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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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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억해야 할 많은 것들이 당신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지 않았던가요? 시간의 점멸과 함께 말이지요. 그런 대부분의 인생을 두고 '덧없다' 평하는 것도 아주 일리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세월의 이편에 서서 세월의 저편에 속한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마치 당신과 함께 몇 번 다녀온 기억이 있는 어느 음식점을 우연히 다시 찾았던 어느 날, 종이에 휘갈겨 쓴 폐업 문구와 낡은 문짝에 덩그러니 매달린 녹이 슨 자물쇠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것은 분명 우리의 안타까운 시선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던 일이지요. 그렇다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주인을 향해 우리의 추억을 돌려달라거나 부당함을 항변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이 휩쓸고간 몇몇 기억들에 대해 더러 억울한 생각은 들겠지만 누구에게도 반환을 요구할 수 없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혼쭐이 난 아이처럼 시무룩한 하루가 또 저물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풍경처럼 붙박인 자동차 소음과 간혹 낯설게 파고드는 이웃집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간의 경과는 아랑곳없이 우리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얼마쯤 세월이 흐른 뒤에 아주 조금 남아 있는 미약한 기억에 의지하여 지금의 나를 재구성하는 일은 타인의 삶을 소설로 옮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여름날 쉽게 상하는 음식처럼 박제되지 않은 상온의 시간에서 제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폴 오스터의 <내면 보고서>는 그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십대 후반의 나이에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더듬는다는 건 작가가 보았거나 기억 속에 응집된 어떤 장면을 소설처럼 풀어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말이지요. 하여, 이 책을 쓰는 작가는 '당신'이라는 이인칭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작가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타인처럼 낯설거나 완전한 타인으로 기억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였나? 어떻게 당신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 당신이 생각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생각은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갔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파고들어 가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헤집어 보고 파편들을 들어 올려 빛에 비춰 보기로 하자. 그렇게 해보자. 한번 해보는 거다." (p.11)

 

책은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면 보고서'라는 소제목의 1부는 작가의 유년기부터 열두 살 이전까지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밀려난 듯한 그 기억들은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기억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육십대 후반의 작가에게는 세월의 간극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기억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한동안 머무르는 걸 좋아하게 됩니다. 여섯 살의 어느 행복했던 토요일이나 구체적인 사건도 없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풍경이나 사람들. 우리의 기억이란 때때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안온한 도피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 시절을 기록하는 작가도 아마 그러했겠지요.

 

"그러나 트로피가 부서진 밤으로부터 꼭 26년 후에 스무 번째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을 때, 캐런이 서른여덟 살의 젊은 미망인이 되어 그곳에 있었다. 당신은 다시 그녀와 춤을 추었다. 이번에는 느린 춤이었다. 그녀는 당신들이 열두 살이었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고, 마치 어젯밤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p.109)

 

2부는 '머리에 떨어진 두 번의 타격'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1957년 작가가 열 살 때 보았던 영화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The incredible shrinking man)> (1957년 4월 개봉, 상영 시간 81분, 잭 아널드 감독, 리처드 매시선 원작, 그랜트 윌리 주연)와 1961년 열네 살 때 보았던 영화 <나는 탈옥수(I am a fugitive from a chain gang) (1932년 11월 개봉, 상연 시간 93분, 머빈 리로이 감독, 폴 무니 주연)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십대 시절에 보았던 두 편의 영화가 작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타임캡슐'이라는 소제목의 제3부는 작가의 첫 번째 아내였던 리디아에게 보냈던 작가의 편지들이 실려있습니다. 편지는 주로 1966년 여름부터 1970년대 말에 쓰인 것들이고, 작가의 나이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이던 1967년과 1968년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직 작가가 되지 않았던 풋내기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폴 오스터는 시나리오나 시, 소설을 마구잡이로 쓰면서 창작열에 불타올랐던, 조금은 우쭐하거나 오만했던 자신만만한 젊은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앨범'이라는 소제목의 제4부는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사진이나 이미지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일기를 쓸 때의 문제는 당신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인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향해서라면 너무 이상하고 당혹스러워 보였다. 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굳이 수고스럽게 자신에게 들려준단 말인가. 왜 벌써 경험한 것을 다시 되새기는가 말이다.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이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일기 쓰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그 당시에 너무 어려서 나중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될지 몰랐다. 현재에만 갇혀 있어서 당신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가 실은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일기장을 내려놓았고, 그 후로 47년 동안 조금씩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p.193)

 

늘 그렇듯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또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잘 간추려 책의 내용과 어울리도록 문장을 만들고 나열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우리의 기억이 두서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웃자란 생각들이 이리 건들 저리 건들 방향도 없이 흔들리고 먼 기억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지요? 폴 오스터는 자신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세한 자료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면 보고서>를 읽는다는 건 '폴 오스터 도서관'을 견학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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