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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가토 노리히로 지음, 김난주 옮김 / 책담 / 2017년 3월
평점 :
'아뭏든'이라는 부사가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아무튼'으로 바뀌었던 건 1989년의 일이다. 나는 그 이전에 한글 철자를 배웠던 세대이니만큼 '아뭏든'을 한동안 버리지 못한 채 번번이 '아무튼'을 '아뭏든'으로 쓰곤 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뭏든'을 '아무튼'으로 잘못 썼다가 호되게 손바닥을 맞았던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로 다시 돌아가 철자부터 다시 배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나의 기억이 맞다면 나는 '아무튼'이라는 단어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던 시기에 하루키를 만났을 것이다. '전혀'라고 하면 약간의 어폐가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내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당시에는 상실의 시대)>이었다. 그동안 일본 소설에 대한 나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일부러 멀리 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1톤쯤 밀려오게 했던 작품이었다. 그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그의 작품이라면 출간되는 족족 죄다 구해 읽었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는 기존 작가들과 구별되는 '뭔가'가 있었다.
"애당초 일본의 근대에서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분류하는 기준은 이 부정성의 유무, 문학이 부정성에 의해 구동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예고했던 것이 2, 3년 지나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변화의 바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p.93)
문예평론가이자 와세다대학 명예교수인 가토 노리히로의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를 읽으면서 나는 하루키 소설에서 내가 느꼈던 '뭔가'를 이제서야 찾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만났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작품을 읽어오면서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를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음직한 공통의 경험이 있다. 소위 교양과 격식을 중시하는 모임에서는 자신이 하루키의 팬이라는 사실을 숨기게 된다거나 대화의 주제로 하루키의 작품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대중에게 하루키의 소설이 다른 어느 소설가보다 인기가 있다는 것도, 다른 어느 소설보다 압도적인 판매량을 보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게 다라고 폄훼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루키는 그저 대중에 영합한 젊은이 취향의 문학, 대중의 기호를 반영한 상업적인 소설만 쓰는 인기영합주의 작가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루키의 작품을 읽지 않음은 물론 정작 하루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결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문학을 이분하는 문학관, 거기에 돌을 던져주자."는 모티프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루키를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현대 지식인과 문학가에게도 하루키가 중요한 존재로 각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이 쓰였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자기 행동의 기준을 통해 사회 풍조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모럴의 부정성이 가사 상태에 있는 시대에 그나마 그 부정성을 살아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무라카미는 바로 이 점에서 이 시대의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저항의 디태치먼트, 이것이 내가 여기서 맥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p.116)
저자는 하루키가 소설가로 등단했던 시점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시기별로 나누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평론가로서 때로는 깊고 전문적인 설명과 상징물에 빗댄 표현들이 많지만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애독자라면 이런 비유들이 오히려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하루키가 썼던 많은 소설들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비교하고 분석하며 서로를 연결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각각의 소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하루키 자신은 소설가로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하루키 팬의 한 사람으로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라카미는 카탈루냐에서 앞선 내용과 같이 말한 후 '손상된 윤리와 규범의 재생'은 우리 모두의 일이지만, 언어에 관련된 자들도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윤리와 규범을 새로운 언어와 연결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생기에 찬 새로운 이야기의 싹을 틔워 키워가는 것이 자신들의 일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p.255)
오늘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날이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봉하마을의 추도식 현장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렸었다. '정의와 선을 추구하고 이상을 잃지 않으며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라면, 최소한 자신의 개인용 규칙을 만들고 엄수하는 것이 세상의 니힐리즘에 물들지 않기 위한 저항의 요새가 된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 말하자면 전체주의와도 같은 구시대적 유물 속에서 살았다. 자포자기의 니힐리즘에 저항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규칙을 만들고 소중히 지켜왔던 게 아닐까. '아뭏든'을 온전히 '아무튼'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우리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들, 결코 지워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 너무 많다. 지금의 대통령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크다.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