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더운데 이 글을 읽는 많은 분(혹시 그렇게 되지나 않을까 싶어서)들을 더 덥게 만드는 건 아닌지 심히 저어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튼 칼을 뽑았으니 썩은 무라도 잘라야겠기에...

 

책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지도 꽤나 오래되었고 나름 일상과 독서 리뷰를 위주로 글을 써왔으면서도 책을 주제로 포스팅을 올렸던 적은 아마 드물지(제 기억이 맞다면 단 한 번도 없지 싶은데) 않나 싶어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특별히 한 분야에 필이 꽂히는 성격도 아니고, 주제를 정하여 한 분야의 책을 진득하게 공부하는 스똬일도 아닌지라 저의 독서는 일정한 체계도 없고 리뷰라고 올리는 글도 중구난방의 잡문이 전부였던지라 그동안 제가 읽어 왔던 책이 이러이러합네 자랑할 만한 지식이 숫제 없었던 겁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책에 관한 포스팅을 번듯하게 올려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번번이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지요.

 

각설하고, 최근에 저는 최수영의 소설 <하여가>를 읽다가 문득 우리나라의 참신한 작가(소설가)들은 왜 반짝 유명세를 타다가 금세 흐지부지 묻혀버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제가 한국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 소설가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은 전부터 들었던 궁금증이기도 했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추측컨대 우리나라의 열악한 독서환경도 그 중 하나이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듯싶어서 이 글을 써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 소설가 중 신인 시절의 작품이 '참신하다'고 느꼈던 작가를 꼽으라면 박민규, 천명관, 김연수 등이 있었고 최근에 알게 된 최수영 작가도 문체의 참신성에서는 그들에 못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문체와 소재만 놓고 본다면 박민규 작가가 단연 으뜸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참신성을 무기로 한국 문단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가? 하는 문제와 그 인기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개 독자의 입장에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를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처음에는 "와, 이런 소설도 있구나!' 감탄하며 읽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문체의 소설집 <더블>을 이어서 읽는다면 새롭다는 느낌은 단숨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작가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독자가 느끼는 '참신성' 또는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단 한 번의 실행으로 충족된다는 것입니다. 간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작가가가 매번 다른 문체의 작품을 발표한다는 건 현실적으로도 어려울뿐더러 그닥 좋은 방법도 아닙니다. 작가의 개성은 하나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니 말이지요. 이러한 고민 때문인지 대부분의 작가들은 두 번째 작품부터 데뷔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존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문체로 되돌아갑니다. 자신의 개성을 버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면에는 작가가 데뷔작에서 보여주었던 참신성이나 독창성을 계속해서 이어갈 자신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작가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타개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만 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여주었던 참신성을,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작가는 그의 최신작에서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하루키만의 개성이 돋보이지요. 그렇다면 하루키 자신이 독자들로부터 식상하다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의 작품 <노르웨이의 숲>이 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실의 시대>로 출간된 이 소설은 작가의 개성을 어느 정도 숨긴 채, 기존 작가의 보편적인 문체와 스토리 전개 방식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작가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대박을 쳤던 건 사실이지요. 그 이후 작가는 자신의 개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생겼던 듯합니다. 박민규 작가도 예외는 아니지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어느 정도 인기를 끌지 못했더라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그저 그런 작가가 되고 말았겠지요. 자신의 개성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보편적 문체의 리얼리즘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키나 박민규 작가처럼 말이지요.

 

흠, 쓰고 보니 별것도 아닌 얘기를 장황하게도 늘어 놓았네요. 날씨도 더운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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