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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걸
메리 쿠비카 지음, 김효정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생애주기별로 좋든 싫든 반복하여 듣게 되는 말들이 있다.예컨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유아기에는 '잘하네', '잘하는구나' 등 칭찬의 말을,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학창시절에는 '최선을 다해라' 또는 '공부 열심히 해라'와 같은 말을,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은 했니?' '여자친구(또는 남자친구)는 있어?'와 같은 질문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결혼을 하여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아닌 아이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나이가 드는 것일 테지만 어느 순간 '건강은 괜찮으시죠?'라거나 '건강하세요'와 같은 인사말을 듣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 아닌 오롯이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에 대한 질문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좋든 싫든 말이다.
인생의 황혼기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지나온 생애를 뒤돌아보면서 자신에 대한 질문지를 스스로 만드는 시기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메리 쿠비카의 <굿걸>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상념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범죄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인물의 심리묘사나 감정선이 잘 살아 있는, 말하자면문학적 향기가 진한 작품이다. 장대한 스케일에 빠른 이야기 전개가 특징인 리 차일드의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이기도 하지만.
소설은 납치되었던 미아가 집으로 돌아온 날을 기점으로 '그 날 이전'과 '그 날 이후'로 구분하여 전개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명문가의 후손이면서 치안판사이기도 한 미아의 아버지 제임스 데닛, 시골 출신의 매력적인 여인이면서 실내 인테리어를 전공한 미아의 엄마 이브 데닛, 미아의 납치 사건을 전담하는 게이브 호프먼 형사, 미아를 납치했던 범인 콜린 대처, 미아의 하나뿐인 언니 그레이스, 미아의 직장 동료인 아이애나가 이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인물의 전부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게다가 소설의 전개를 맡은 인물은 더욱 줄어들어 이브 데닛과 게이브 호프먼, 콜린 대처 등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그 날 이전과 그 날 이후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문가의 후손이자 영향력 있는 치안판사인 제임스는 강한 경쟁심을 가진,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인물이다. 똑똑하고 순종적인 큰딸 그레이스와 달리 둘째딸 미아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혔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결국 독립한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몸값을 노리고 납치 지시를 내렸던 달마의 말에 따라 콜린 대처는 미아를 납치한다. 콜린 대처는 미아를 넘겨주는 즉시 오천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콜린 대처는 그 돈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돌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미아를 달마에게 넘기는 순간 그의 부하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은 물론 결국에는 살해되어 버려지고 말 거라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마음을 바꾼다. 콜린 대처는 그의 어머니 캐스린 대처와 여섯 살 난 자신을 버려둔 채 떠났던 자신의 아버지가 소유한 미네소타의 작은 통나무집으로 미아를 데려간다. 민가가 없는 거대한 숲 한가운데 위치한 그 오두막은 겨울이면 사람의 발길이 완전히 끊기는 외진 곳이었다.
한편 영향력 있는 치안판사의 딸의 납치 사건을 맡게 된 게이브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브 데닛을 자주 만나면서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되고 여전히 매력적인 그녀에게 마음이 끌린다.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미아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제임스와 그런 이유로 더욱 마음을 닫아버리는 미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이브는 미아가 납치된 이후 미아와 함께 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한다. 그리고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자책한다. 그럴수록 자신의 체면만 중시하는 제임스의 행동이 원망스러워졌다.
"지금은 모욕적이고 야속한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지만 과거의 그는 달콤한 말을 하는 데 선수였다. 우리 인생에도 서로에게 완전히 반해 있던 황홀한 시절, 서로 잠시도 떨어질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결혼한 그 남자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p.141)
모르는 남자에게 납치된 미아는 자신을 납치한 콜린 대처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듣고 이해하게 된다. 달마에게 자신을 넘기고 약속한 돈을 받았더라면 일이 그렇게까지 대책없이 흐르지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미아는 콜린 대처와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다. 그들 둘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서로에게 들려주기도 하면서 평범한 연인들처럼 상대방의 취향이나 성격을 알아갔다.
"하지만 미아가 자라면서 얼마나 외로웠을지도 짐작이 갔다. 생판 모르는 죽은 애를 동경할 정도였다니. 우리 엄마와 나 사이라고 그리 특별할 건 없었지만 적어도 우린 외롭지는 않았다." (p.372)
각자의 눈에 비친 그 날 이후의 미아는 오두막에서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미아가 아닌 클로이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정신과 상담을 하는 등 기억을 되찾을 만한 여러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그녀의 기억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게이브가 오두막에서 찾아낸 고양이 카누로 인해 옅은 기억의 실마리가 되살아나고...
책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조망된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던 그들이 하나의 사건에 의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작가에 의해 교묘하게 짜맞추어진 결과이지만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어쩌면 그런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서는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각자의 처지와 외로움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서로를 가리는 장막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각자의 서로에 대한 무관심은 세상의 어떤 시선도 차단할 수 있는 수천 겹의 장막보다 더 큰 어둠을 낳았으리라.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미아 데닛의 시점으로 쓰여 있다. 주인공이면서도 단 하나의 챕터만 할애함으로써 작가는 주인공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쓴 영리한 신인 작가는 마지막 단 하나의 챕터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모든 비밀을 한꺼번에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4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봐야 하는 숙제를 떠넘긴다. 비밀은 그것일지 모른다. 생애주기별로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는 대신에 의미도 없는 말을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오해가 쌓이고 쌓여 커다란 불행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네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만 의미도 없이 되내며 사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