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커피를 서너 잔이나 마셨는데도 나른하고 졸리기만 하다. 게다가 새벽에는 평소보다 한참이나 빠른 시각에 잠이 깨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산행을 나섰었다. 볼에 닿는 차가운 바람이 잠을 깨우기는커녕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와 속살을 파고드는 한기는 부족한 수면으로 가뜩이나 방전된 체력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듯했다. 어렵사리 산행을 마친 후 씻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설 때까지 몽롱한 정신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사건의 전말을 이러했다. 저녁을 먹고 책을 조금 읽은 후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려고 하는데 아파트 실내의 스피커를 통해 갑자기 들려오는 비상벨 소리. 복도에서는 화재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영문도 모른 채 달려 나온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화재 경보음이 울린 이유를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다행히 같은 동의 어느 집도 화재가 나지는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경보음은 한동안 지속되었고 잠은 저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10여 분 이상 시끄럽게 울리던 경보음이 잠잠해지더니 아무 일 없으니 안심하고 자도 된다는 관리사무실의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그때는 이미 까무룩 잠 속으로 빠져들던 의식이 되돌아와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였다. 한동안 뒤척이다 어찌어찌 잠들었던 게 새벽녘이었다. 그러나 늘 일어나던 기상시간보다 일찍 잠이 깨는 바람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산행에 나섰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제 있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대체로 그럴 줄 알았다는 의견이었고, '무전 유죄, 유전 무죄'의 전통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며 앞으로도 쭈욱 그렇지 않겠느냐는 비관 섞인 전망을 내세우는 사람도 많았다. 판사들 대부분이 돈과 권력을 좇아 부나방처럼 부유하는 족속이라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형식 판사의 판결은 너무 노골적이지 않느냐며 분개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디 정형식 판사 한 사람뿐이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판사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범죄 피의자의 영장 청구를 번번이 기각하는 기각 요정 오민석 판사나 돈이 된다면 양심도 팔 기세인 정형식 판사나 그들과 비슷한 성향의 드러나지 않은 판사들은 과연 얼마이겠는가. 게다가 그들을 지지하는 얼빠진 국민들도 다수 존재하지 않는가. 입춘이 지난 오늘도 동장군의 기세가 매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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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2-0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나라 사법 정의에 또 불났다는 경보음이었나 봐요....

꼼쥐 2018-02-08 12:39   좋아요 0 | URL
그랬었나 봅니다. 이런 주관적인 판결은 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죠.

2018-02-06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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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입춘, 24절기 중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라지만 동장군의 기세에 그 의미마저 무색해진다. 오늘날은 입춘축을 써 붙이는 우리의 옛 풍습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한 해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입춘축이 집집마다 내걸렸고, 붓글씨로 크게 쓴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의 입춘축이 낯설지 않았다. 입춘축을 붙이는 게 굿 한번 하는 것보다 낫다는 옛말처럼 새해의 소원을 입춘축에 씀으로써 사람들은 어쩌면 한 해의 행운을 모두 얻은 듯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경험하는 일이다. 글의 시작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하고, 글의 끝까지 달려가본 다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글을 마무리하게 된다. 글쓰기 경험은 삶의 경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내가 어떤 나인지 알 수 있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p.82)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라는 부제가 붙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블로그를 시작했던 몇 년 전을 떠올려보았다.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 일을 나는 참 오래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효용으로 따지자면 시쳇말로 '1도 가치가 없는'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란다. 충동에 가까운 무작정 시작했던 일, 몇 번 위기는 있었지만 성마른 성격의 내가 수년째 이어오는 일, 나는 아직도 그 배경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글을 통해 끊임없이 어떤 명제를 만들거나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 글로 자신이 온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단언하듯 문장을 만들지만 그 문장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바보 같은 것인지도 알고 있다. 바보 같은 줄 알면서도 계속 쓰고, 단언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하얀 눈 위의 구두 발자국' 같은 문장을 끊임없이 찍어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속에서 흔들리며 글을 쓴다." (p.123)

 

사실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보편적인 조언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이라거나 대중적인 글쓰기 책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글쓰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글을 쓰는 직업인으로서의 작가 자신을 한 꺼풀 벗겨낸 듯한 모습을 누군가 객관적으로 써내려 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목차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1부 '창작의 도구들', 2부 '창작의 시작', 3부 '실전 글쓰기', 4부 '실전 그림 그리기', 5부'대화 완전정복' 등 자신의 글쓰기 환경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나 연필, 스마트펜, 해마다 업그레이드된다는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굳이 이런 것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딱히 쓸 얘기가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서른 살에 쓴 내 소설과 마흔여섯 살에 쓴 내 소설은 무척 다르다. 패기는 줄어들었지만 여유는 늘어났다. 형식적인 실험은 줄어들었지만 소설의 내용으로 하는 실험은 늘어나고 있다. 문장은 짧아졌고, 사람들의 대화는 부드러워졌다. 앞으로 나는 어떤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힘들고 막막하지만 앞으로 내가 쓸 소설이 기대되기도 한다. 나이만 잘 먹으면 글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나이를 잘 먹어야만 글이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p.204)

 

'글을 쓰면서도 최대한 말에 가깝게 쓰고 싶고, 말을 할 때는 최대한 글에 가깝게 쓰고 싶다'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무척이나 글을 잘 쓰거나 글쓰기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온 사람처럼 생각될 테지만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전에 '이러이러한 내용의 글을 써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쓰고 나면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이 떡하니 올라 있는 경험을 수차례 반복하는 까닭에 '내 글은 왜 말하고 싶은 내용을 담지 못할까' 화가 나기도 하고 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끝끝내 쓰고 싶은 글의 롤모델이 어머니의 글'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글에는 맞춤법이나 문장은 엉망이어도 리듬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리듬을 찾는 게 글쓰기의 완성'일 것이라고도 했다.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다는 건 세상 속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불안정한 내가 타인으로부터 '너답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정표가 없는 삶의 행로에서 자신이 가야 할 삶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글쓰기만큼 유용한 수단도 달리 없는 듯 보인다. 끝없이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글을 쓰는 이유는 결국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함은 아닐까. 오늘은 입춘, 매운 바람이 불었고 천진한 나는 봄의 향기를 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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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무 자르듯 싹둑 단칼에 잘라버리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도 결정을 미룬 채 마냥 뭉개고 앉아 있다가 결국 손해를 본 후에야 비로소 등 떠밀려 결정을 하게 될 때, 마음속으로는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말자' 결심하지만 개 버릇 남 못준다는 속담처럼 같은 실수를 번번이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나에 대하여 항상 비난의 말만 있는 건 아니고 이따금 '인간적이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내 앞에서 하는 말이니 속마음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반대로 좋은 점도 있다. 한 번 들인 습관은 싫다 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게 그렇다. 사람 관계도 단박에 끊어야 할 시점에 끊지 못하면 때로는 손해를 본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게 참 어렵다.

 

제1야당의 대표가 자신을 성희롱자로 보도한 모 방송국의 '당 출입금지 및 부스 제거, 당 소속 의원 및 당직자 등 취재거부, 해당 언론 시청거부 운동 독려'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민들의 지지와 외연 확장을 위해서는 언론의 도움이 절실할 텐데 그런 손익 계산과 상관없이 단칼에 내려칠 수 있는 그의 결단력이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아침에 잠깐 눈발이 날리더니 지금은 쨍하니 개었다. 바람이 불고 체감온도마저 뚝 떨어진 주말 오후, 인근의 칼국수집에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들어왔다. 밥 짓는 것도 귀찮은 휴일 오후, 식당에는 가족 단위 외식객이 대부분이었다. 가리는 음식도 없지만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는 나는 음식 선택에 있어서도 때로는 애를 먹는다. 사는 게 만만치 않구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음식 선택 가지고 사는 문제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그렇지가 않다. 거의 매일 하루 한 끼 이상을 사 먹다 보면 음식 선택이 무슨 대학수능시험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우유부단해서 그런가?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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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지음 / 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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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이야기 산문집 <우리가 녹는 온도>를 읽다 보면 작가가 하루 종일 매만지던 생각의 조약돌을 독자에게 살며시 쥐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래 주물러 까맣게 손때가 묻은 애착인형처럼 여러번 지우고 다시 고쳤을 생각의 조약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작가의 생각들이 독자의 머릿속으로 오롯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과 작가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착각 속에 책을 읽는 시간은 그저 편안했다.

 

"모든 이별은 크고 작은 후유증을 남긴다. 그뒤로 나는 어떤 관계든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곁에는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 곁에서 마음을 푹 놓아버릴까봐, 마음을 푹 놔버리곤 부지불식간에 상대가 괜찮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될까봐 먼저 몸을 사리게 된 것이다." (p.43)

 

구성이 재미있는 책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 관한 10편의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각각의 이야기에 작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 이어진다.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작가가 직접 전해 들었거나 출판사를 통해 받은 실제 사연을 각색한 것으로 누군가는 만남을 누군가는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치 잘 다듬어진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연인, 부부, 모녀, 강아지와 아이 등 등장하는 인물이나 도시도 제각각이다. 소제목에 이어 '그들은,'으로 시작되는 실제 이야기와 '나는,'으로 시작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가슴께에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에, 어쩌면 꿈속에서 지금과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아무리 더워도 얼음이 들어간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작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붙들린 듯, 영원히 몸을 일으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p.122)

 

이제 막 만남을 시작하는 도시 뒤편의 청춘 남녀와 바쁘게 꾸려가던 결혼생활을 접고 곧 이별을 준비하는 중년 부부의 이야기 등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 그 언저리를 맴돈다. 사랑이 꼭 밝고 화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책 속 이야기에서 나는 이따금 가슴 저릿한 느낌을 받는다. '세상이 낙관보다는 비관이 어울리는 곳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아니냐'고 작가는 말한다.

 

추위와 어둠뿐인 인생에도 꼬마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소시민의 그닥 특별하지 않은 인생을, 아주 짧은 순간 빛나던 그들의 모습을 포착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어떤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때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즐겁고 편안했던 어느 순간은 기억조차 희미하기도 하다. 인생은 멈추지 않고 지나칠 때는 스스로 그 순간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완전히 녹지 않은 채 도심 길가 한편에 아무렇게나 쌓인 눈의 형상은 '한순간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것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한순간 아름다웠으나 한순간 깨끗하게 소멸하지는 못하는 것들. 구질구질하게 남겨졌다가 결국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들의 남루한 운명 말이다." (p.168)

 

시인도 아닌 소설가의 산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 나는 문득 생각한다. 작가가 한나절 공글렸을 생각의 조약돌을 내 손 안에서 살포시 쥐어 본다. 유난히 추웠던 올해 겨울, 누군가의 체온으로 얼었던 눈이 녹아내리듯 작가가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가 얼었던 독자의 마음을 녹인다. 많은 의미가 담긴 그들의 미소와 한줄기 눈물이 작가와 나에게,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그들에게 무한한 힘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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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웠던 한파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짐짓 여유가 묻어납니다. 드러난 뺨과 손등에 닿는 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이죠. 추위가 극성일 때만 하더라도 새벽 산행길에는 산행 내내 정적만 감돌뿐 인적은커녕 짐승의 움직임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전에 자주 뵙던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안부만 묻고 헤어졌건만 서로에 대한 반가움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현직에 있는 한 여성 검사의 방송 인터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추행 및 성폭행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듯합니다. 군대와 같은 상명하복의 검찰 조직에서 그와 같은 비리(가 아닌 범죄 행위가 맞겠지만)는 누군가의 용기 있는 제보나 증언이 아니고서는 결코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겠지요. 수년간에 걸친 지속적인 군대 내 성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간의 내막 일부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저 짧게 보도되는 방송 뉴스에 잠시 분노하다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금세 잊어먹고 마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런 까닭에 가해자는 견책 수준의 경징계만 받고 세간의 기억에서 잊히곤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종의 성폭행 방조범으로 지내왔던 셈이지요. 피해자가 오히려 미안해해야 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세태를 키워온 것은 바로 부끄러운 수컷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성매매는 범죄도 아니었던 시기에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마치 경범죄 정도의 가벼운 범죄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재수가 없는 사람만 처벌을 받곤 했었죠. 유교문화가 확고한 한국 사회에서 자의든 타의든 여성이 순결을 잃었다는 건 앞으로의 삶에서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피해자의 가족은 입을 닫은 채 쉬쉬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죠. 피해자가 오히려 범죄자보다 더한 형벌을 받는 셈이었죠. 저는 그런 시기에 대학을 다녔었고 방학 때마다 모 기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술을 전혀 못 마시는 까닭에 저는 사장의 술자리에 수시로 참석하기도 했었죠. 비서 겸 보호자 겸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펼쳐지던 난잡한 술자리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낮에 보았을 때는 그토록 점잖고 도덕적으로 보이던 사람이 술에 취하자마자 어쩌면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장을 통해 소개를 받았던 사람 중에 '저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술과 여자 앞에서 품위를 지켰던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남자이지만 저는 그때 이후 남자의 도덕성을 크게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수컷 문화일 따름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남성 위주의 유교문화가 굳건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 검사의 증언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용기를 내기까지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법적 처벌을 떠나서 한 사람의 인격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당사자들은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겠지요. 침팬지나 원숭이보다도 못한 인격의 소유자가 교회에서 백날 회개를 한들 하느님이 응답하실 리 없습니다. 그런 하느님이라면 저는 절대 믿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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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2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3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