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웠던 한파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짐짓 여유가 묻어납니다. 드러난 뺨과 손등에 닿는 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이죠. 추위가 극성일 때만 하더라도 새벽 산행길에는 산행 내내 정적만 감돌뿐 인적은커녕 짐승의 움직임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전에 자주 뵙던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안부만 묻고 헤어졌건만 서로에 대한 반가움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현직에 있는 한 여성 검사의 방송 인터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추행 및 성폭행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듯합니다. 군대와 같은 상명하복의 검찰 조직에서 그와 같은 비리(가 아닌 범죄 행위가 맞겠지만)는 누군가의 용기 있는 제보나 증언이 아니고서는 결코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겠지요. 수년간에 걸친 지속적인 군대 내 성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간의 내막 일부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저 짧게 보도되는 방송 뉴스에 잠시 분노하다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금세 잊어먹고 마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런 까닭에 가해자는 견책 수준의 경징계만 받고 세간의 기억에서 잊히곤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종의 성폭행 방조범으로 지내왔던 셈이지요. 피해자가 오히려 미안해해야 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세태를 키워온 것은 바로 부끄러운 수컷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성매매는 범죄도 아니었던 시기에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마치 경범죄 정도의 가벼운 범죄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재수가 없는 사람만 처벌을 받곤 했었죠. 유교문화가 확고한 한국 사회에서 자의든 타의든 여성이 순결을 잃었다는 건 앞으로의 삶에서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피해자의 가족은 입을 닫은 채 쉬쉬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죠. 피해자가 오히려 범죄자보다 더한 형벌을 받는 셈이었죠. 저는 그런 시기에 대학을 다녔었고 방학 때마다 모 기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술을 전혀 못 마시는 까닭에 저는 사장의 술자리에 수시로 참석하기도 했었죠. 비서 겸 보호자 겸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펼쳐지던 난잡한 술자리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낮에 보았을 때는 그토록 점잖고 도덕적으로 보이던 사람이 술에 취하자마자 어쩌면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장을 통해 소개를 받았던 사람 중에 '저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술과 여자 앞에서 품위를 지켰던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남자이지만 저는 그때 이후 남자의 도덕성을 크게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수컷 문화일 따름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남성 위주의 유교문화가 굳건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 검사의 증언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용기를 내기까지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법적 처벌을 떠나서 한 사람의 인격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당사자들은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겠지요. 침팬지나 원숭이보다도 못한 인격의 소유자가 교회에서 백날 회개를 한들 하느님이 응답하실 리 없습니다. 그런 하느님이라면 저는 절대 믿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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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2 0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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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 15: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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