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사는 법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정세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야리야리하고 마른 체형의 아내는 결혼 전부터 예민한 장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식사를 할 때 남들처럼 밥숟가락으로 밥을 푹푹 퍼먹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 듯 보이기 일쑤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내의 그런 모습이 어려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다며 샐쭉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차는 까닭에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이는 명절이면 떠나기 전부터 한걱정을 하곤 했다. 반면에 나는 일찍부터 부모 곁을 떠나 객지로 떠돌았던 탓인지 무엇이건 주는 대로 먹어도 불편하거나 탈이 나는 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집에서도 내 집처럼 잘만 잤다.

 

아내는 이런 나를 어쩜 그렇게 무디고 둔하냐며 타박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명절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는 일가친척을 비롯하여 이따금 하는 가족 여행 등 남들에게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아내에게는 고문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면에서 털털하거나 둔감한 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책임도 본인이 져왔던 나로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되는 잔소리가 영 달갑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만큼 무덤덤할 수 없었다. 그게 비록 내게 유익한 조언일지라도 말이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상사, 나를 험담하는 동료, 퇴근 후 쓸데없는 말로 지치게 하는 친구 등 현대인의 일상은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둔감해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의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한다면 능력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환경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둔감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제가 이 책에서 말하는 둔감력이란 긴긴 인생을 살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일이나 관계에 실패해서 상심했을 때,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나아가는 그런 강한 힘을 뜻합니다. 그저 몸과 마음이 둔한 사람에게 "둔감력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p.5)

 

예민함이란 어쩌면 낯섦에 대한 경계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냥을 위주로 하던 원시시대에는 예민함이 곧 자신의 생명과 사냥의 성공을 담보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예민함은 낡은 유산으로 전락한 느낌이 없지 않다. 현대사회에서는 예민함보다는 타인과의 소통과 원만한 관계 유지가 개인의 건강과 성공을 담보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어떤 나라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나아가 현지의 어떤 음식을 먹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런 환경 적응력만큼 멋지고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밑바탕에는 반드시 둔감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좋은 의미의 둔감함이 있기에 어떤 환경,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죠." (p.245)

 

한때 외과 의사로 근무했을 만큼 우리 몸에 대한 이해가 깊은 저자는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어느 정도 둔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언제든 잘 자고 잘 일어나는 수면력도, 오감 등의 다양한 감각 기관의 둔감하다는 것도, 똑같이 상한 음식을 먹고도 어떤 사람은 배탈이 나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위와 장이 둔감하다는 것도 모두 개인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 유연하게 적응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원천도, 성공의 전제 조건도 둔감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혼초 아내와의 의견 충돌이 잦았던 것도 돌이켜 보면 서로의 예민함이 발단이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 예의와 격식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아내는 나의 취향이나 습관 하나하나에 사사건건 개입을 했고, 잔소리라고는 모르고 자랐던 나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컨대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할 때는 항상 컵과 컵받침을 함께 내야 하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식이었다. 나는 이따금 손님에게 머그컵에 따른 음료 잔만 줄 때도 있고 외출에서 돌아와서도 피곤하면 손 씻기를 거르거나 종종 잊기도 했다. 아내의 그런 습관이 좋다는 건 알지만 인생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 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정말 철이 없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결혼은 기나긴 인내의 여정입니다. "결혼해서 행복하다." 또는 "이 사람과 결혼하길 참 잘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기나긴 인내 끝에 빛나는 열매를 거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이면에는 멋진 둔감력이 숨어 있습니다. 둔감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p.146)

 

아내는 지금 아프다. 그렇게 된 원인이 모두 느긋하지 못한 내 성격 탓인 것만 같아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아픈 아내의 잔소리가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오히려 반갑다. 내게 잔소리를 할 만큼 아내는 기운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갈 때쯤이면 나도 어쩌면 아내의 잔소리를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둔감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날을 꿈꾸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타맨
슈테판 보너.안네 바이스 지음, 함미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가가 되기를 희망했다기보다 '나도 소설이나 써볼까' 하는 헛된 상상을 했던 적이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 상상은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그들이 지나온 삶에 대해 평균적인 호기심 이상으로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소설가가 되기 위한 지극히 소박한 가능성의 일단을 발견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대강의 이야기로만 듣고 이야기를 아주 찰지고 실감 나게 풀어내는 일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쉽게 깨우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거나 소설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숫제 접어버렸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기에.

 

소설을 써보겠다는 상상이 현실화되지 못했던 데에는 그것 외에도 다른 원인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듣고 배운 후 나도 또한 그 말을 '정언명령'으로 확고하게 가슴에 새겼던지라 성인이 될 때까지 연애 경험도 전무했고, 여성의 심리나 반응에 대해서도 일체 아는 바가 없었다.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약점이 또 있을까. 나는 그야말로 소설가로서는 구제불능이었다. 물론 소설가가 돼보겠다는 한때의 꿈도,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소설 형식을 띤 잡문을 시험 삼아 써본 적이 있다는 경험도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나만의 개인적인 흑역사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슈테판 보너와 안네 바이스가 쓴 <베타맨>을 읽으며 나의 과거 경험이 떠올랐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안네 바이스처럼 걸출한 재능의 여자 친구가 곁에 있었더라면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슈테판 보너와 안네 바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남자와 여자의 시각에서 교차하며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독특한 구성의 소설이기에 나도 한번 소설을 써볼까 생각했던 과거에 나의 단점을 보완해 줄 누군가가 옆에 있었더라면 나도 또한 이런 구성의 소설은 충분히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 또한 실없는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이 소설은 두 명의 남녀 작가가 각각의 남녀 주인공을 맡아 각자의 입장에서 쓰고 있다. 한 출판사에서 근무하게 된 안네와 슈테판. 재능과 성격에서 똑 부러지는 알파걸 안네는 책임감도 경제적 능력도 없었던 전 남자 친구 올리버와 막 헤어진 상태였다. 그 후 안네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산드라와 셰어하우스를 하며 '진짜 남자'를 찾아 헤매게 된다. 반면에 슈테판은 여자 친구 마야가 임신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예비 장인어른은 슈테판을 영 못 미더워하고 마야의 전 남자 친구 토르스텐마저 슈테판의 심기를 괴롭힌다.

 

"나는 진하게 커피를 내려서 발코니에 나가 앉는다. 카페인과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 좀 더 정신이 맑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안고 말이다. 만약 남자아이라면, 내가 온전히 기뻐할 수 있을까? 어젯밤 한 차례 재앙을 겪고 나자 헬무트가 나에게 도움을 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위해 아버지를 대신해줄 만한 인물은 그밖에 없다."    (p.155)

 

안네와 슈테판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진짜 아빠'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테판과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진짜 남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안네의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을 짓게 했다. 안네는 산드라로부터 여러 남자들을 소개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들일 뿐, 안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남자에 대한 거부감만 더한다. 한편 슈테판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생부를 찾아가게 된다.

 

"지난 몇 개월은 격동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에 감사한다. 내가 뭔가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즉 세상에 완벽한 남자는 없다는 것. 지금부터 내 일은 내가 헤쳐 나갈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할 때 일도 놀라우리만치 순조롭게 진행된다."    (p.494)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달리 말하자면 남자는 여자에 비해 지극히 단순하거나 철이 없다는 얘기가 될 터였다. 내가 살아보니 정말 그렇다. 나이가 들건 그렇지 않건 남자는 어쩔 수 없는 남자일 뿐이다. 똑똑한 여자가 결혼이 늦은 이유도 생각해 보면 그런 남자들 속에서 특별한 남자를 찾느라 헛고생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 서경식 교수와 타와다 요오꼬의 편지를 엮은 <경계에서 춤추다>가 생각나기도 했던 이 책은 위트와 유머가 돋보이는 소설로서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그 구분은 갈수록 더 모호해지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과 나 사이 - 너무 멀어서 외롭지 않고 너무 가까워서 상처 입지 않는 거리를 찾는 법
김혜남 지음 / 메이븐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던 건 재작년 말부터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내는 이따금 울적해 보이기는 했어도 환자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런 까닭에 나는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중학생 아들과 아내를 장모님의 손에 맡겨둔 채 안심했었다. 장모님 혼자 아내의 약과 식사를 챙기고 아들을 돌보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내의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청소며 설거지 등 집안일도 곧잘 돕는지라 큰 죄책감 없이 아내를 맡겼었다. 그러나 아내의 병세도 병세지만 그 기간이 1년을 넘어서자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었다.

 

아내든 아들이든 둘 중 한 명을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장모님마저 앓아누우실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우미 아줌마를 쓸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고, 아내와 떨어져 주말부부로 지내던 나로서는 손에 쥐어진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나는 평일에 머무는 지방의 숙소로 아내를 데려오게 되었다. 아내도 나도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들을 장모님 손에 맡기는 아내나 딸을 떠나보내는 장모님이나 걱정과 고민은 컸다. 아내의 간병을 책임져야 하는 나의 어깨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를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아내의 식사를 챙기고 간단한 집안일을 하는 것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으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내의 간병을 혼자서 도맡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물론 긴급한 용무로 만나야 할 사람은 어찌어찌 시간을 내기는 하지만 친목 차원의 가벼운 만남은 웬만하면 불참을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지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김혜남 정신과 전문의가 쓴 <당신과 나 사이>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고민을 친절하게 다독인다. 그렇다고 고민을 완전히 해결하고 꽉 막힌 응어리를 툭툭 털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하는 게 좋은지, 마냥 가깝게만 여기던 가족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는 게 좋은지 전문가로부터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취하게 되는 이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까운 사이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가 무엇을 하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무관심해지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사랑하는 그가 정말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말려야 한다. 그에게 왜 그 길로 가면 안 되는지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최종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곁에는 늘 내가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거리 두기다." (p.67)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그의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인간의 공간 사용법에 대해 4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두기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거리는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각각의 관계에 있어 구체적인 거리를 수치로 제시했다. 먼저 밀접한 거리(Intimate Distance Zone)는 0~46cm, 그다음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Zone)는 46cm~1.2m,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Zone)는 1.2m~3.6m,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 Zone)는 3.6m~7.5m라고 한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위의 4가지 거리 중 밀접한 거리와 개인적 거리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안에 있으며, 그 관계를 제대로 풀어 가지 못하면 나머지 관계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p.65)

 

아내를 돌보면서 나의 일상은 많은 게 바뀌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일정 부분 소원해지기도 했지만 아내와 공유하는 시간이 늘고 그동안 몰랐던, 또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던 아내의 바람이나 생각들을 곰곰 되씹어 볼 수도 있었다. 본디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아내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어주고 떨어져 있는 아들과의 통화도 늘었다.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자신이라고 떠들지만, 실제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 쓰느라 그런 자신을 방치하기 일쑤다." (p132)

 

우리는 이따금 현재의 고통을 잊기 위해 '미래'라는 허상을 소환하곤 한다. '아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과장으로 승진만 하면...', '집만 사면...' 등과 같이 우리가 소환하는 허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것이 비록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사실을 때로는 잊게 된다. 더더구나 SNS의 과다한 사용은 허상과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그러니 SNS를 하되, 그것을 하느라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을 망치지 마라. 음식이 다 식어 가는데도 사진을 올려야 하니까 참으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멋진 노을을 보면서 그것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에게 빨리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닦달한다면 그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당신이 지금 집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p.262)

 

어린이날이었던 어제는 아들과 함께 마트에 갔었다. 카트를 끌며 내 뒤를 따르던 아들은 며칠 전에 본 중간고사 결과에 대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내가 아프기 전에는 결코 없었던 일이다. 나는 아들의 소식을 주로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을 뿐 아들로부터 직접 듣지는 못했다. 시험을 본 6과목 중 4과목이 만점인 줄 알았는데 수학과 과학만 백점이었고 나머지 과목은 한두 문제씩 틀려서 지난해 평균보다는 조금 떨어진 96.3이라며 미안해했다. 어쩌면 아들은 아픈 엄마를 실망시킨 게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몰라서 틀린 게 아니라면 괜찮다고 내가 말하자 아들은 밝게 웃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파킨슨병 때문에 생각지도 않게 의사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나는 그로 인해 얻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사람을 얻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비로소 깨닫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은 중요하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 있으면 신기하게도 사람이 그리워진다." (p.309)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아들은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를 읽고 나는 김혜남의 <당신과 나 사이>를 읽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는 '미래'라는 허상에 갇혀 평생을 허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차례 봄비가 지나간 숲은 초록으로 무성했습니다. 머리가 시원해질 정도로 새벽 숲의 기온은 적당히 낮았고 황사 마스크를 벗고 깊게 들이마시는 숨은 달았습니다. 미세먼지 가득했던 어제의 공기는 멀리 사라진 듯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여유롭고 평화로웠습니다. 비 온 뒤에 마시는 무결점의 공기는 아닐지라도 폐부 깊숙이 퍼지는 짜릿한 숨결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습니다. 어쩌면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있었던 남북 정상의 만남과 판문점 선언으로 인해 한반도의 공기는 며칠 전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듯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은 비단 나만의 감정은 아니겠지요.

 

세계인의 관심이 온통 한반도에 집중된 것도 오랜만인 듯합니다. 지구 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인 남한과 북한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쟁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고,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였던, 평화와는 거리가 아주 먼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정상이 손을 잡고 종전을 선언했을 때 뭉클한 감동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있더군요. 그것도 뉴스가 닿지 않는 먼 오지 국가의 국민도 아니고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 말이죠. 정말 미친 놈들이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두 손을 잡는 순간 다른 나라의 기자들도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았습니다. 왜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들의 감정은 다들 비슷비슷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민 중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요. 남북 정상회담이 위장 쇼라는 둥 어처구니가 없다는 둥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과는 상당히 먼, 소시오패스적인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습니다.

 

이팝나무 가로수는 눈이 내린 듯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나는 어제 그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차갑고 냉랭한 바람만 불던 한반도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낯선 풍경을 TV로, 인터넷으로, 라디오로 보고 또 보았습니다. 입으로는 수없이 말해졌을 '평화'가 가슴으로 이해되는 건 아마도 처음이지 싶습니다. 이 싫지 않은 낯섦이 한반도 전체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낯섦, 나는 그것을 지금도 여전히 즐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05-01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6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살짝 금이 간 접시도 금세 눈에 띌 듯한 도시, 최신 유행과 섬세함의 도시, 뉴욕이다. 그러나 패션이든 음식이든 최신이 아니라면 뉴욕에서는 진부한 게 되고 만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좋은 소재로 무장하더라도 문체와 구성이 작가의 개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뉴욕은 피하는 게 좋다. 독자는 금세 싫증을 내고 말 테니까 말이다.

 

제시카 톰(Jessica Tom)의 소설 <단지 뉴욕의 맛>은 제목만큼이나 작가의 톡톡 튀는 개성을 잘 담아낸 소설이다. 작가는 미식업계의 이면에 숨겨진 푸드 칼럼니스트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야망과 보편적인 욕망을 잘 풀어냄으로써 '푸드릿(Food Lit)'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의 주인공인 티아 먼로는 예일대를 졸업한 뒤 뉴욕대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전설적인 음식 작가 헬렌 란스키 밑에서 인턴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최고의 푸드 칼럼니스트로 성장하고자 했던 그녀의 목표는 '뉴욕타임스'의 유명 레스토랑 칼럼니스트 마이클 잘츠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그런 재능을 나누지 않고 산다는 건 너무나 큰 낭비죠. 안 그래요, 티아? 당신은 대학 때 스타였잖아요. <뉴욕타임스> 푸드 섹션 1면에 실리기도 하고. 하지만 뉴욕에서는 어영부영하다가 뒤처지기 십상이야. 당신처럼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이 수천만 명은 되니까. 그중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지.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p.132)

 

헬렌 란스키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했던 티아는 불행하게도 메디슨 파크 타번이라는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고객 휴대품 보관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어느 날 마이클 잘츠가 레스토랑으로 찾아와 자신이 미각을 잃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대신해 뉴욕 레스토랑의 음식 맛을 보고 리뷰를 쓰는 '푸드 고스트 라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가 미각을 잃었다는 것과 티아를 고스트 라이터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않는다면 무제한 명품 쇼핑과 미남 셰프와의 로맨스, 뉴욕 레스토랑의 생사여탈권 등을 제공하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덧붙인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꽂히는 걸 느꼈다. 머리는 나를 대담하고 건방져 보이게 해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옷까지 명품으로 빼입었다. 내 스틸레토는 조약돌과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경쾌한 소리를 냈다. 힐이 인도 사이에 끼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한 켤레 더 사면되니까. 아니 열 켤레?"    (p.348)

 

화려한 일상에 익숙해질수록 순수한 열정에 불타던 티아 본연의 모습은 점점 빛을 잃었다. 남자 친구 엘리엇과의 데이트도 시큰둥해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떠는 일도, 대학원 생활도 그저 멀게만 느껴진다. 모든 게 티아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갈 때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인 파스칼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불같은 사랑에 빠진 티아. 그러나 그 사랑도 진짜가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마이클 잘츠 역시 그녀를 철저히 속여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몇 년 동안 헬렌을 흠모했고 그녀가 쓴 모든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녀의 글의 리듬과 뉘앙스를 알았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귀로 듣고 이야기는 마음으로 들었다. 그녀는 내 삶에 가장 깊은 방식으로 들어와 내가 태어난 나라나 내가 쓰는 언어처럼 내 모든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다. 내가 협박을 당해 그리 되었든 아니든 내가 마이클 잘츠의 심부름꾼으로 알려지고 말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그녀와 일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이미 불타버린 것이다."    (p.532)

 

나락으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티아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때로는 나만의 것으로 지켜야 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아주 잔혹한 면이 있어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할 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매섭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 호된 경험을 거치지 않으면 제 스스로 깨닫거나 미리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 된 입장에서 너무 비정한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한번뿐인 인생, 불쌍한 우리 인간에게 조금쯤 관대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바람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향한 무의미한 어리광일 수도 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