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씨크 명랑 - 근대 광고로 읽는 조선인의 꿈과 욕망
김명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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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어느 기사는 바둑기사 이창호, 작곡가 주영훈, SBS 윤현진 아나운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묻는 것으로 글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신문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퀴즈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엿한 기사였는데 시작만 그랬다는 것이죠. 혹시 정답을 아시는지. 그렇습니다. 저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이들은 모두 남양유업과 MBC 방송국이 주관했던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다더군요. 40대 이후의 세대라면 TV에서 방영되던 그 때의 장면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토실토실 살이 찐 아기들이 홀딱 벗은 몸을 엄마의 손에 의지한 채 카메라 앞에 서서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아주 서럽게 울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1971년에 시작돼 1983년 1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던 우량아 선발대회는 숱한 사연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여담이지만 이창호는 1977년 대회에 참가하여 전국 2위를 차지했다는군요. 당시 19개월 되었던 이창호의 몸무게는 4.8kg이었다네요. 우량아로 선발되면 선물도 받고, 광고모델로 활동도 했으니 가난했던 그 시절의 부모님으로서는 자격만 된다면 참가를 한번쯤 고려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첫 대회 참가 신정자만 1830명에 달했다고 하니 이벤트가 많지 않았던 당시에 20개월 미만의 아기를 둔 부모들이 우량아 선발대회에 쏟았던 관심이 지대했던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분유가 처음 들어온 건 언제였을까요. 일제강점기의 광고를 분석한 <모던 씨크 명랑>의 기록으로 보면 1924년쯤이었나 봅니다. 김명환의 <모던 씨크 명랑>은 중견 언론인인 저자가 1920년부터 1940년까지 20여 년간 발행된 신문 6천여 부의 광고면들을 뒤져 신문광고에 담긴 근대 조선인의 삶과 사회상을 흥미롭게 짚어낸 책으로서 1924년 5월 조선일보에 실린 분유 광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대 광고로 읽는 조선인의 꿈과 욕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분유 광고 이외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놀라운 기록들이 여럿 실려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산의 분유 '라구도겐Lactogen'(락토겐)은 한술 더 떠 '분말 순유純乳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분유의 용도를 여섯 가지나 나열했다. 즉 젖먹이나 허약아, 임산부의 영양 보충용, 이유기 아기용으로 쓸 뿐 아니라, 멀쩡한 성인 남녀들에게도 분유를 물에 타서 '보건용 음료'로 마시자고 제안했다. 영양 보충용 식품으로 광고한 것이다." (p.64)

 

저자는 20년 치 신문광고 전체를 샅샅이 훑어 190여 점의 중요 광고의 원본 이미지를 수록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1부 놀라지 마시라, 모던한 이 맛!, 2부 환락의 경성 근대의 에로티시즘, 3부 명랑하다! 오리지나루 팻숀과 발명품, 4부 고통의 세상 만병통치약의 꿈, 5부 흰옷 입은 민족의 슬프고 기발한 시, 모던 광고 파노라마의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의 실생활에 필요한 상품을 광고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문물에 대한 그 시절 사람들의 경이와 흥분이 고스란히 담았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지금의 광고 문구에 비하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유치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곳곳에 드러나지만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도 광고를 통하여 구매를 유도한 후 물건은 보내지 않고 돈만 챙기는 사기가 횡행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나체 사진집 광고들이란 대부분 속임수였다. 업자들이 보내온 것은 광고와 전혀 달랐다. '아주 빨가버슨 사진'도 아니고 '남녀가 바라고 바라던 사진'도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소포 안에는 기생이나 여배우가 수영복을 입고 해변에서 헤엄치는 장면 같은 사진이 들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여자가 아닌 장정들이 벌거벗고 땀흘리며 일하는 사진을 보내오는 일까지 있었다." (P.72)

 

'살찌라! 건강의 추秋에 살 안 찐 분은 에비오스 정을!'이나 '위생상으로나 미용상으로나 남자들은 3일에 한 번, 여자들은 10일에 한 번은 (머리 감기가) 꼭 필요'와 같은 광고 문구에는 실소가 터져나오기도 하지만 위안소에 들어가는 사병에게 성병 예방을 위해 제공했다는 '돌격1번突擊一番'과 같은 콘돔 광고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의 삶은 절대적으로 남성 위주의 사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말이죠.

 

오늘 이 책을 읽는 내내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은 옆에서 얼마 전에 사준 "The Currents of Space By Isaac Asimov"를 읽고 있었습니다. 저도 아들의 나이 때에는 SF소설을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역사에 더 애착이 가는 듯합니다. 내가 겪었던 시절에 더하여 그 이전 세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그리움처럼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날들이 많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과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크겠지요. 김명환의 <모던 씨크 명랑>은 내 할아버지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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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맑고 청명한 하늘을 보았던 게 언제였는지요. 아침에 집을 나오는데 멀리까지 탁 트인 시야와 맑은 공기, 적당히 부는 바람 등 근래에 보지 못했던 풍경에 나는 어리둥절 조금 놀랐었나 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간절히 원하지만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상상 속의 하늘, 귀한 줄도 모른 채 맘껏 누렸던 내 기억 속의 하늘이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계절을 건너 뛰어 초가을의 어느 아침을 맞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괜스레 설레기도 했습니다.

 

청녹색

 

           천상병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산의 나무들은 녹색이고

하느님은 청녹색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청녹색은

사람의 눈에 참으로

유익한 빛깔이다.

우리는 아껴야 하리.

 

이 세상은 유익한 빛깔로

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의 시 <청녹색>이 오늘 아침 문득 떠올랐습니다. 푸른 하늘을 떠다니는 흰구름이 마치 시인의 천진스러운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날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던 것이지요. 미세먼지 걱정이라곤 해본 적 없었던 과거에는 하루하루가 천국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아마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과 과거로 변한 그리움이 모두 눈물로 변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외선 걱정은 뒤로 한 채 자꾸자꾸 밖으로만 나가고 싶었던 그런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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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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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의견이 달라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써내려간 그런 내용의 글을 읽을라치면 시원시원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단 한 번뿐인 삶,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강명 작가와 같은 희귀종, 또는 별종을 만나면 왠지 존경스러운 마음보다는 '설마 이거 레알?' 하는 의심부터 드는 것이다.

 

'댓글 부대', '한국이 싫어서' 등으로 이미 베스트 셀러 작가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장강명의 에세이 <5년만에 신혼여행>은 개인보다 가정을 앞세우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케케묵은 관습을 과감히 박차고 나가 자신의 소신대로 살고 있는 작가의 리얼 스토리를 다룬 책이다.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작가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계열의 건설회사에 취직했다가 1년 뒤 기자로 전향했다. 10년 남짓 기자생활을 한 그는 그마저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 책은 저자와 그의 아내가 결혼한 지 5년만에 떠난 보라카이 신혼여행기다. 3박 5일간의 여행 이야기이지만 톡톡 튀는 내용들이 눈에 띈다.

 

책은 2001년 초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나 2년 남짓 연인으로 지낸 HJ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2004년 HJ가 시민권 취득을 목표로 호주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갑자기 헤어져 연락처도 모른 채 지내다가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어"라는 작가의 고백 덕분에 다시 장거리 연애에 돌입, 2008년에 귀국한 HJ와 1년 남짓 동거를 했고, 2009년 여름에 결혼식은 생략한 채 혼인신고를 했다. HJ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고 결혼식은 포기했다. 대신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결혼을 하니 축하해달라는 신문광고를 작게 냈다.

 

명절에는 작가 혼자 부모님 댁에 가고, 집 현관에는 '효도는 셀프'라는 글귀를 붙여 놓았다. 아이를 낳지 않고 둘이 행복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정관수술도 받았다. 작가는 자신이 그간 살아온 궤적과 세상을 대하는 가치관, 아내와의 사랑 이야기까지 솔직하고 거침없이 쏟아낸다. 신혼여행도 신혼여행이지만 이 책은 오히려 신혼여행기를 빙자한 장강명 작가의 인생 에세이로 읽힌다.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고 둘이서 잘 살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나는 신촌의 비뇨기과에 가서 정관수술을 받았다. 어영부영하다가 결심이 흔들릴 게 두려웠다. 비뇨기과 의사가 "자녀는 몇 분이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둘 있습니다"라고 거짓말했다."    (p.15)

 

아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준비한 보라카이 3박 5일의 신혼여행은 기대와 다르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저가 항공사의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공항에서 6시간이나 지체되었고, 리조트의 방은 1층에 전망도 안 좋은 데다 시끄럽기까지 했다. 피곤이 쌓인 부부는 결국 부부 싸움을 크게 벌이기도 한다.

 

"우리는 우연의 허락을 받고 사귀게 되었다. 그런 결론에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이 결론에 따르면 우리가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떠나, 보라카이 해변에서 부부 싸움을 벌인 것도 운명이 아니다. 우연일 뿐이다. 그리고 우연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우리는 뭐든 할 수 있다. 우연은 아무리 연이어 일어나봤자 우연의 연속일 따름이다. 거기에 의지가 섞여 들어가야 운명이 된다."    (p.142)

 

작가는 이 책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가감없이 쓰고 있다. 그것은 가볍다기보다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하는 느낌의, 관습이나 규범, 예절 등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다를 뿐이라는 시각으로 읽힌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40대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문제이고, 비록 작가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는 허구에 대해 생각했다. 때로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삶의 의미라는 구실을 내세워 다가오는 허구들. 나는 그 허구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 허구  속에서만 살 수 있는존재다. 심지어 나는 그 일로 돈을 벌려 하고 있다. 허구는 익사에 대한 공포와 수면 위로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바닷물이자 산소통 그 자체다. 어떤 허구에는 다른 허구로 맞서고, 어떤 허구에는 타협하며, 어떤 허구는 이용하고, 어떤 허구에는 의존할 수밖에 없다."    (p.237)

 

나도 이따금 아직 이루지 못한 여행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들뜨거나 가까운 과거의 지난 여행에 대해 회상하곤 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다녀온 여행지에서는 늘 예외나 우연이 길에 버려진 비닐봉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떠다녔다. 여행에서 예외나 우연이 일상인 양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는 걸 쿨하게 인정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게 한결 편해질지도 모른다. 작가의 생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느껴보는 자유가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의 소신과 그에 상응하는 행동들로만 삶을 구성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따금의 여행을 통해 소신이 개입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을 나의 삶 속에 슬몃 밀어넣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소신을 넓혀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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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적인 더위가 제집인 양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오후, 운전석에 앉으면 자동적으로 에어컨에 손이 갑니다. 차창을 반쯤 열어젖혀도 후끈한 도로 열기 때문에 더위를 참고 운전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렸지만 일찍 찾아온 더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엊그제 뉴스였었나요.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책감사가 거론되었던 게 말이지요. 대다수의 국민들이 당연한 수순으로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많은 국민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끝까지 밀어붙였던 당사자들이겠지요.

 

'녹조라떼, 수질악화, 환경파괴 등 재앙수준의 4대강 사업은 토건회사를 배불리기 위한 무용지물 사업'이었으며, 총 사업비 22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국민 혈세가 투입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은이었지만 결국에는 몇몇 사람의 주머니만 채워준 셈이 되고말았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합법을 가장한 최악의 불법행위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보의 상시 개방뿐만 아니라 보를 철거해야 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되는, 재난 수준의 실패한 사업으로 판명되었음에도 4대강 사업의 훈포상자가 1152명이나 된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누렸던 그들만의 잔치는 결국 머지 않은 미래에 대가를 요구받을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스웨덴 작가 헤닝 만켈(1948~2015)을 아시는지요. 그의 삶은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어머니가 집을 나갔던 게 그의 삶이 모험으로 변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16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스웨덴 철광석을 미국에 실어나르는 화물선의 노무자가 됩니다. 그 뒤 프랑스 파리에서 보헤미안처럼 살았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연극무대 스태프로 일하면서 첫 번째 희곡을 완성합니다. 작품을 쓰면서 연극연출을 병행하던 그는 30대 후반부터 빈곤이 극심한 모잠비크에 극단을 세우고 1년 중 절반을 이곳에서 보냅니다. 201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는 끊임없이 세상의 온갖 불평등과 약자들의 고통,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가진 손전등으로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전력을 다해 남들이 숨기려는 것들을 밝히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이지요. 또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나는 세상에 쓸모없는 고통이 너무나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비용은 서구 세계가 애완견 사료에 쓰는 비용만큼도 안 될 겁니다."

 

헤닝 만켈은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자신이 삶을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사회를 만들고 싶었던 건지에 관해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책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자 했던 헤닝 만켈의 삶은 현실을 사는 우리가 되새겨볼 만합니다.

 

암으로 엄마를 잃은 이슬양의 동시 '가장 받고 싶은 상'은 어른인 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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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가토 노리히로 지음, 김난주 옮김 / 책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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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이라는 부사가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아무튼'으로 바뀌었던 건 1989년의 일이다. 나는 그 이전에 한글 철자를 배웠던 세대이니만큼 '아뭏든'을 한동안 버리지 못한 채 번번이 '아무튼'을 '아뭏든'으로 쓰곤 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뭏든'을 '아무튼'으로 잘못 썼다가 호되게 손바닥을 맞았던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로 다시 돌아가 철자부터 다시 배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나의 기억이 맞다면 나는 '아무튼'이라는 단어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던 시기에 하루키를 만났을 것이다. '전혀'라고 하면 약간의 어폐가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내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당시에는 상실의 시대)>이었다. 그동안 일본 소설에 대한 나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일부러 멀리 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1톤쯤 밀려오게 했던 작품이었다. 그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그의 작품이라면 출간되는 족족 죄다 구해 읽었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는 기존 작가들과 구별되는 '뭔가'가 있었다.

 

"애당초 일본의 근대에서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분류하는 기준은 이 부정성의 유무, 문학이 부정성에 의해 구동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예고했던 것이 2, 3년 지나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변화의 바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p.93)

 

문예평론가이자 와세다대학 명예교수인 가토 노리히로의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를 읽으면서 나는 하루키 소설에서 내가 느꼈던 '뭔가'를 이제서야 찾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만났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작품을 읽어오면서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를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음직한 공통의 경험이 있다. 소위 교양과 격식을 중시하는 모임에서는 자신이 하루키의 팬이라는 사실을 숨기게 된다거나 대화의 주제로 하루키의 작품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대중에게 하루키의 소설이 다른 어느 소설가보다 인기가 있다는 것도, 다른 어느 소설보다 압도적인 판매량을 보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게 다라고 폄훼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루키는 그저 대중에 영합한 젊은이 취향의 문학, 대중의 기호를 반영한 상업적인 소설만 쓰는 인기영합주의 작가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루키의 작품을 읽지 않음은 물론 정작 하루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결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문학을 이분하는 문학관, 거기에 돌을 던져주자."는 모티프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루키를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현대 지식인과 문학가에게도 하루키가 중요한 존재로 각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이 쓰였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자기 행동의 기준을 통해 사회 풍조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모럴의 부정성이 가사 상태에 있는 시대에 그나마 그 부정성을 살아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무라카미는 바로 이 점에서 이 시대의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저항의 디태치먼트, 이것이 내가 여기서 맥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p.116)

 

저자는 하루키가 소설가로 등단했던 시점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시기별로 나누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평론가로서 때로는 깊고 전문적인 설명과 상징물에 빗댄 표현들이 많지만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애독자라면 이런 비유들이 오히려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하루키가 썼던 많은 소설들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비교하고 분석하며 서로를 연결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각각의 소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하루키 자신은 소설가로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하루키 팬의 한 사람으로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라카미는 카탈루냐에서 앞선 내용과 같이 말한 후 '손상된 윤리와 규범의 재생'은 우리 모두의 일이지만, 언어에 관련된 자들도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윤리와 규범을 새로운 언어와 연결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생기에 찬 새로운 이야기의 싹을 틔워 키워가는 것이 자신들의 일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p.255)

 

오늘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날이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봉하마을의 추도식 현장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렸었다. '정의와 선을 추구하고 이상을 잃지 않으며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라면, 최소한 자신의 개인용 규칙을 만들고 엄수하는 것이 세상의 니힐리즘에 물들지 않기 위한 저항의 요새가 된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 말하자면 전체주의와도 같은 구시대적 유물 속에서 살았다. 자포자기의 니힐리즘에 저항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규칙을 만들고 소중히 지켜왔던 게 아닐까. '아뭏든'을 온전히 '아무튼'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우리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들, 결코 지워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 너무 많다. 지금의 대통령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크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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