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번의 반짝 추위가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봄은 우리 주변을 서성이며 한껏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지는 3월의 첫날이자 삼일절 휴일이었던 어제 아침,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산에 올랐고 이울어가는 겨울 풍경을 아쉽게 바라보았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 산행은 푸른 빛이 감도는 새벽 어스름녘에서야 끝이 났습니다. 정상 부근의 소나무숲을 뒤로 하고 나는 하산을 서두릅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시작된 삶은 형체만 겨우 분간할 수 있는 어스름녘에 서둘러 끝이 나는 것일 테지요. 때로는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끝나는 삶을 목격하기도 하겠지만 대개의 삶은 어둠이 막 걷히는 이른 새벽이나 햇살이 찬란하게 퍼지는 아침에 끝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삶이 지속되는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잠깐 동안의 삶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분들은 어쩌면 모든 게 선명해진 세상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조용히 눈 감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겨울, 우리의 시간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둠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봄과 함께 칠흑 같은 어둠 또한 서서히 물러나겠지요.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것처럼 어둠이 깊으면 별은 더 빛난다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찬란한 아침이 펼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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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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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은 언제나 첫문장을 기억하게 된다. 첫문장의 무게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하는 <칼의 노래>가 그렇고,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로 시작되는 <남한산성>이 그렇고,'초겨울에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 돛배는출항하지 못했다.'로 시작된 <흑산>이나 '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다.'의 <현의 노래>가 그랬다. 작가에게는 이런 언급이 흘러간 세월처럼 무용하고 헛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첫문장의 느낌은 '그래. 이래야 김훈이지.'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그것은 곧 책의 마지막장까지 숨가쁘게 달려갈 독서의 여정을 위해 첫숨을 고르는 역할을 한다.

 

"마동수(馬東守)는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 (p.7)

 

소설은 그렇게 신문 기사의 한 문장처럼 건조한 느낌으로 시작한다. 1979년이라는 과거에 환하게 불이 밝혀지고, 그해의 한 귀퉁이를 살았던 '마동수'라는 인물을 독자는 기억하게 된다. 지금은 사라진 누군가의 삶을 기억한다는 건 그가 살다 간 시간을 두서없이 뒤적이는 일이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시간은 어떤 대상이나 물질로 형상화되고 조금 더 선명해진 색채로 우리의 의식에 조롱조롱 맺힌다.

 

"아버지는 삶에 부딪혀서 비틀거리는 것인지 삶을 피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마장세는 알 수 없었지만, 부딪히거나 피하거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늘 피를 흘리는 듯했지만, 그 피 흘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삶의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생활의 외곽을 겉돌고 있었다." (p.140)

 

일제 강점기에 중국을 떠돌던 마동수는 해방이 되자 서울 외곽의 고향집 근처로 돌아온다. 부모의 생사나 행방을 찾을 길 없었던 터라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단신으로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그는 피 묻은 군복을 잿물로 빠는 빨래꾼이 된다. 빨래터에서 그는 흥남부두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탈출한 이도순을 만나 부부가 된다. 장남 마장세가 태어나고, 지우려고 했던 차남 마차세가 태어난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온 마동수의 가족. 그러나 변변한 직업도 없이 떠돌던 마동수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들르곤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순전히 이도순의 몫이었다. 입대하여 월남전에 파병된 마장세는 그곳에서 제대하여 미크로네시아로 떠나고, 전방 GOP에 배치된 마차세는 상병 휴가를 나왔다가 아버지 마동수의 임종을 맞는다.

 

"난 아버지를 묻을 때 슬펐지만 좋았어.한 세상이 이제 겨우 갔구나 싶었지. 이런 사람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빌면서 흙을 쾅쾅 밟았어. 형은 그 힘들게 지나간 자취가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는 거지.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려다가 또 다른 수렁에 빠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 (p.184)

 

퇴역한 미국인 문관과 함께 미크로네시아에 정착한 마장세는 그곳에서 고철업과 호텔업을 벌인다. 아버지의 임종에도 그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 제대를 한 후 마차세는 사귀던 여자 박상희와 결혼한다. 그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주간지 인턴 기자로 취직하엿지만 3개월 만에 해고된다. 미대를 졸업한 박상희는 미술학원의 강사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요양원에 입원한 이도순의 병원비며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빠듯한 여건이었다. 마차세는 물류회사에 취직하여 오토바이 배달 일을 시작한다.

 

"박상희는 이 가엾은 남편과 살아갈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살아온 날들의 시간과 거기에 쌓인 하중을 모두 짊어지고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의 벌판을 건너가야 할 것이었다. 벌판은 저쪽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p.185)

 

마장세는 베트남에서 전사한 전우 김정팔의 형을 통하여 오장춘을 소개받는다. 마차세의 친구이기도 한 오장춘은 제대 후 고물상을 시작했다. 폐타이어와 고철을 취급했던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하여 고철과 폐타이어를 수입하는 무역회사로 발전한다. 마장세를 통하여 마차세의 소식을 듣게 된 오장춘은 마차세를 자신의 회사에 들어오도록 한다. 오장춘의 거래업체가 된 마장세는 미크로네시아 곳곳에 방치된 폐자동차와 고철을 치워주는 대가로 그 나라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다시 오장춘의 회사에 판매한다. 그리고 모래에 묻혀 인양이 쉽지 않은 폐자동차는 바다에 빠트려버리는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다.

 

"아버지가 죽어서 세상은 홀가분했다. 아버지의 몸은 검불 같은 것이었지만, 그 무게가 마차세의 시간을 짓누르는 중력은 컸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생활의 지표가 될 리도 없었고 생계에 보탬이 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어서 남은 사람의 삶이 더 막막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아버지를 한평생 끌고 온 시간과 아버지가 한평생 지고 온 짐이 소멸함으로써 아버지 없는 세상은 더 새롭고 가벼워질 것도 같았지만 아버지의 시간과 아버지의 짐이 과연 소멸할 수 있을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버지가 검불같이 하찮고 의미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어서 없어지고 난 후의 세상은 더욱 막막했다." (p.198)

 

마동수가 죽고 8년을 더 살았던 이도순은 요양원에서 죽었다. 그때도 역시 마장세는 오지 않았다. 월남전에서 작전을 나갔던 분대원이 고립되어 적들의 공격을 받고 일부는 죽고 김정팔이 부상을 당하자 그는 살아 남은 두 명의 부하와 함께 탈출하기 위해 김정팔을 사살했다. 그리고 그와 나머지 두 명은 탈출하여 살아 남는다. 그 공로로 전사한 김정팔과 마장세는 훈장을 받았다. 마장세가 숨겼던 비밀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숨긴 비밀이 밝혀질까봐 두려웠었다.

 

"마장세는 감방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다가왔다. 수염이 자랐고 몸이 말라서 옷이 헐렁했다. 걸음걸이가 끌리는 듯했고 나이보다 한참 늙어 보였다. 마차세는 멀리서 아버지가 다가오는 듯한 환영을 느꼈다. 어느 변방을 겉돌고 헤매는지, 두어 달 만에 한 번씩, 겨울이면 새벽에 기침을 쿨럭이며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마장세의 걸음에 옮겨와 있었다.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다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인가." (p.342)

 

가족이라기보다는 남이나 마찬가지였던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전쟁터에서 있었던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나라를 등졌던 마장세는 결국 모든 걸 잃은 채 안 좋은 모습으로 귀국한다. '나중에 나는 죽어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들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습관을 따라하거나 아버지가 밟았던 삶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인 양 질기다.

 

몇 년 전 작가는 이병률 시인과 함께 미크로네시아의 추크섬을 여행한 후 여행 에세이를 썼었다. <안녕 다정한 사람>이라는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섬에는 원주민 여자와 결혼하여 그곳에 정착한 김도헌 씨가 살고 있다. 그가 쓴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에 김훈 작가의 추천사가 실렸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곳곳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오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많은 까닭도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작가의 탁월한 문장 표현력이 없었더라면 작품에 대한 평은 훨씬 박했을지도 모른다. 스토리나 작품성보다는 작가의 능력이 빛났던 소설이었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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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이름도 모르는 간이역에서 기차를 갈아 타듯 나는 그렇게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져 꿈길 속을 헤매었던 것입니다. 봄이 멀지 않은 2월의 마지막 주말. 넉넉한 시간이 한마디 푸념도 없이 흐르는 햇살 좋은 오후였습니다. 겨울 코트를 벗에 한 손에 거머쥔 사람들이 보도 위를 걷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봄은 가까운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의 현실인 것만 같습니다.

 

어제부터 나는 김훈의 소설 <공터에서>와 달라이 라마·투투 대주교의 대화를 기록한 <기쁨의 발견>을 읽고 있습니다. 두 권 모두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진도는 잘 나가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수선스러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까닭이겠지요. 관여하지 않아도 될 온갖 일에 두루 마음이 쓰이는 걸 보면 봄의 예감은 변화무쌍한 날씨보다 사람들의 번잡한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광화문으로 집결한 듯합니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서울역으로 모인 듯하고 말이지요. 혼돈과 암흑의 시대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비극은 아닌 듯합니다. 취임 한 달이 지난 도널드 덕, 아니 도널드 트럼프의 지율이 39%로 역대 최저인 가운데 그를 반대하는 많은 미국 시민들로 인해 미국 또한 혼돈과 암흑의 시대로 접어든 듯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유럽이라고 해서 크게 나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변하지 않고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입니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답답한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요. 봄이 오고 만개한 벚꽃의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가슴에 품고 다시 또 희망을 말할 수 있을 테지요. 비록 우리의 소망은 늘 확신할 수 없는 꿈길 속의 어떤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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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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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체제나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정서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것은 곧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인간 본성은 스스로의 길을 걸으며 진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속한 체제에 관계없이 서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의 몸 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그렇게 확인하는 것이다.

 

북한 작가 반디의 소설집 <고발>은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던 책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금서로 묶였던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 해금되어 전국의 서점에 깔렸을 때 나 또한 우연히 읽고 홍명희 작가에게 품었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지금 내가 <고발>을 읽고 난 후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대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거침없이 써내려간 홍명희의 글솜씨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책에서 펼쳐보였던 순수 한글의 향연은 나로 하여금 우리글의 매력에 흠뻑 취하도록 만들었다.

 

<고발>의 작가 '반디'도 다르지 않았다. 유려한 글솜씨와 적확한 단어 선택의 능력은 남한의 작가에게서도 찾아 보기 힘든 발군의 실력이었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홍명희 선생이야 남과 북이 둘로 쪼개지기 전의 인물이니 같은 나라의 문인으로 생각하기도 쉽고 존경의 마음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반디는 엄연히 분단 이후의 작가이고 사회주의 체제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아니던가. 은연중에 나는 북한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 노동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흡사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알게 모르게 그들을 낮게 평가하려 드는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북한 주민을 향해서도 그 촉수가 뻗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출신 성분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것의 부당함을 알리는 '탈출기',김일성 초상화를 볼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와 그것 때문에 고초를 겪는 부모를 그리는 '유령의 도시', 북한 정권을 위해 혼신을 다바쳤던 노인의 비참한 말로를 그린 '준마의 인생', 허락이 없이는 여행의 자유도 존재하지 않아 어머니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는 아들의 한을 그린'얼마간 오래도록', 북한의 교통 수단을 통하여 특권층과 서민의 생활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복마전', 김일성의 죽음과 북한 주민들의 애도 장면을 통하여 사람의 감정까지 통제하려 드는 북한 정권의 실상을 그린 '무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산실인 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빨간 버섯'이 그것이다.

 

"떵떵 강물의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에 기가 질린 듯 창백한 갈고랑 달이 동북산 마루의 어설핀 수림 속에 숨어 있었다. 방한모 날개를 내리우다 못해 외투깃까지 올렸는데도 땡-하니 이마가 저려들고 코 안에 띠끔띠끔 얼음살이 배겨들었다. 그런 중에도 전영일의 머리는 번거롭기만 했다. 설용수가 어떻게 되어 다른 사람들도 아닌 군안전부 성원들에게 그런 과격한 언동을 부리게 된 것인지 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p.93 '준마의 일생'중에서)

 

북한이라는 특수 체제 속에서 반디가 그려내는 실상은 그의 서정적인 문체와 긴박한 스토리 구성에 대비되어 이것을 읽는 독자들은 북한의 현실이 더욱 가슴 답답하고 참혹한 느낌을 받게 된다. 2014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3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그의 신작은 그가 북한에 살고 있는 현역 작가라는 점, 원고의 반출 과정 등이 화제가 되었다는 점 등으로 유명했던 첫번째 작품과는 달리 작품 자체의 문학성과 단편소설을 구성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해외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그 반응이 뜨겁다고 한다.

 

"허윤모의 질척한 시선은 조금 전 고인식이 군중의 머리 너머로 그것을 바라보았을 것이 틀림없는 시당 청사 - 빨간 버섯을 직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귀중한 생명들이 저 독소에 희생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 사자머리의 마도로스 파이프가 지껄였다던 구라파의 붉은 유령이 이 땅에 뿌린 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인 저 빨간 버섯의 씨앗 따위였단 말인가!" (p.268 '빨간 버섯'중에서)

 

오후가 되자 요 며칠의 반짝 추위가 저만치 물러간 느낌이다. 하늘도 푸르다 못해 청명하다. 미세먼지도 그만한 것인지 멀리까지 시선이 닿는다. 같은 산하, 지척의 거리에 살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도 지금쯤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희망에 부풀어 있을까? 서로의 체제는 달라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한민족, 같은 뿌리를 둔 형제였음을 반디의 소설집 <고발>을 통해 어렴풋이 느낀다. 추위도 물러가는 늦겨울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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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기나긴 그리움을 경유할 때 아름답다. 오랜 세월을 통과하여 동글동글 깎이고 다듬어진, 바람인 양 햇살인 양 순한 그림자처럼 마모된 슬픔이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젖어들 때, 순한 빗소리의 슬픔은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길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 다다른 어느 집 처마밑처럼 뭉근하고 안온한 느낌의 슬픔이 서서히 번져갈 뿐이다. 칼릴지브란의 "예언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에 대해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가 답했다.
그대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슬픔이니 그대의 울음이 솟는 그 샘이

때로는 그대의 눈물로 채워지는 것과 같이 그 둘은 똑 같은 것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희들이 슬픔을

너희 존재속으로 보다 깊이 새길수록 더 많은 기쁨을 지니게 되리라.

그리고 알고 보면

너희가 포도주를 담는 바로 그 잔이 옹기장이의 가마에서 구워진 그 잔이며,

그대의 영혼을 달래는 그 류트(lute)란 칼로 속이 비도록 파내고 다듬은

바로 그 나무가 아닌가?

 

그대 기쁠 때 그대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대는 발견하게 되리라.

그대에게 슬픔을 준 바로 그것이 그대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대 슬플 때도 역시 그대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대는 보게 되리라.

그대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대가 지금 슬픔에 젖어 있음을.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기쁨이 슬픔보다 위대해" 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야, 슬픔이 기쁨보다 위대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둘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 이라고 말하리라.
그들은 언제나 함께 온다.

그리고 하나가 그대의 식탁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다른 하나는 너희의 침대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들은 슬픔과 기쁨 사이에 저울처럼 매달려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오직 그대들이 스스로 자신을 비웠을 때 그대의 영혼은 멈추어 균형을 이루리라.
그리하여 하늘의 보물을 지키는 이가 자신의 금과 은의 무게를 달고자

그대를 들어 올릴 때 그대의 기쁨과 슬픔 또한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임을. (칼릴지브란의 "예언자"중에서)

 

어제 저녁에 나와 만나 자신의 슬픔을 털어 놓은 젊은 친구도 기나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지금의 슬픔이 마치 깊고 짙은 비올라의 선율처럼 그저 몸 속 깊이 스며들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슬픔은 그저 아래로부터 천천히 차오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세월을 통과한 순한 슬픔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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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딩때 심취했던 칼릴지브란의 시네요
꼼쥐님께서 인용하실줄이야^^;; 반갑네요

꼼쥐 2017-02-24 16:12   좋아요 1 | URL
칼릴지브란의 <예언자>는 언제 읽어도 좋은 것 같아요.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말이 그 얇은 책 한 권에 모두 들어 있는 느낌이에요.

북프리쿠키 2017-02-24 16:16   좋아요 0 | URL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이 책도 너무 좋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