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사는 법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정세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야리야리하고 마른 체형의 아내는 결혼 전부터 예민한 장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식사를 할 때 남들처럼 밥숟가락으로 밥을 푹푹 퍼먹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 듯 보이기 일쑤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내의 그런 모습이 어려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다며 샐쭉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차는 까닭에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이는 명절이면 떠나기 전부터 한걱정을 하곤 했다. 반면에 나는 일찍부터 부모 곁을 떠나 객지로 떠돌았던 탓인지 무엇이건 주는 대로 먹어도 불편하거나 탈이 나는 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집에서도 내 집처럼 잘만 잤다.

 

아내는 이런 나를 어쩜 그렇게 무디고 둔하냐며 타박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명절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는 일가친척을 비롯하여 이따금 하는 가족 여행 등 남들에게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아내에게는 고문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면에서 털털하거나 둔감한 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책임도 본인이 져왔던 나로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되는 잔소리가 영 달갑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만큼 무덤덤할 수 없었다. 그게 비록 내게 유익한 조언일지라도 말이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상사, 나를 험담하는 동료, 퇴근 후 쓸데없는 말로 지치게 하는 친구 등 현대인의 일상은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둔감해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의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한다면 능력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환경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둔감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제가 이 책에서 말하는 둔감력이란 긴긴 인생을 살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일이나 관계에 실패해서 상심했을 때,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나아가는 그런 강한 힘을 뜻합니다. 그저 몸과 마음이 둔한 사람에게 "둔감력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p.5)

 

예민함이란 어쩌면 낯섦에 대한 경계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냥을 위주로 하던 원시시대에는 예민함이 곧 자신의 생명과 사냥의 성공을 담보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예민함은 낡은 유산으로 전락한 느낌이 없지 않다. 현대사회에서는 예민함보다는 타인과의 소통과 원만한 관계 유지가 개인의 건강과 성공을 담보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어떤 나라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나아가 현지의 어떤 음식을 먹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런 환경 적응력만큼 멋지고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밑바탕에는 반드시 둔감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좋은 의미의 둔감함이 있기에 어떤 환경,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죠." (p.245)

 

한때 외과 의사로 근무했을 만큼 우리 몸에 대한 이해가 깊은 저자는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어느 정도 둔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언제든 잘 자고 잘 일어나는 수면력도, 오감 등의 다양한 감각 기관의 둔감하다는 것도, 똑같이 상한 음식을 먹고도 어떤 사람은 배탈이 나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위와 장이 둔감하다는 것도 모두 개인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 유연하게 적응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원천도, 성공의 전제 조건도 둔감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혼초 아내와의 의견 충돌이 잦았던 것도 돌이켜 보면 서로의 예민함이 발단이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 예의와 격식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아내는 나의 취향이나 습관 하나하나에 사사건건 개입을 했고, 잔소리라고는 모르고 자랐던 나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컨대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할 때는 항상 컵과 컵받침을 함께 내야 하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식이었다. 나는 이따금 손님에게 머그컵에 따른 음료 잔만 줄 때도 있고 외출에서 돌아와서도 피곤하면 손 씻기를 거르거나 종종 잊기도 했다. 아내의 그런 습관이 좋다는 건 알지만 인생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 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정말 철이 없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결혼은 기나긴 인내의 여정입니다. "결혼해서 행복하다." 또는 "이 사람과 결혼하길 참 잘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기나긴 인내 끝에 빛나는 열매를 거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이면에는 멋진 둔감력이 숨어 있습니다. 둔감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p.146)

 

아내는 지금 아프다. 그렇게 된 원인이 모두 느긋하지 못한 내 성격 탓인 것만 같아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아픈 아내의 잔소리가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오히려 반갑다. 내게 잔소리를 할 만큼 아내는 기운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갈 때쯤이면 나도 어쩌면 아내의 잔소리를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둔감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날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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