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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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코 처음 읽는 책인데 왠지 모르게 여러모로 기시감이 느껴지는 소설이 있다. 그 이유를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 <사과는 잘해요>도 그랬다. 문체와 구성은 확연히 다르지만 소설의 분위기가 박민규의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했고, 소설의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대행한다는 점에서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떠올리게도 했다.

 

소설에 나오는 시봉과 '나'(진만)의 이야기는 이랬다. 아버지에 의해 시설에 맞겨진 '나'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부모님을 동시에 잃고 그때의 충격으로 차만 타면 바지에 대변을 보는 바람에 시설에 맞겨진 시봉은 그곳을 관리하는 2명의 복지사들로부터 수시로 폭행을 당하거나 원장에게 끌려가 성추행을 당하기도 한다. 아침 저녁으로 꼬박꼬박 네 알의 알약을 먹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양말을 포장하거나 비누에 사진을 붙이는 일을 하면서 보냈다. 상습적인 폭력에 길들여진 시봉과 '나'는 폭력에 앞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고 묻는 복지사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만들거나 하지도 않은 죄를 미리 고백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매를 줄이기 위해 짓지도 않은 죄의 고백과 사과가 필요했던 것이다. 폭력은 그렇게 일상화되고 그들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우리는 꼭 고백한 대로만, 꼭 그만큼의 죄만 지었다. 그래야 마음이 놓였고, 잠도 잘 왔다. 깜빡 잊고 그날 치의 죄를 짓지 않고 잠자리에 누운 날엔, 다시 방문을 두들겨 복지사들을 깨우기도 했다. 복지사들은 대개 방문을 열자마자 우리에게 발길질부터 해댔지만, 그래도 시봉과 나는 참고 끝까지 죄를 지었다." (p.30)

 

시설에 원생들이 늘어나자 복지사들은 원생들의 죄를 묻고 사과하는 일을 시봉과 '내'가 대신하도록 한다. 얼떨결에 반장이 된 '나'와 시봉은 원생들의 죄를 묻고 죄에 대해 사과하고 매를 맞기도 한다. 적어도 시설에 구레나룻 아저씨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신은 납치된 채로 강제 입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구레나룻 아저씨는 매일 밤마다 도와달라는 말을 종잇조각에 적어 담장 밖으로 던졌다. 이를 보다 못한 '나'와 시봉은 구레나룻 아저씨를 돕기 시작했고, 그들이 메모를 적기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는 날 경찰과 공무원들, 방송사 기자들이 시설로 들이닥쳤다. 원장과 복지사들, 총무과장과 식당 아줌마까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시설은 폐쇄되었다.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시봉과 함께 시봉의 동생 시연이 사는 임대아파트로 가게 된다. 매춘부로 사는 시연과 그녀의 동거남인 '뿔테 안경' 그리고 '나'와 시봉의 어처구니 없는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경마로 재산을 탕진한 채 특별한 직업도 없이 시연에게 얹혀 살았던 '뿔테 안경'은 '나'와 시봉에게 돈벌이를 종용하지만 정상이 아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시봉과 '나'는 시설에서처럼 '사과 대신하기'에 나선다.

 

'뿔테 안경'은 대신 사과할 의뢰인을 찾는 광고 전단지를 붙이고 그렇게 전단지를 붙인 지 열흘째 되는 날, 젊은 여자한테 눈이 멀어서 부인과 절름발이 아들을 버린 사람이 그들에게 사과를 의뢰하기 위해 찾아온다. 의뢰인의 아내는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김밥집을 하며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의뢰인의 아내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봉과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사과를 대신하며 교도소에 있는 원장을 면회하기도 하고 시설에서 먹던 알약을 구하기 위해 시설을 다시 찾아가기도 한다. 시설에서 알약과 함께 원장의 일기장을 발견하여 집으로 가져온다. 의뢰인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뢰인 아내의 제안을 받고 의뢰인을 찾아갔던 '나'와 시봉은 '뿔테 안경'이 이미 의뢰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죽음으로써 사과할 결심을 한다. 그날 술에 취한 '뿔테 안경'은 김밥집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편 집행유예로 풀려난 복지사들이 시봉과 '나'를 찾아와 시설로 데려간다. 시설에서 죽어나간 두 명의 행적을 알고 있었던 '나'와 시봉이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나'와 시봉을 땅에 묻을 계획이었던 복지사들은 원장의 일기장을 내가 갖고 있음을 알게 되고 일기장을 가져오라며 '나'를 시연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그들로부터 도망친다. 시봉을 버려둔 채. 언젠가 시봉은 자신에게 사과할 일이 생기면 자신을 대신해 '나'에게 사과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자살을 시도하여 병원에 입원한 시연을 들쳐업고 시연의 집을 향해 무작정 걷는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시연은 말없이 내 등에 뺨을 갖다 댔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나는 잠깐 뒤돌아, 병원의 파란색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병원의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엇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p.220)

 

이기호의 소설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소설의 구성이나 스토리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느꼈던 건 그의 문체와 사건 전개의 방식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죽을 죄를 짓고도 사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철면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잘 살고 있는지 작가는 묻고 있는 것이다. 사과할 만큼 큰 죄를 짓는 일이 없었던 시봉과 '나'는 누군가를 향해 언제나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 사과할 일이 너무나 많은 듯한 우리들은 되도록이면 사과를 피하려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작가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병원의 푸른색 십자가로부터, 또는 절대자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무작정 숨기려고만 한다. 어쩌면 범죄 바이러스를 막는 가장 강력한 백신은 사과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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