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여가
최수영 지음 / 새움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필히 불법행위로 간주될 만한 오래된 관습을 적어도 한두 개 이상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내에서 벌어지는 그런 행위나 관습이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데 있다. 예컨대 조직폭력배나 군대 조직에서의 상시적인 폭력이나, 검찰 또는 조직폭력배 내에서의 갑질은 그것이 단지 조직을 유지시키기 위한 상명하복의 엄격한 규율이라고 인식될 뿐 조직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불법적인 행위 또는 직위를 이용한 파렴치한 행위라고는 그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갓 들어온 조직원이 조직내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 고참이 되어 신입 조직원을 대할 때면 그 당시에 있었던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오직 자신이 윗사람으로부터 당했던 것만 떠올리게 된다. 소위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이제 와서 윗사람에게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조직원을 이유도 없이 괴롭힐 수밖에. 결국 그런 행위는 조직의 폐쇄적인 운영이 지속되는 한 약간의 형태와 강도만 바뀔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최수영 작가의 소설 <하여가>는 비슷한 조직 내의 두 인물을 실감나게 그린 작품이다. 군대라는 조직의 김동하와 조직폭력배의 똘마니 이장철. 두 인물은 그들이 속한 조직의 유사성과 함께 인생의 비슷한 행로를 밟게 된다는 설정도 재미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대한 적 앞에서 언제까지고 마냥 무기력하게 끌려갈 수는 없는 법. 그날이 그날 같은 지리멸렬한 삶으로부터 두 청춘이 벌이는 거대한 반란은 우리 세대 청춘들을 대변하는 판타지이자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하게 하는 카타르시스라고 할 만하다.
이웃 블로거의 추천으로 우연히 읽게 된 이 소설은 소설의 전체적인 얼개보다도 비속어와 사투리, 유행어를 적절히 섞은 맛깔나는 문장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한다. 다큐멘터리를 번역하고 시나리오와 문화재 스토리텔링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학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작가의 이력에 걸맞게 그의 걸쭉한 입담이 압권인 책이다. '한번 보면 '막장', 다시 보면 '막 짠한'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카피처럼 현실감 있는 이야기 전개와 찰진 대사에 배꼽을 쥐고 웃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그렁그렁 맺히는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분교 대학생이었던 김동하는 돈이 없어 휴학을 하고 주유소 알바에 편의점 알바까지 하루에 두세탕씩 알바를 뛰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삼 년이나 사귄 여자친구가 변심을 하여 떠나고 그는 결국 군에 입대한다. 일병 김동하 밑으로 유준만이라는 꼴통이 들어오고 그때부터 그의 군생활마저 꼬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준만의 행패를 보다 못한 김동하는 그의 후견인인 곽병장과 함께 유준만을 쓰러트리고 탈영하기에 이른다.
"인생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이냐 ……. 고개가 숙여졌다. 담 아래 쓰러져 있는 유준만이가 보였다. 저 지독한 애는 죽어도 문제지만 살아도 문제다. 쟤 살아나면 한밤에 나를 세면장이나 소각장으로 불러내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거다. 그냥 죽일 거다. 이래저래 일단은…, 뛰고 보는 수밖에!" (p.116)
한편 팸짱을 하며 여러 가출팸으로부터 상납을 받아 생활했던 이장출은 범단(조폭) 스카우터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고 조폭에 가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조폭 생활을 그만두고 싶다는 친구 무식이를 조직원들이 처벌하는 과정에서 이장출은 그만 하극상을 저지르고 도망친다. 조직원들에게 쫓기던 그는 회장님으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된다. 불륜을 저지른 회장님의 명령을 받고 비열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도중에 그는 군인 김동하를 만난다. 김동하는 헤어진 애인 설희를 만나 담판을 지으러 가는 중이었다. 막다른 골목의 탈영병과 인생 막장으로 치닫는 조폭 똘마니의 만남은 곧 이유도 없는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나야 그렇다 쳐도 대체 이 자식은 왜 이리 죽자 살자 덤벼드는 거냐. 제놈도 나처럼 기절에서 깨어나 뭐가 뭔지 몽롱할 텐데도 깊이 옹이 박힌 어떤 스트레스. 그 엿같음으로 악을 부리고 있다. 이 자식도 나만큼이나 되는 일 없고 뭐 좀 잘해보려고 하면 하는 짓거리마다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는 병맛인 게 틀림없다. 아무튼 너, 싸움 좀 한다. 너나 나나 젊은 팔자 왜 이리 꼬이는지. 젊은 게 한 재산이라는 개 엿 먹는 소린 어느 시러베새끼가 읊은 건지" (p.253)
그들의 앞길에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여름 한낮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이유도 없이 벌이는 그들의 결투는 '이방인'의 뫼르소를 떠올리게 한다. 부조리한 삶이며, 부조리한 청춘인 것이다. 최수영의 <하여가>는 죽을 만큼 힘든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자신의 삶을 향하여 과감히 맞장 뜰 준비가 되었는지 묻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