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시적인 더위가 제집인 양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오후, 운전석에 앉으면 자동적으로 에어컨에 손이 갑니다. 차창을 반쯤 열어젖혀도 후끈한 도로 열기 때문에 더위를 참고 운전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렸지만 일찍 찾아온 더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엊그제 뉴스였었나요.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책감사가 거론되었던 게 말이지요. 대다수의 국민들이 당연한 수순으로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많은 국민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끝까지 밀어붙였던 당사자들이겠지요.

 

'녹조라떼, 수질악화, 환경파괴 등 재앙수준의 4대강 사업은 토건회사를 배불리기 위한 무용지물 사업'이었으며, 총 사업비 22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국민 혈세가 투입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은이었지만 결국에는 몇몇 사람의 주머니만 채워준 셈이 되고말았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합법을 가장한 최악의 불법행위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보의 상시 개방뿐만 아니라 보를 철거해야 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되는, 재난 수준의 실패한 사업으로 판명되었음에도 4대강 사업의 훈포상자가 1152명이나 된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누렸던 그들만의 잔치는 결국 머지 않은 미래에 대가를 요구받을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스웨덴 작가 헤닝 만켈(1948~2015)을 아시는지요. 그의 삶은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어머니가 집을 나갔던 게 그의 삶이 모험으로 변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16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스웨덴 철광석을 미국에 실어나르는 화물선의 노무자가 됩니다. 그 뒤 프랑스 파리에서 보헤미안처럼 살았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연극무대 스태프로 일하면서 첫 번째 희곡을 완성합니다. 작품을 쓰면서 연극연출을 병행하던 그는 30대 후반부터 빈곤이 극심한 모잠비크에 극단을 세우고 1년 중 절반을 이곳에서 보냅니다. 201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는 끊임없이 세상의 온갖 불평등과 약자들의 고통,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가진 손전등으로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전력을 다해 남들이 숨기려는 것들을 밝히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이지요. 또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나는 세상에 쓸모없는 고통이 너무나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비용은 서구 세계가 애완견 사료에 쓰는 비용만큼도 안 될 겁니다."

 

헤닝 만켈은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자신이 삶을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사회를 만들고 싶었던 건지에 관해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책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자 했던 헤닝 만켈의 삶은 현실을 사는 우리가 되새겨볼 만합니다.

 

암으로 엄마를 잃은 이슬양의 동시 '가장 받고 싶은 상'은 어른인 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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