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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습니다 - 연꽃 빌라 이야기 ㅣ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2
무레 요코 지음, 김영주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흐르는 시간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멍 때리기' 대회에 출전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건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 의지에 달렸다고 보아야겠지만 잠깐이라도 그저 멍하니 앉아 보낸 후에는 언제나 대상도 없는
누군가에게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나도 모르게 드는 그런 강박은 마치 씹다 버린 껌딱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들었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내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며 나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어제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이 다 되도록 양을 세어야 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그러다 어디까지 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세는 일을 몇 번인가 반복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고 그토록 무겁던 눈꺼풀은 오늘따라 팔랑팔랑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뒤척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낮에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끝내 나는 무레 요코의 소설 <일하지 않습니다>를 다 읽은 후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교코는 이 연꽃 빌라에서 살고부터 자신은 만년(晩年)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는 아직 한참
더 일을 해야 할 나이이지만, 이제까지와 같은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금을 헐어서
생활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왠지 찜찜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고 무직 생활에 흠뻑 빠져 있다. 무직이긴 해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고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성금은 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자원봉사를 하러 가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p.26)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교코는 마흔여덟 살의 자발적 실업자이다. 한때는 유명 광고회사에서 바쁘게 살았지만 엄마의 잔소리와 거짓이
가득한 직장에 염증을 느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낡은 목조 건물의 다 쓰러져가는 연꽃 빌라로 이사했다. 그녀는 지금 직장을 다닐 때 모아두었던
저금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그녀의 저금은 그녀를 지탱하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한 달에 10만 엔으로 꾸려가는 빡빡한 살림이지만 그녀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낸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 외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다.
"교코가 회사를 다닐 때는 집에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곧장 텔레비전을 켜거나 음악을 틀었다.
그것이 습관이 됐다. 항상 자극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왠지 허전했다. 그러다가 친구와 태국 여행을 갔을 때, 밤에 바닷가 호텔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것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평소 자신이었다면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기도 했고, 감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업무가 시작되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텔레비전과 음악 없이는 지낼 수 없는 날들로 되돌아갔다."
(p.169~p.170)
교코가 세들어 있는 연꽃 빌라에는 연령대가 다른 네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교코보다 나이가 많은 구마가이 씨와 여행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고나쓰 씨가 있고, 유일한 남자였던 사이토 군이 나간 방에 키가 껑충하게 크고 젊은 지유키 씨가 새로이 세를 들어 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아파트는 세를 주고 자신은 낡은 빌라에 세를 얻은 당찬 아가씨는 호기심도 많고 밝은 성격이어서 교코와도 곧잘 어울리곤 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가 언제 어느 때 없어져 버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어서 마음이 편했다. 교코는 인생에 대해 홀가분해지고자 회사를 그만둘 결심도 재취직을 하지 않을 결심도 했던 거라서, 이것저것 걱정이 된다면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일을 하면 된다.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해진 교코는 2층 창문으로 보이는 옆집 정원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고민에 빠지는 것은 관두고 싶어졌다." (p.194)
<카모메 식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레 요코는 소설을 마치 에세이처럼 쓰고 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장소에서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을 담담하게 쓰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삶이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레 요코는 자신의 소설 속에 교코를 등장시켜 놓은 듯하다. 자발적 실업자인 교코를 보면서 독자들은 '아,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다 읽었던 오늘 새벽, 소설의 결말이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의 일상을 그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에 안심하여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평일과 다름없이 아침 운동을 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