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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지음 / 달 / 2017년 12월
평점 :
정이현의 이야기 산문집 <우리가 녹는 온도>를 읽다 보면 작가가 하루 종일 매만지던 생각의 조약돌을 독자에게 살며시 쥐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래 주물러 까맣게 손때가 묻은 애착인형처럼 여러번 지우고 다시 고쳤을 생각의 조약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작가의 생각들이 독자의 머릿속으로 오롯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과 작가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착각 속에 책을 읽는 시간은 그저 편안했다.
"모든 이별은 크고 작은 후유증을 남긴다. 그뒤로 나는 어떤 관계든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곁에는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 곁에서 마음을 푹 놓아버릴까봐, 마음을 푹 놔버리곤 부지불식간에 상대가 괜찮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될까봐 먼저 몸을 사리게 된 것이다." (p.43)
구성이 재미있는 책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 관한 10편의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각각의 이야기에 작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 이어진다.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작가가 직접 전해 들었거나 출판사를 통해 받은 실제 사연을 각색한 것으로 누군가는 만남을 누군가는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치 잘 다듬어진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연인, 부부, 모녀, 강아지와 아이 등 등장하는 인물이나 도시도 제각각이다. 소제목에 이어 '그들은,'으로 시작되는 실제 이야기와 '나는,'으로 시작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가슴께에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에, 어쩌면 꿈속에서 지금과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아무리 더워도 얼음이 들어간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작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붙들린 듯, 영원히 몸을 일으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p.122)
이제 막 만남을 시작하는 도시 뒤편의 청춘 남녀와 바쁘게 꾸려가던 결혼생활을 접고 곧 이별을 준비하는 중년 부부의 이야기 등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 그 언저리를 맴돈다. 사랑이 꼭 밝고 화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책 속 이야기에서 나는 이따금 가슴 저릿한 느낌을 받는다. '세상이 낙관보다는 비관이 어울리는 곳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아니냐'고 작가는 말한다.
추위와 어둠뿐인 인생에도 꼬마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소시민의 그닥 특별하지 않은 인생을, 아주 짧은 순간 빛나던 그들의 모습을 포착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어떤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때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즐겁고 편안했던 어느 순간은 기억조차 희미하기도 하다. 인생은 멈추지 않고 지나칠 때는 스스로 그 순간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완전히 녹지 않은 채 도심 길가 한편에 아무렇게나 쌓인 눈의 형상은 '한순간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것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한순간 아름다웠으나 한순간 깨끗하게 소멸하지는 못하는 것들. 구질구질하게 남겨졌다가 결국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들의 남루한 운명 말이다." (p.168)
시인도 아닌 소설가의 산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 나는 문득 생각한다. 작가가 한나절 공글렸을 생각의 조약돌을 내 손 안에서 살포시 쥐어 본다. 유난히 추웠던 올해 겨울, 누군가의 체온으로 얼었던 눈이 녹아내리듯 작가가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가 얼었던 독자의 마음을 녹인다. 많은 의미가 담긴 그들의 미소와 한줄기 눈물이 작가와 나에게,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그들에게 무한한 힘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