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핏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이름도 모르는 간이역에서 기차를 갈아 타듯 나는 그렇게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져 꿈길 속을 헤매었던 것입니다. 봄이 멀지 않은 2월의 마지막 주말. 넉넉한 시간이 한마디 푸념도 없이 흐르는 햇살 좋은 오후였습니다. 겨울 코트를 벗에 한 손에 거머쥔 사람들이 보도 위를 걷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봄은 가까운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의 현실인 것만 같습니다.
어제부터 나는 김훈의 소설 <공터에서>와 달라이 라마·투투 대주교의 대화를 기록한 <기쁨의 발견>을 읽고 있습니다. 두 권 모두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진도는 잘 나가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수선스러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까닭이겠지요. 관여하지 않아도 될 온갖 일에 두루 마음이 쓰이는 걸 보면 봄의 예감은 변화무쌍한 날씨보다 사람들의 번잡한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광화문으로 집결한 듯합니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서울역으로 모인 듯하고 말이지요. 혼돈과 암흑의 시대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비극은 아닌 듯합니다. 취임 한 달이 지난 도널드 덕, 아니 도널드 트럼프의 지율이 39%로 역대 최저인 가운데 그를 반대하는 많은 미국 시민들로 인해 미국 또한 혼돈과 암흑의 시대로 접어든 듯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유럽이라고 해서 크게 나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변하지 않고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입니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답답한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요. 봄이 오고 만개한 벚꽃의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가슴에 품고 다시 또 희망을 말할 수 있을 테지요. 비록 우리의 소망은 늘 확신할 수 없는 꿈길 속의 어떤 것일지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