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로 가득했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그들 중 다수는 제발 공부 좀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도망을 쳤거나 지긋지긋한 공부로부터 달아날 궁리를 하다가 인근 도서관을 떠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인다. 공부는 뒷전이 된 지 오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에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른다. 물론 밤 늦게 집으로 귀가해서는 온 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나간 듯 피곤에 절은 얼굴로 그들의 엄마에게 귀가 보고를 할 것이다. 공부만 했더니 피곤하다고. 아이의 보고를 들은 엄마도 그 말을 100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도 하지 않고 집에서 오락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빈둥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나가 놀지언정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주었던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마음에도 없는 부드러운 말로 아이를 위로할 것이다.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을 지켜보는 아내도 그 속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닌 모양이다. 아들은 성적에 대한 욕심도 없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을 수 없으니 은근히 걱정도 될 테고, 아들의 태도 또한 괘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먹고 싶다는 거 다 해다 바쳤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배신감도 들 것이다. 주중에는 떨어져 지내는 나는 빈둥거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전혀 없을 듯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아내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수록 나 또한 스트레스 게이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만사 태평한 아들의 일상을 시시콜콜 보고 받노라면 저래도 괜찮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마크 쉔과 크리스틴 로버그가 쓴 <편안함의 배신>을 읽다 보니 아들의 미래가 적잖이 걱정되었다. 나의 유년시절과 비교하면 아들은 불편이나 고생은 전혀 모른 채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력이란 게 불편을 해소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아들은 지금 상태에서 움직일 이유가 크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들의 속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닌데 아들이 지금 100퍼센트 편안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들의 행동으로 봤을 때 크게 불편해 보이지도 않으니 아들을 치열한 공부의 현장으로 내몰 수 있는 방법 역시 없는 듯했다. 아내의 잔소리나 나의 협박이 먹힐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려 아들에게 온갖 불편을 경험하도록 할 수도 없으니 여간 딱한 노릇이 아니었다.

 

"정서적, 신체적 건강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편함에 직면해서도' 편안과 안전을 찾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내 본능 회로를 재훈련시켜 불편을 예상하거나 경험할 때마다 공황발작 버튼을 누르지 않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이런 과정들이 즐겁다고는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이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정한 건강과 행복은 그저 편안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을 배우게 된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진정한 건강과 행복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역경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p.59)

 

현대인에게 편안함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흔한 까닭에 일상에서조차 감지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편안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불편을 참고 견디는 힘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불편은 단순히 불편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편에 적응하여 내성을 키우지 못한 사람은 삶의 어느 순간에 부딪치게 되는 작은 불편이나 역경에도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른바 공황장애가 그것이다.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불편을 찬양하고자 쓴 책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편안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외부적 불편을 견디는 힘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심리적 또는 내부적 불편 또한 견디지 못한다. 그런 예는 우리 주변의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도로에서 나는누구보다도 빨리 달리고 싶은데 규정 속도를 지키는 앞의 차 때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심리적으로 불편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 불편을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앞차를 추월하거나 화풀이를 하려는 듯 크게 경적을 울리곤 한다. 재수가 없으면 이따금 난폭운전으로 처벌을 받곤 하지만 질병과도 같은 그것을 법이 치료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정말이지 공부라면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했었다. 거짓이 아니다. 공부를 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내 노력의 기저에는 가난이라는 현실적 제약과 그것에서 오는 불편이 있었다. 하루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간절한 욕망이 나를 움직였고 피곤함도 잊은 채 공부에 전념하도록 했다.

 

"나는 불편이 그 어떤 편안함보다도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고 확고하게 믿는 사람이다. 무엇인가 되고자 하고,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인생의 성공을 달성하고자 할 때는 불편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강력한 변화의 동인인지도 모른다." (p.296)

 

도서관을 놀이터인 양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편안함의 배신>을 읽었다. 부모들 중 어떤 이는 순진하게 뛰노는 저 아이들을 향해 "배가 불러서 그래." 뭉뚱그려 말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불편함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대를 역행하여 부모 세대로 돌아가게 할 방법도 없고 그들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요만치도 없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성공의 법칙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성공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 더하기 현재의 생활을 즐기는 것 더하기 한가한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지고 현재를 즐기면 미래의 현재도 즐거울 것이고, 한가한 시간에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잘못된 방향을 수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요즘의 아이들은 공부를 즐기도록 만들지 않으면 달리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불편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는 팥쥐엄마가 되기에는 요즘 부모들의 마음이 마냥 여리고 모질지 못하다는 것도 요즘 아이들이 편안함에 마냥 안주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만큼은 누구보다 성공하기를 바라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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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개 있다. 앞산의 능선 위로 부챗살처럼 퍼져 오르는 아침 햇살과 그 햇살을 받아 서서히 밝아지는 뒷산. 밝은 초록의 물결 위로 서서히 옅어지는 운무와 장독대 뒤로 보이던 거미줄! 정말 그랬다. 아침이면 언제나 방사상의 거미줄에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는 이슬 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판타지 만화영화에서나 등장할 만한 방사상의 커다란 거미줄은 더이상 보기 어려워졌다. 징그러운 외모와는 다르게 거미란 놈은 환경 변화에 무척이나 민감하여 각종 오염물질을 감지하는 환경지표생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거미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건 우리의 주변환경이 그만큼 오염됐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얼마전 뉴스에서는 우리나라의 공기질 수준이 세계 180개국 중 최하위권인 173위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예일대와 컬럼비아대가 공동으로 연구하여 발표한 '환경성과지수(EPI) 2016'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공기질 부문에서 100점 만점에 45.51점을 받아 전체 조사대상 180개국 중 173위였단다.

 

환경오염은 비단 자연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국 정부의 정책결정 투명성 순위도 2007년 34위에서 2015년 123위로 급락했고, IMD라는 스위스 기관에서 매년 시행하는 회계투명성 조사에서는 우리나라가 61개 나라 중에 60등을 차지했단다. 회계가 불투명하다고 비판받는 중국이 57위였다니 말 다했지 뭔가. 정부는 요즘 해운과 조선에 대해 구조조정을 하고는 있지만 국민의 혈세로 이미 투자된 수조 원의 자금은 손실로 굳어질 모양이다. 누구 하나 책임지는 것 없이 말이다.

 

자연환경이 나빠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투명성이라도 좋아져야 할 텐데 모두 나빠지는 것만 있고 좋아지는 건 없으니 나라 꼬라지가 참 딱하기만 하다. 그렇게 나빠지다 보니 이 틈에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만 득시글거린다. 수질이 오염되면서 매년 여름 등장하는 큰빗이끼벌레처럼 말이다. 검사장 출신의 홍모 변호사나 판사 출신의 최모 변호사는 모두 자연 환경이 나빠지면서 매년 출몰하는 큰빗이끼벌레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연환경이나 인간환경이 이토록 나빠지니 다들 죽겠다고 아우성이지. 오늘도 미세먼지에, 오존에 주의할 것 투성이인데 도통 어떻게 주의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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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한 고양이 시시
슈테파니 츠바이크 지음, 안영란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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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런지 모르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영혼은커녕 아무런 정보도 담겨 있지 않을 듯한 그 이름으로 인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얼마나 많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지... 예컨대 '슈테파니 츠바이크'란 이름은 마치 낡은 고무 타이어처럼 딱딱하고 거친 느낌이 들게 마련이어서 그녀가 쓰는 글이란 글은 언제나 유머와 감성을 모두 제거한 채 칙칙하고 우울한 느낌만 전달할 것 같잖아. 반면에 빌 브라이슨은 어때?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은 마치 대문자 비(B)를 닮은 퉁퉁한 몸매에 털털하고 인상 좋은 남자일 것 같지? 게다가 그가 쓰는 글은 모두 재미있고 유쾌할 것만 같고. 웃기는 건 한 사람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사람들은 이름 하나만으로 많은 걸 유추한다는 거야. 때로는 황당하게 때로는 제대로.

 

"나는 두 귀로 그 이름을 흘러들어오게 했다. 내게 얼마나 꼭 맞는 이름인가. 왕비의 이름에 걸맞고 시녀에게는 귀족신분을 부여하는 고전적인 모든 의미를 망라하는 이름이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사실은 나 역시 아주 오랫동안 이런 아름다운 치음(齒音)을 원했음을 알았다. "시시," 내 마음은 환희로 가르랑거렷다." (p.50)

 

그렇다. 슈테파니 츠바이크가 쓴 <나를 사랑한 고양이 시시>는 고양이 시시가 주인공이다. 작가가 '슈테판 츠바이크'인데 '슈테파니 츠바이크'라고 잘못 쓴 게 아니냐고? 그럴 줄 알았다.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 생각했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 평전>을 쓴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이지. 반면에 슈테파니 츠바이크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유년생활을 보냈고 작가 겸 극작가로서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고 1993년에는 독일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지.

 

소설의 주인공인 시시는 처음에 살던 집에서 어느 날 탈출을 감행한다. 이유인 즉 고양이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던 집주인이 자신의 주말농장 창고에 쥐구멍이 있는 걸 본 후 쥐를 잡기 위해 시시를 그 창고로 보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시시는 정신과 의사인 율리아의 집이 맘에 들었고 순진한 율리아를 자신의 '양녀'로 삼기로 했다. 비를 맞은 처량한 모습으로 시시는 율리아를 자극했고 애완동물이라곤 길러본 적 없는 율리아도 시시의 연기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율리아와 시시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녀가 자신의 환자를 치료할 때에도 둘은 환상의 콤비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지배하기 위해서 태어났지, 시중을 들자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태생이 고매한 우리 시암 고양이는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생쥐로 배를 채우는 한심한 도둑고양이는 아닌 것이다." (p.14)

 

그러던 어느 날 율리아가 자신의 환자였던 슈테판 베르크를 맘에 두게 되었고 슈테판은 그의 동생 게오르그와 함께 율리아의 집에 들러 카드놀이를 하거나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무렵 시시는 수려한 외모의 수고양이와 사랑에 빠진다. 율리아의 눈을 피해 수고양이와 사랑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날 밤, 시시가 사라졌다는 불안감에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의 불을 제대로 끄지 않았던 탓에 화재가 났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자고 있던 율리아를 시시는 다급하게 깨운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입에 올리고, 수없이 한숨짓고 노래하는 사랑…… 나는 이런 사랑이란 싱싱한 연어 한 토막만도 못 하고 몇 차례 후려갈겨 떠나보낼 정도의 가치만 부여하고 싶다. 아침 여명 속에서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조차 한기와 갈증과 허기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따뜻한 집과 율리아의 따스한 체온이 어찌나 그립던지 애처로운 소리가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p.125)

 

시시의 무용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환자인 척 가장해 율리아와 가까워진 남자가 율리아가 없는 틈을 노려 집안의 보석을 훔쳐가려 했을 때 시시는 그 남자에게 달려들어 할퀴고 물고 하여 남자를 쫓아내기도 했다. 그것도 임신한 몸으로 말이다. 또한 율리아가 시시를 위해 출산침대를 만들다가 망치에 맞아 다리를 접질렸을 때도 시시와 슈테판이 그녀를 간호했다.

 

"만일 율리아가 의사가 되는 대신 외교관이 되었더라면 우리는 매일 세계대전을 치뤘어야 했을 것이다. 바보 율리아는 미모사처럼 우아를 떨고, 끔찍하게 거드름을 피우는 데다 문제는 수다의 욕구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p.246)

 

시시와 율리아의 좌충우돌 동거기(同居記)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은 똑똑하고 우아하며 사랑스러운 시암 고양이 시시의 관점에서 전개되지만 인간과 고양이의 교감이 마치 인간 대 인간의 우정처럼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내가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작가의 이름에서 독자가 받는 인상은 무척이나 차갑고 거친 느낌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까칠한 고양이 시시의 독설과 그 매력에 푹 빠져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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