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방황은 언제나 왜? 라는 물음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방황의 시발점이자 샘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내 행위의 결과를 언제나 낙관적으로 바라보았고, 그 시기의 나는 왜?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는 건 결과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거나 중도에서 포기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왜? 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젊은 시절에 내가 외면했던 왜? 라는 질문과는 성격이 다소 다른, 삶의 효율성보다는 행위의 정당성을 묻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요즘 이유를 묻는다는 건 행위 전반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완벽하게 정당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마는 지금 내가 하는 행위의 필요성을 대충 얼버무려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만으로 행위의 정당성이 담보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따금 되새기곤 한다.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내 삶에 하등 비겁하지 않다면 그것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매번 다짐하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이 오후 내내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수학 학원의 보충수업을 다녀온 후로는 계속 그랬던 듯하다. 당장 내일 모레가 기말고사인데... 보다 못한 아내가 내게 하소연을 했다.아내의 한숨 소리에 문득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던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한낮에 빨랫줄 가득 걸린 햇살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광목 이불 홑청 사이를 가르며 깔깔거리고 뛰놀던 그 시절.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던 기억보다는 이불 홑청 사이에서 맡아지던 쌉싸름한 햇살 내음이 더 오래 기억되는 걸 보면 그만한 나이에는 어영부영의 시간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해 곧추 세운 바지랑대와 날아갈 듯 펄럭이던 이불 홑청의 조화로운 풍경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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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습니다 - 연꽃 빌라 이야기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2
무레 요코 지음, 김영주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흐르는 시간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멍 때리기' 대회에 출전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건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 의지에 달렸다고 보아야겠지만 잠깐이라도 그저 멍하니 앉아 보낸 후에는 언제나 대상도 없는 누군가에게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나도 모르게 드는 그런 강박은 마치 씹다 버린 껌딱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들었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내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며 나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어제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이 다 되도록 양을 세어야 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그러다 어디까지 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세는 일을 몇 번인가 반복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고 그토록 무겁던 눈꺼풀은 오늘따라 팔랑팔랑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뒤척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낮에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끝내 나는 무레 요코의 소설 <일하지 않습니다>를 다 읽은 후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교코는 이 연꽃 빌라에서 살고부터 자신은 만년(晩年)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는 아직 한참 더 일을 해야 할 나이이지만, 이제까지와 같은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금을 헐어서 생활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왠지 찜찜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고 무직 생활에 흠뻑 빠져 있다. 무직이긴 해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고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성금은 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자원봉사를 하러 가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p.26)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교코는 마흔여덟 살의 자발적 실업자이다. 한때는 유명 광고회사에서 바쁘게 살았지만 엄마의 잔소리와 거짓이 가득한 직장에 염증을 느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낡은 목조 건물의 다 쓰러져가는 연꽃 빌라로 이사했다. 그녀는 지금 직장을 다닐 때 모아두었던 저금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그녀의 저금은 그녀를 지탱하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한 달에 10만 엔으로 꾸려가는 빡빡한 살림이지만 그녀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낸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 외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다.

 

"교코가 회사를 다닐 때는 집에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곧장 텔레비전을 켜거나 음악을 틀었다. 그것이 습관이 됐다. 항상 자극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왠지 허전했다. 그러다가 친구와 태국 여행을 갔을 때, 밤에 바닷가 호텔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것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평소 자신이었다면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기도 했고, 감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업무가 시작되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텔레비전과 음악 없이는 지낼 수 없는 날들로 되돌아갔다." (p.169~p.170)

 

교코가 세들어 있는 연꽃 빌라에는 연령대가 다른 네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교코보다 나이가 많은 구마가이 씨와 여행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고나쓰 씨가 있고, 유일한 남자였던 사이토 군이 나간 방에 키가 껑충하게 크고 젊은 지유키 씨가 새로이 세를 들어 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아파트는 세를 주고 자신은 낡은 빌라에 세를 얻은 당찬 아가씨는 호기심도 많고 밝은 성격이어서 교코와도 곧잘 어울리곤 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가 언제 어느 때 없어져 버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어서 마음이 편했다. 교코는 인생에 대해 홀가분해지고자 회사를 그만둘 결심도 재취직을 하지 않을 결심도 했던 거라서, 이것저것 걱정이 된다면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일을 하면 된다.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해진 교코는 2층 창문으로 보이는 옆집 정원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고민에 빠지는 것은 관두고 싶어졌다." (p.194)

 

<카모메 식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레 요코는 소설을 마치 에세이처럼 쓰고 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장소에서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을 담담하게 쓰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삶이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레 요코는 자신의 소설 속에 교코를 등장시켜 놓은 듯하다. 자발적 실업자인 교코를 보면서 독자들은 '아,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다 읽었던 오늘 새벽, 소설의 결말이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의 일상을 그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에 안심하여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평일과 다름없이 아침 운동을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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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더운데 이 글을 읽는 많은 분(혹시 그렇게 되지나 않을까 싶어서)들을 더 덥게 만드는 건 아닌지 심히 저어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튼 칼을 뽑았으니 썩은 무라도 잘라야겠기에...

 

책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지도 꽤나 오래되었고 나름 일상과 독서 리뷰를 위주로 글을 써왔으면서도 책을 주제로 포스팅을 올렸던 적은 아마 드물지(제 기억이 맞다면 단 한 번도 없지 싶은데) 않나 싶어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특별히 한 분야에 필이 꽂히는 성격도 아니고, 주제를 정하여 한 분야의 책을 진득하게 공부하는 스똬일도 아닌지라 저의 독서는 일정한 체계도 없고 리뷰라고 올리는 글도 중구난방의 잡문이 전부였던지라 그동안 제가 읽어 왔던 책이 이러이러합네 자랑할 만한 지식이 숫제 없었던 겁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책에 관한 포스팅을 번듯하게 올려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번번이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지요.

 

각설하고, 최근에 저는 최수영의 소설 <하여가>를 읽다가 문득 우리나라의 참신한 작가(소설가)들은 왜 반짝 유명세를 타다가 금세 흐지부지 묻혀버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제가 한국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 소설가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은 전부터 들었던 궁금증이기도 했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추측컨대 우리나라의 열악한 독서환경도 그 중 하나이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듯싶어서 이 글을 써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 소설가 중 신인 시절의 작품이 '참신하다'고 느꼈던 작가를 꼽으라면 박민규, 천명관, 김연수 등이 있었고 최근에 알게 된 최수영 작가도 문체의 참신성에서는 그들에 못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문체와 소재만 놓고 본다면 박민규 작가가 단연 으뜸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참신성을 무기로 한국 문단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가? 하는 문제와 그 인기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개 독자의 입장에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를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처음에는 "와, 이런 소설도 있구나!' 감탄하며 읽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문체의 소설집 <더블>을 이어서 읽는다면 새롭다는 느낌은 단숨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작가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독자가 느끼는 '참신성' 또는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단 한 번의 실행으로 충족된다는 것입니다. 간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작가가가 매번 다른 문체의 작품을 발표한다는 건 현실적으로도 어려울뿐더러 그닥 좋은 방법도 아닙니다. 작가의 개성은 하나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니 말이지요. 이러한 고민 때문인지 대부분의 작가들은 두 번째 작품부터 데뷔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존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문체로 되돌아갑니다. 자신의 개성을 버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면에는 작가가 데뷔작에서 보여주었던 참신성이나 독창성을 계속해서 이어갈 자신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작가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타개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만 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여주었던 참신성을,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작가는 그의 최신작에서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하루키만의 개성이 돋보이지요. 그렇다면 하루키 자신이 독자들로부터 식상하다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의 작품 <노르웨이의 숲>이 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실의 시대>로 출간된 이 소설은 작가의 개성을 어느 정도 숨긴 채, 기존 작가의 보편적인 문체와 스토리 전개 방식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작가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대박을 쳤던 건 사실이지요. 그 이후 작가는 자신의 개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생겼던 듯합니다. 박민규 작가도 예외는 아니지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어느 정도 인기를 끌지 못했더라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그저 그런 작가가 되고 말았겠지요. 자신의 개성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보편적 문체의 리얼리즘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키나 박민규 작가처럼 말이지요.

 

흠, 쓰고 보니 별것도 아닌 얘기를 장황하게도 늘어 놓았네요. 날씨도 더운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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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걸
메리 쿠비카 지음, 김효정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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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애주기별로 좋든 싫든 반복하여 듣게 되는 말들이 있다.예컨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유아기에는 '잘하네', '잘하는구나' 등 칭찬의 말을,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학창시절에는 '최선을 다해라' 또는 '공부 열심히 해라'와 같은 말을,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은 했니?' '여자친구(또는 남자친구)는 있어?'와 같은 질문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결혼을 하여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아닌 아이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나이가 드는 것일 테지만 어느 순간 '건강은 괜찮으시죠?'라거나 '건강하세요'와 같은 인사말을 듣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 아닌 오롯이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에 대한 질문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좋든 싫든 말이다.

 

인생의 황혼기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지나온 생애를 뒤돌아보면서 자신에 대한 질문지를 스스로 만드는 시기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메리 쿠비카의 <굿걸>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상념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범죄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인물의 심리묘사나 감정선이 잘 살아 있는, 말하자면문학적 향기가 진한 작품이다. 장대한 스케일에 빠른 이야기 전개가 특징인 리 차일드의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이기도 하지만.

 

소설은 납치되었던 미아가 집으로 돌아온 날을 기점으로 '그 날 이전'과 '그 날 이후'로 구분하여 전개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명문가의 후손이면서 치안판사이기도 한 미아의 아버지 제임스 데닛, 시골 출신의 매력적인 여인이면서 실내 인테리어를 전공한 미아의 엄마 이브 데닛, 미아의 납치 사건을 전담하는 게이브 호프먼 형사, 미아를 납치했던 범인 콜린 대처, 미아의 하나뿐인 언니 그레이스, 미아의 직장 동료인 아이애나가 이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인물의 전부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게다가 소설의 전개를 맡은 인물은 더욱 줄어들어 이브 데닛과 게이브 호프먼, 콜린 대처 등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그 날 이전과 그 날 이후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문가의 후손이자 영향력 있는 치안판사인 제임스는 강한 경쟁심을 가진,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인물이다. 똑똑하고 순종적인 큰딸 그레이스와 달리 둘째딸 미아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혔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결국 독립한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몸값을 노리고 납치 지시를 내렸던 달마의 말에 따라 콜린 대처는 미아를 납치한다. 콜린 대처는 미아를 넘겨주는 즉시 오천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콜린 대처는 그 돈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돌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미아를 달마에게 넘기는 순간 그의 부하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은 물론 결국에는 살해되어 버려지고 말 거라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마음을 바꾼다. 콜린 대처는 그의 어머니 캐스린 대처와 여섯 살 난 자신을 버려둔 채 떠났던 자신의 아버지가 소유한 미네소타의 작은 통나무집으로 미아를 데려간다. 민가가 없는 거대한 숲 한가운데 위치한 그 오두막은 겨울이면 사람의 발길이 완전히 끊기는 외진 곳이었다.

 

한편 영향력 있는 치안판사의 딸의 납치 사건을 맡게 된 게이브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브 데닛을 자주 만나면서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되고 여전히 매력적인 그녀에게 마음이 끌린다.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미아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제임스와 그런 이유로 더욱 마음을 닫아버리는 미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이브는 미아가 납치된 이후 미아와 함께 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한다. 그리고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자책한다. 그럴수록 자신의 체면만 중시하는 제임스의 행동이 원망스러워졌다.

 

"지금은 모욕적이고 야속한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지만 과거의 그는 달콤한 말을 하는 데 선수였다. 우리 인생에도 서로에게 완전히 반해 있던 황홀한 시절, 서로 잠시도 떨어질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결혼한 그 남자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p.141)

 

모르는 남자에게 납치된 미아는 자신을 납치한 콜린 대처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듣고 이해하게 된다. 달마에게 자신을 넘기고 약속한 돈을 받았더라면 일이 그렇게까지 대책없이 흐르지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미아는 콜린 대처와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다. 그들 둘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서로에게 들려주기도 하면서 평범한 연인들처럼 상대방의 취향이나 성격을 알아갔다.

 

"하지만 미아가 자라면서 얼마나 외로웠을지도 짐작이 갔다. 생판 모르는 죽은 애를 동경할 정도였다니. 우리 엄마와 나 사이라고 그리 특별할 건 없었지만 적어도 우린 외롭지는 않았다." (p.372)

 

각자의 눈에 비친 그 날 이후의 미아는 오두막에서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미아가 아닌 클로이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정신과 상담을 하는 등 기억을 되찾을 만한 여러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그녀의 기억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게이브가 오두막에서 찾아낸 고양이 카누로 인해 옅은 기억의 실마리가 되살아나고...

 

책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조망된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던 그들이 하나의 사건에 의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작가에 의해 교묘하게 짜맞추어진 결과이지만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어쩌면 그런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서는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각자의 처지와 외로움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서로를 가리는 장막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각자의 서로에 대한 무관심은 세상의 어떤 시선도 차단할 수 있는 수천 겹의 장막보다 더 큰 어둠을 낳았으리라.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미아 데닛의 시점으로 쓰여 있다. 주인공이면서도 단 하나의 챕터만 할애함으로써 작가는 주인공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쓴 영리한 신인 작가는 마지막 단 하나의 챕터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모든 비밀을 한꺼번에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4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봐야 하는 숙제를 떠넘긴다. 비밀은 그것일지 모른다. 생애주기별로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는 대신에 의미도 없는 말을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오해가 쌓이고 쌓여 커다란 불행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네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만 의미도 없이 되내며 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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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시작된 비는 그치지 않고 여전히 내립니다. 비다운 비를 만난 게 얼마만인지요.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까닭에 나는 그저 반가웠습니다. 동심원으로 퍼지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에 나는 마치 좋아하는 음악에 홀린 듯 그렇게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박자를 맞추듯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와 작은 물웅덩이의 수면에 미끄러지듯 번지는 동심원을 음악을 듣는 듯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날에는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도, 잠시 마음을 사로잡는 책도 굳이 필요치 않을 듯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영국의 EU 탈퇴냐, 잔류냐를 두고 갑론을박 시끄럽습니다. 세계화라는 게 그런 것이지요. 거리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까운 것 하나 없는 먼나라의 문제이지만 마치 우리일처럼 걱정하게 되니 말입니다. 간밤에는 잔류를 예측했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바꿔서 탈퇴쪽으로 기울고 있나 봅니다. 그 바람에 주가는 꼭지가 열린 풍선처럼 허무하게 꺼져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는 게 도박이라구요.

 

어제는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 이모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이 환경문제와 관련한 한 워크숍에서 "나는 친일파의 후손이다. 천황폐하 만세" 등을 외쳤다고 해서 종일 뜨거웠지요. 나도 KEI 사이트에 접속해 보았더랬습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선조가 친일을 한 덕분에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의 할애비든 애비든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저는 이따금 가난에 찌들어 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 중 어느 한 사람이 꾀죄죄한 차림으로 TV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선조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라치면 그게 진심일까? 하는 의심이 들곤 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렇게 외친 게 잘못이 아니라 친일파의 후손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의 녹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땅히 그는 일본으로 망명을 하거나 일본을 위해서 충성했어야 하지요. 게다가 그런 자를 대한민국 정부의 공무원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인사권자의 크나큰 잘못이라고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아마도 그는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을 보면서 마침내 대한민국에서도 친일파의 세상이 도래했구나 생각하여 심적으로 크게 고무되었던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정부 예산이 모두 삭감된 것을 본 그로서는 대한민국 정부도 이제 자신의 편이라고 여겼겠지요.

 

여전히 비가 내립니다. 나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에 홀린 듯 빠져 있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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