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사이 - 너무 멀어서 외롭지 않고 너무 가까워서 상처 입지 않는 거리를 찾는 법
김혜남 지음 / 메이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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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던 건 재작년 말부터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내는 이따금 울적해 보이기는 했어도 환자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런 까닭에 나는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중학생 아들과 아내를 장모님의 손에 맡겨둔 채 안심했었다. 장모님 혼자 아내의 약과 식사를 챙기고 아들을 돌보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내의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청소며 설거지 등 집안일도 곧잘 돕는지라 큰 죄책감 없이 아내를 맡겼었다. 그러나 아내의 병세도 병세지만 그 기간이 1년을 넘어서자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었다.

 

아내든 아들이든 둘 중 한 명을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장모님마저 앓아누우실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우미 아줌마를 쓸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고, 아내와 떨어져 주말부부로 지내던 나로서는 손에 쥐어진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나는 평일에 머무는 지방의 숙소로 아내를 데려오게 되었다. 아내도 나도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들을 장모님 손에 맡기는 아내나 딸을 떠나보내는 장모님이나 걱정과 고민은 컸다. 아내의 간병을 책임져야 하는 나의 어깨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를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아내의 식사를 챙기고 간단한 집안일을 하는 것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으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내의 간병을 혼자서 도맡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물론 긴급한 용무로 만나야 할 사람은 어찌어찌 시간을 내기는 하지만 친목 차원의 가벼운 만남은 웬만하면 불참을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지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김혜남 정신과 전문의가 쓴 <당신과 나 사이>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고민을 친절하게 다독인다. 그렇다고 고민을 완전히 해결하고 꽉 막힌 응어리를 툭툭 털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하는 게 좋은지, 마냥 가깝게만 여기던 가족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는 게 좋은지 전문가로부터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취하게 되는 이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까운 사이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가 무엇을 하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무관심해지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사랑하는 그가 정말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말려야 한다. 그에게 왜 그 길로 가면 안 되는지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최종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곁에는 늘 내가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거리 두기다." (p.67)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그의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인간의 공간 사용법에 대해 4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두기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거리는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각각의 관계에 있어 구체적인 거리를 수치로 제시했다. 먼저 밀접한 거리(Intimate Distance Zone)는 0~46cm, 그다음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Zone)는 46cm~1.2m,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Zone)는 1.2m~3.6m,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 Zone)는 3.6m~7.5m라고 한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위의 4가지 거리 중 밀접한 거리와 개인적 거리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안에 있으며, 그 관계를 제대로 풀어 가지 못하면 나머지 관계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p.65)

 

아내를 돌보면서 나의 일상은 많은 게 바뀌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일정 부분 소원해지기도 했지만 아내와 공유하는 시간이 늘고 그동안 몰랐던, 또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던 아내의 바람이나 생각들을 곰곰 되씹어 볼 수도 있었다. 본디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아내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어주고 떨어져 있는 아들과의 통화도 늘었다.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자신이라고 떠들지만, 실제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 쓰느라 그런 자신을 방치하기 일쑤다." (p132)

 

우리는 이따금 현재의 고통을 잊기 위해 '미래'라는 허상을 소환하곤 한다. '아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과장으로 승진만 하면...', '집만 사면...' 등과 같이 우리가 소환하는 허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것이 비록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사실을 때로는 잊게 된다. 더더구나 SNS의 과다한 사용은 허상과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그러니 SNS를 하되, 그것을 하느라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을 망치지 마라. 음식이 다 식어 가는데도 사진을 올려야 하니까 참으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멋진 노을을 보면서 그것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에게 빨리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닦달한다면 그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당신이 지금 집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p.262)

 

어린이날이었던 어제는 아들과 함께 마트에 갔었다. 카트를 끌며 내 뒤를 따르던 아들은 며칠 전에 본 중간고사 결과에 대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내가 아프기 전에는 결코 없었던 일이다. 나는 아들의 소식을 주로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을 뿐 아들로부터 직접 듣지는 못했다. 시험을 본 6과목 중 4과목이 만점인 줄 알았는데 수학과 과학만 백점이었고 나머지 과목은 한두 문제씩 틀려서 지난해 평균보다는 조금 떨어진 96.3이라며 미안해했다. 어쩌면 아들은 아픈 엄마를 실망시킨 게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몰라서 틀린 게 아니라면 괜찮다고 내가 말하자 아들은 밝게 웃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파킨슨병 때문에 생각지도 않게 의사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나는 그로 인해 얻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사람을 얻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비로소 깨닫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은 중요하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 있으면 신기하게도 사람이 그리워진다." (p.309)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아들은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를 읽고 나는 김혜남의 <당신과 나 사이>를 읽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는 '미래'라는 허상에 갇혀 평생을 허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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