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체제나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정서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것은 곧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인간 본성은 스스로의 길을 걸으며 진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속한 체제에 관계없이 서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의 몸 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그렇게 확인하는 것이다.

 

북한 작가 반디의 소설집 <고발>은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던 책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금서로 묶였던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 해금되어 전국의 서점에 깔렸을 때 나 또한 우연히 읽고 홍명희 작가에게 품었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지금 내가 <고발>을 읽고 난 후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대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거침없이 써내려간 홍명희의 글솜씨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책에서 펼쳐보였던 순수 한글의 향연은 나로 하여금 우리글의 매력에 흠뻑 취하도록 만들었다.

 

<고발>의 작가 '반디'도 다르지 않았다. 유려한 글솜씨와 적확한 단어 선택의 능력은 남한의 작가에게서도 찾아 보기 힘든 발군의 실력이었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홍명희 선생이야 남과 북이 둘로 쪼개지기 전의 인물이니 같은 나라의 문인으로 생각하기도 쉽고 존경의 마음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반디는 엄연히 분단 이후의 작가이고 사회주의 체제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아니던가. 은연중에 나는 북한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 노동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흡사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알게 모르게 그들을 낮게 평가하려 드는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북한 주민을 향해서도 그 촉수가 뻗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출신 성분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것의 부당함을 알리는 '탈출기',김일성 초상화를 볼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와 그것 때문에 고초를 겪는 부모를 그리는 '유령의 도시', 북한 정권을 위해 혼신을 다바쳤던 노인의 비참한 말로를 그린 '준마의 인생', 허락이 없이는 여행의 자유도 존재하지 않아 어머니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는 아들의 한을 그린'얼마간 오래도록', 북한의 교통 수단을 통하여 특권층과 서민의 생활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복마전', 김일성의 죽음과 북한 주민들의 애도 장면을 통하여 사람의 감정까지 통제하려 드는 북한 정권의 실상을 그린 '무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산실인 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빨간 버섯'이 그것이다.

 

"떵떵 강물의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에 기가 질린 듯 창백한 갈고랑 달이 동북산 마루의 어설핀 수림 속에 숨어 있었다. 방한모 날개를 내리우다 못해 외투깃까지 올렸는데도 땡-하니 이마가 저려들고 코 안에 띠끔띠끔 얼음살이 배겨들었다. 그런 중에도 전영일의 머리는 번거롭기만 했다. 설용수가 어떻게 되어 다른 사람들도 아닌 군안전부 성원들에게 그런 과격한 언동을 부리게 된 것인지 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p.93 '준마의 일생'중에서)

 

북한이라는 특수 체제 속에서 반디가 그려내는 실상은 그의 서정적인 문체와 긴박한 스토리 구성에 대비되어 이것을 읽는 독자들은 북한의 현실이 더욱 가슴 답답하고 참혹한 느낌을 받게 된다. 2014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3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그의 신작은 그가 북한에 살고 있는 현역 작가라는 점, 원고의 반출 과정 등이 화제가 되었다는 점 등으로 유명했던 첫번째 작품과는 달리 작품 자체의 문학성과 단편소설을 구성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해외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그 반응이 뜨겁다고 한다.

 

"허윤모의 질척한 시선은 조금 전 고인식이 군중의 머리 너머로 그것을 바라보았을 것이 틀림없는 시당 청사 - 빨간 버섯을 직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귀중한 생명들이 저 독소에 희생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 사자머리의 마도로스 파이프가 지껄였다던 구라파의 붉은 유령이 이 땅에 뿌린 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인 저 빨간 버섯의 씨앗 따위였단 말인가!" (p.268 '빨간 버섯'중에서)

 

오후가 되자 요 며칠의 반짝 추위가 저만치 물러간 느낌이다. 하늘도 푸르다 못해 청명하다. 미세먼지도 그만한 것인지 멀리까지 시선이 닿는다. 같은 산하, 지척의 거리에 살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도 지금쯤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희망에 부풀어 있을까? 서로의 체제는 달라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한민족, 같은 뿌리를 둔 형제였음을 반디의 소설집 <고발>을 통해 어렴풋이 느낀다. 추위도 물러가는 늦겨울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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