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방황은 언제나 왜? 라는 물음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방황의 시발점이자 샘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내 행위의 결과를 언제나 낙관적으로 바라보았고, 그 시기의 나는 왜?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는 건 결과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거나 중도에서 포기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왜? 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젊은 시절에 내가 외면했던 왜? 라는 질문과는 성격이 다소 다른, 삶의 효율성보다는 행위의 정당성을 묻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요즘 이유를 묻는다는 건 행위 전반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완벽하게 정당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마는 지금 내가 하는 행위의 필요성을 대충 얼버무려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만으로 행위의 정당성이 담보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따금 되새기곤 한다.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내 삶에 하등 비겁하지 않다면 그것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매번 다짐하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이 오후 내내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수학 학원의 보충수업을 다녀온 후로는 계속 그랬던 듯하다. 당장 내일 모레가 기말고사인데... 보다 못한 아내가 내게 하소연을 했다.아내의 한숨 소리에 문득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던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한낮에 빨랫줄 가득 걸린 햇살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광목 이불 홑청 사이를 가르며 깔깔거리고 뛰놀던 그 시절.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던 기억보다는 이불 홑청 사이에서 맡아지던 쌉싸름한 햇살 내음이 더 오래 기억되는 걸 보면 그만한 나이에는 어영부영의 시간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해 곧추 세운 바지랑대와 날아갈 듯 펄럭이던 이불 홑청의 조화로운 풍경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