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살짝 금이 간 접시도 금세 눈에 띌 듯한 도시, 최신 유행과 섬세함의 도시, 뉴욕이다. 그러나 패션이든 음식이든 최신이 아니라면 뉴욕에서는 진부한 게 되고 만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좋은 소재로 무장하더라도 문체와 구성이 작가의 개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뉴욕은 피하는 게 좋다. 독자는 금세 싫증을 내고 말 테니까 말이다.

 

제시카 톰(Jessica Tom)의 소설 <단지 뉴욕의 맛>은 제목만큼이나 작가의 톡톡 튀는 개성을 잘 담아낸 소설이다. 작가는 미식업계의 이면에 숨겨진 푸드 칼럼니스트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야망과 보편적인 욕망을 잘 풀어냄으로써 '푸드릿(Food Lit)'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의 주인공인 티아 먼로는 예일대를 졸업한 뒤 뉴욕대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전설적인 음식 작가 헬렌 란스키 밑에서 인턴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최고의 푸드 칼럼니스트로 성장하고자 했던 그녀의 목표는 '뉴욕타임스'의 유명 레스토랑 칼럼니스트 마이클 잘츠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그런 재능을 나누지 않고 산다는 건 너무나 큰 낭비죠. 안 그래요, 티아? 당신은 대학 때 스타였잖아요. <뉴욕타임스> 푸드 섹션 1면에 실리기도 하고. 하지만 뉴욕에서는 어영부영하다가 뒤처지기 십상이야. 당신처럼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이 수천만 명은 되니까. 그중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지.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p.132)

 

헬렌 란스키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했던 티아는 불행하게도 메디슨 파크 타번이라는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고객 휴대품 보관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어느 날 마이클 잘츠가 레스토랑으로 찾아와 자신이 미각을 잃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대신해 뉴욕 레스토랑의 음식 맛을 보고 리뷰를 쓰는 '푸드 고스트 라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가 미각을 잃었다는 것과 티아를 고스트 라이터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않는다면 무제한 명품 쇼핑과 미남 셰프와의 로맨스, 뉴욕 레스토랑의 생사여탈권 등을 제공하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덧붙인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꽂히는 걸 느꼈다. 머리는 나를 대담하고 건방져 보이게 해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옷까지 명품으로 빼입었다. 내 스틸레토는 조약돌과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경쾌한 소리를 냈다. 힐이 인도 사이에 끼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한 켤레 더 사면되니까. 아니 열 켤레?"    (p.348)

 

화려한 일상에 익숙해질수록 순수한 열정에 불타던 티아 본연의 모습은 점점 빛을 잃었다. 남자 친구 엘리엇과의 데이트도 시큰둥해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떠는 일도, 대학원 생활도 그저 멀게만 느껴진다. 모든 게 티아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갈 때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인 파스칼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불같은 사랑에 빠진 티아. 그러나 그 사랑도 진짜가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마이클 잘츠 역시 그녀를 철저히 속여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몇 년 동안 헬렌을 흠모했고 그녀가 쓴 모든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녀의 글의 리듬과 뉘앙스를 알았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귀로 듣고 이야기는 마음으로 들었다. 그녀는 내 삶에 가장 깊은 방식으로 들어와 내가 태어난 나라나 내가 쓰는 언어처럼 내 모든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다. 내가 협박을 당해 그리 되었든 아니든 내가 마이클 잘츠의 심부름꾼으로 알려지고 말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그녀와 일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이미 불타버린 것이다."    (p.532)

 

나락으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티아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때로는 나만의 것으로 지켜야 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아주 잔혹한 면이 있어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할 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매섭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 호된 경험을 거치지 않으면 제 스스로 깨닫거나 미리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 된 입장에서 너무 비정한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한번뿐인 인생, 불쌍한 우리 인간에게 조금쯤 관대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바람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향한 무의미한 어리광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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