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고 했던가요? 오늘이 처서이니 내일 아침부터는 모기에 물리지 않고 무사히 아침 산행을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는군요. 올해는 폭염과 가뭄으로 인해 모기의 개체수도 예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는 뉴스 보도를 여러 번 접하기는 했었지만 제가 직접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산길을 걷다 보면 극성스러운 모기떼의 공격을 피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저는 막연히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름내 그토록 극성을 부리던 모기도 처서가 지나고 점차 추위가 찾아 오면 나처럼 매일 아침 산을 찾는 나그네들의 혈관을 뚫고 피를 빨아먹을 만한 기력도 점차 잃게 되겠지요. 어찌 모기만 그렇겠습니까. 온 세상의 뭇 생명들이 다 그러하겠지요. 오죽하면 옛 속담에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고 했겠습니까.

 

어제 모 방송국의 저녁 뉴스에서는 기후 변화와 관련된 미래의 예상을 보도하더군요. 얘기인 즉 지금처럼 지구 온난화가 지속되면 2040년 이후에는 서울의 열대야가 41일 이상, 2070년 이후엔 72일 이상 이어질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었습니다. 10년마다 8일씩 늘어나는 셈이지요. 지금도 죽겠다고 난리인데 생각만으로도 숨이 컥컥 막혀오지요? 그렇게 되면 일 년의 절반이 여름이 될 거라더군요.

 

저는 이따금 내 머릿속에 골수처럼 박힌 생각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그 중에는 '만물의 영장은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출처도 알 수 없는 지식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꼭 필요한 지식이 한 귀퉁이로 쫓겨난 것도 보게 됩니다. 때로는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일지는 몰라도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인 듯 들립니다. 인간은 힘으로는 사자나 호랑이 등에 미칠 바가 아니고, 그렇다고 계절에 맞추어 겨울잠을 잘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식물처럼 제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걸 빼면 도무지 내세울 게 없는 동물이지요. 어쩌면 인간은 자연 속에서 아주 작디 작은 미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 사람'이라는 오만한 발상으로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욕심에 이르게 된 지금, 자연을 경외하는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마트에 나가 보니 폭염으로 채소와 과일값이 껑충 뛰었더군요. 폭염 피해는 수산물도 예외가 아닌 모양입니다. 양식을 하는 전복, 우럭, 넙치 등이 가두리 양식장의 수온이 높아지면서 대부분 폐사했다더군요. 이런 환경에서 인간인들 성할 리 없겠지요. 더위도 물러간다는 처서, 밤의 더위는 한결 누그러진 듯하지만 낮의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웃돌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푸념이 오늘도 이어집니다. 우리가 자연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한 인간은 고통을 통하여 그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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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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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코 처음 읽는 책인데 왠지 모르게 여러모로 기시감이 느껴지는 소설이 있다. 그 이유를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 <사과는 잘해요>도 그랬다. 문체와 구성은 확연히 다르지만 소설의 분위기가 박민규의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했고, 소설의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대행한다는 점에서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떠올리게도 했다.

 

소설에 나오는 시봉과 '나'(진만)의 이야기는 이랬다. 아버지에 의해 시설에 맞겨진 '나'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부모님을 동시에 잃고 그때의 충격으로 차만 타면 바지에 대변을 보는 바람에 시설에 맞겨진 시봉은 그곳을 관리하는 2명의 복지사들로부터 수시로 폭행을 당하거나 원장에게 끌려가 성추행을 당하기도 한다. 아침 저녁으로 꼬박꼬박 네 알의 알약을 먹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양말을 포장하거나 비누에 사진을 붙이는 일을 하면서 보냈다. 상습적인 폭력에 길들여진 시봉과 '나'는 폭력에 앞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고 묻는 복지사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만들거나 하지도 않은 죄를 미리 고백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매를 줄이기 위해 짓지도 않은 죄의 고백과 사과가 필요했던 것이다. 폭력은 그렇게 일상화되고 그들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우리는 꼭 고백한 대로만, 꼭 그만큼의 죄만 지었다. 그래야 마음이 놓였고, 잠도 잘 왔다. 깜빡 잊고 그날 치의 죄를 짓지 않고 잠자리에 누운 날엔, 다시 방문을 두들겨 복지사들을 깨우기도 했다. 복지사들은 대개 방문을 열자마자 우리에게 발길질부터 해댔지만, 그래도 시봉과 나는 참고 끝까지 죄를 지었다." (p.30)

 

시설에 원생들이 늘어나자 복지사들은 원생들의 죄를 묻고 사과하는 일을 시봉과 '내'가 대신하도록 한다. 얼떨결에 반장이 된 '나'와 시봉은 원생들의 죄를 묻고 죄에 대해 사과하고 매를 맞기도 한다. 적어도 시설에 구레나룻 아저씨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신은 납치된 채로 강제 입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구레나룻 아저씨는 매일 밤마다 도와달라는 말을 종잇조각에 적어 담장 밖으로 던졌다. 이를 보다 못한 '나'와 시봉은 구레나룻 아저씨를 돕기 시작했고, 그들이 메모를 적기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는 날 경찰과 공무원들, 방송사 기자들이 시설로 들이닥쳤다. 원장과 복지사들, 총무과장과 식당 아줌마까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시설은 폐쇄되었다.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시봉과 함께 시봉의 동생 시연이 사는 임대아파트로 가게 된다. 매춘부로 사는 시연과 그녀의 동거남인 '뿔테 안경' 그리고 '나'와 시봉의 어처구니 없는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경마로 재산을 탕진한 채 특별한 직업도 없이 시연에게 얹혀 살았던 '뿔테 안경'은 '나'와 시봉에게 돈벌이를 종용하지만 정상이 아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시봉과 '나'는 시설에서처럼 '사과 대신하기'에 나선다.

 

'뿔테 안경'은 대신 사과할 의뢰인을 찾는 광고 전단지를 붙이고 그렇게 전단지를 붙인 지 열흘째 되는 날, 젊은 여자한테 눈이 멀어서 부인과 절름발이 아들을 버린 사람이 그들에게 사과를 의뢰하기 위해 찾아온다. 의뢰인의 아내는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김밥집을 하며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의뢰인의 아내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봉과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사과를 대신하며 교도소에 있는 원장을 면회하기도 하고 시설에서 먹던 알약을 구하기 위해 시설을 다시 찾아가기도 한다. 시설에서 알약과 함께 원장의 일기장을 발견하여 집으로 가져온다. 의뢰인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뢰인 아내의 제안을 받고 의뢰인을 찾아갔던 '나'와 시봉은 '뿔테 안경'이 이미 의뢰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죽음으로써 사과할 결심을 한다. 그날 술에 취한 '뿔테 안경'은 김밥집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편 집행유예로 풀려난 복지사들이 시봉과 '나'를 찾아와 시설로 데려간다. 시설에서 죽어나간 두 명의 행적을 알고 있었던 '나'와 시봉이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나'와 시봉을 땅에 묻을 계획이었던 복지사들은 원장의 일기장을 내가 갖고 있음을 알게 되고 일기장을 가져오라며 '나'를 시연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그들로부터 도망친다. 시봉을 버려둔 채. 언젠가 시봉은 자신에게 사과할 일이 생기면 자신을 대신해 '나'에게 사과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자살을 시도하여 병원에 입원한 시연을 들쳐업고 시연의 집을 향해 무작정 걷는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시연은 말없이 내 등에 뺨을 갖다 댔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나는 잠깐 뒤돌아, 병원의 파란색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병원의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엇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p.220)

 

이기호의 소설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소설의 구성이나 스토리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느꼈던 건 그의 문체와 사건 전개의 방식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죽을 죄를 짓고도 사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철면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잘 살고 있는지 작가는 묻고 있는 것이다. 사과할 만큼 큰 죄를 짓는 일이 없었던 시봉과 '나'는 누군가를 향해 언제나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 사과할 일이 너무나 많은 듯한 우리들은 되도록이면 사과를 피하려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작가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병원의 푸른색 십자가로부터, 또는 절대자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무작정 숨기려고만 한다. 어쩌면 범죄 바이러스를 막는 가장 강력한 백신은 사과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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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이웃에 살던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난다. 경상도 사투리를 어찌나 심하게 쓰시던지 때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시쳇말로 인정만큼은 '갑'이었던 분이다. 언젠가 내가 하루 종일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딸꾹 딸꾹' 하면서 돌아다니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시던 할머니는 "머슬 딸가닥 혼자 훔쳐 묵었노?" 하시면서 나를 조용히 불러 식혜 한 사발과 함께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셨다.

 

어제 오후에 폭염을 뚫고 외출을 했던 나는 두어 시간 동안 원치도 않던 딸꾹질에 시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가 '어떤 맛잇는 걸 혼자 훔쳐 먹었느냐?' 물어왔다. 나도 모르게 어릴 적 이웃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무얼 그리 허겁지겁 훔쳐 먹었던 걸까? 점심도 거른 채 서둘러 나섰던 외출. 말매미 울음 소리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거리에는 여름 햇살만 가득했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훔쳐 먹은 게 하나 있긴 하다. 내것이 아니라고 나는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는지도 모른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속담이 무엇 하나 그른 게 없다. 양잿물은 마신 적 없지만 길에 넘쳐나는 오존을 욕심껏 들이켰던 듯하다. 정부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거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생각지 않고 너무 많이 마신 게 아니가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슬몃 들었다. 양심도 없는 짓이었다.

 

오늘도 폭염이 지속되고 있다. 거리에는 뜨거운 햇살이 넘실대고, 오가는 행인들을 위해 쉼없이 오존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찌 고맙지 않으랴! 국민들 배 곯지 말라고, 혹시나 세균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강력한 소독 효과가 있는 오존을 국민들 몰래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현 정부는 자신들의 공을 너무나 많이 감추는 게 아닌가. 우리가 국민들을 위해 이러이러한 일을 했소, 알린다고 해서 누가 뭐랄 것도 아니고 국민들은 오히려 고맙고 황송해 할 텐데 말이다. 겸손함만으로 따진다면 역대 최강의 정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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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말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데, 너무 무능하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만, 그 혜택이 부정적인 것이 그렇습니다만...

꼼쥐 2016-08-21 11:00   좋아요 1 | URL
현 정부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혜택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국민들 배고플까봐 미세먼지도 주고, 불법으로 축재하는 방법을 국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민정수석을 본보기로 보이기도 하고... 정부는 온통 국민들 생각뿐이지요. ㅎ
 
하여가
최수영 지음 / 새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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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필히 불법행위로 간주될 만한 오래된 관습을 적어도 한두 개 이상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내에서 벌어지는 그런 행위나 관습이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데 있다. 예컨대 조직폭력배나 군대 조직에서의 상시적인 폭력이나, 검찰 또는 조직폭력배 내에서의 갑질은 그것이 단지 조직을 유지시키기 위한 상명하복의 엄격한 규율이라고 인식될 뿐 조직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불법적인 행위 또는 직위를 이용한 파렴치한 행위라고는 그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갓 들어온 조직원이 조직내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 고참이 되어 신입 조직원을 대할 때면 그 당시에 있었던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오직 자신이 윗사람으로부터 당했던 것만 떠올리게 된다. 소위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이제 와서 윗사람에게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조직원을 이유도 없이 괴롭힐 수밖에. 결국 그런 행위는 조직의 폐쇄적인 운영이 지속되는 한 약간의 형태와 강도만 바뀔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최수영 작가의 소설 <하여가>는 비슷한 조직 내의 두 인물을 실감나게 그린 작품이다. 군대라는 조직의 김동하와 조직폭력배의 똘마니 이장철. 두 인물은 그들이 속한 조직의 유사성과 함께 인생의 비슷한 행로를 밟게 된다는 설정도 재미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대한 적 앞에서 언제까지고 마냥 무기력하게 끌려갈 수는 없는 법. 그날이 그날 같은 지리멸렬한 삶으로부터 두 청춘이 벌이는 거대한 반란은 우리 세대 청춘들을 대변하는 판타지이자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하게 하는 카타르시스라고 할 만하다.

 

이웃 블로거의 추천으로 우연히 읽게 된 이 소설은 소설의 전체적인 얼개보다도 비속어와 사투리, 유행어를 적절히 섞은 맛깔나는 문장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한다. 다큐멘터리를 번역하고 시나리오와 문화재 스토리텔링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학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작가의 이력에 걸맞게 그의 걸쭉한 입담이 압권인 책이다. '한번 보면 '막장', 다시 보면 '막 짠한'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카피처럼 현실감 있는 이야기 전개와 찰진 대사에 배꼽을 쥐고 웃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그렁그렁 맺히는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분교 대학생이었던 김동하는 돈이 없어 휴학을 하고 주유소 알바에 편의점 알바까지 하루에 두세탕씩 알바를 뛰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삼 년이나 사귄 여자친구가 변심을 하여 떠나고 그는 결국 군에 입대한다. 일병 김동하 밑으로 유준만이라는 꼴통이 들어오고 그때부터 그의 군생활마저 꼬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준만의 행패를 보다 못한 김동하는 그의 후견인인 곽병장과 함께 유준만을 쓰러트리고 탈영하기에 이른다.

 

"인생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이냐 ……. 고개가 숙여졌다. 담 아래 쓰러져 있는 유준만이가 보였다. 저 지독한 애는 죽어도 문제지만 살아도 문제다. 쟤 살아나면 한밤에 나를 세면장이나 소각장으로 불러내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거다. 그냥 죽일 거다. 이래저래 일단은…, 뛰고 보는 수밖에!"    (p.116)

 

한편 팸짱을 하며 여러 가출팸으로부터 상납을 받아 생활했던 이장출은 범단(조폭) 스카우터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고 조폭에 가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조폭 생활을 그만두고 싶다는 친구 무식이를 조직원들이 처벌하는 과정에서 이장출은 그만 하극상을 저지르고 도망친다. 조직원들에게 쫓기던 그는 회장님으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된다. 불륜을 저지른 회장님의 명령을 받고 비열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도중에 그는 군인 김동하를 만난다. 김동하는 헤어진 애인 설희를 만나 담판을 지으러 가는 중이었다. 막다른 골목의 탈영병과 인생 막장으로 치닫는 조폭 똘마니의 만남은 곧 이유도 없는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나야 그렇다 쳐도 대체 이 자식은 왜 이리 죽자 살자 덤벼드는 거냐. 제놈도 나처럼 기절에서 깨어나 뭐가 뭔지 몽롱할 텐데도 깊이 옹이 박힌 어떤 스트레스. 그 엿같음으로 악을 부리고 있다. 이 자식도 나만큼이나 되는 일 없고 뭐 좀 잘해보려고 하면 하는 짓거리마다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는 병맛인 게 틀림없다. 아무튼 너, 싸움 좀 한다. 너나 나나 젊은 팔자 왜 이리 꼬이는지. 젊은 게 한 재산이라는 개 엿 먹는 소린 어느 시러베새끼가 읊은 건지"    (p.253)

 

그들의 앞길에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여름 한낮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이유도 없이 벌이는 그들의 결투는 '이방인'의 뫼르소를 떠올리게 한다. 부조리한 삶이며, 부조리한 청춘인 것이다. 최수영의 <하여가>는 죽을 만큼 힘든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자신의 삶을 향하여 과감히 맞장 뜰 준비가 되었는지 묻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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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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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을 자제하라는 기상청의 예보 때문이었는지 햇살이 가만가만 퍼지는 이른 시간부터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습니다. 테라스 유리창에 의해 차단된 완전한 침묵. 밝음 속에 스며든 어둠처럼 침묵은 그렇게 한정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소리가 사라진 정적의 공간 속으로 한가로운 햇살만 넘실대는 바깥 풍경을 나는 그렇게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소리를 완전히 지운 듯한 비현실적인 풍경에서 눈을 뗀 나는 '이 더위가 언제까지 갈런지 원...'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주의보와 오존주의보 그리고 인적이 끊긴 보도.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걸렀지만 주말 휴일의 허기는 언제나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쉬는 날이면 나는 마음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향해 하루에도 수십 번 달음박질치는 까닭에 육체의 허기는 잠시 잊혀지는 어떤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은 일견 기쁘면서도 씁쓸한 것이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작가를 향해 내가 느꼈던 양가감정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묘한 일이었고, 그래서 다시 집어든 책이 <희랍어 시간>이었습니다. 책에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語을 잃은 여자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희랍어 시간은 상실의 고통과 기억을 지닌 그들만의 공간인 셈이었습니다. 정교한 언어이지만 문법적 복잡성으로 인해 서서히 사라져간 언어, 더이상 언어로서의 최소한의 기능마저 상실한 희랍어는 소설 속 남녀 주인공과도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남자는 희랍어 강사로 여자는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으로 만납니다. 대학이나 학원에 개설된 희랍어 강의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아카데미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와 멀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어떤 것을 잃음으로써 다른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통념과는 사뭇 배치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원하지도 않았던 기억 한 줌을 손에 쥐었다는 건 이론상으로 맞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p.120~p.121)

 

십대 중반의 나이에 가족 전체가 독일로 떠났던 남자는 언어와 문화가 두 동강이 난 채 그곳에서 살다가 십수 년 만에 혼자 귀국하여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가르치며 삽니다. 부계 유전에 따라 독일에서 그는 이미 마흔 이후에는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귀국을 결심한 남자를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떠나기 전부터 걱정했습니다. 남자는 독일에서의 청소년기를 지극히 외롭게 보냈습니다. 아시아계 이방인이라는 것에 더하여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남자의 이야기는 청소년기에 그가 사귀었던 두 사람(그의 첫사랑이었던 농아 여인과 유일한 독일 친구이자 그를 사랑했던 요하임 그룬델-그는 이미 사망했다)과 여동생 란이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p.39)

 

열입곱 살 때 처음 실어증을 앓았던 여자는 그때 우연히 배운 불어 단어로 인해 다시 말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와 편집대행사에서 일했고,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 강의를 했고, 시집 세 권을 냈고, 칼럼을 쓰며 문화잡지 창간 멤버로 활동했던 여자는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수년 전에 이혼했고,  소송 끝에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마저 잃고, 아들을 못 만난 지 오 개월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20년만에 다시 찾아온 실어증을 극복하기 위해 희랍어를 배웁니다. 어머니를 추모하며 늘 검정 옷을 입고, 아들이 없는 집에서의 불면의 밤을 두려워하여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걷는 여자는 희랍어 수업에 나가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느 날 건물 안으로 날아든 박새를 내쫓으려다 남자는 계단에서 굴러 상처를 입고 안경마저 부서져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부축해 함께 병원엘 가고 남자의 집까지 데려다 줍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마치 독백을 하듯 가만가만 들려주고 여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로 인해 오랫동안 굳어 있던 마음에 따스한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p.174)

 

소설에 등장하는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상실해가는 남자와, 청각을 잃었던 남자의 첫사랑과, 일찍 세상을 떠난 사춘기 시절 남자의 독일인 친구는 모두 자신이 소유했던 무엇인가를 내어주고 끝내 다시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작가는 어쩌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록 각자가 소유하는 시간은 다를지라도 시간이라는 블랙홀에 결국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아프게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을, 그리고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들마저도 결국에는 시간의 소멸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시력도, 청력도, 말語도 사람에 따라 임대 기간은 서로 다를지언정 얼굴도 모르는 주인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처지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이라는 임대하우스에 잠시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내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게 있기나 할런지요. 곧 있으면 저녁 어스름이 내릴 시간입니다. 빛이 소멸하는 시간이지요. 애초에 내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섭섭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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