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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맨
슈테판 보너.안네 바이스 지음, 함미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2월
평점 :
한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가가 되기를 희망했다기보다 '나도 소설이나 써볼까' 하는 헛된 상상을 했던 적이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 상상은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그들이 지나온 삶에 대해 평균적인 호기심 이상으로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소설가가 되기 위한 지극히 소박한 가능성의 일단을 발견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대강의 이야기로만 듣고 이야기를 아주 찰지고 실감 나게 풀어내는 일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쉽게 깨우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거나 소설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숫제 접어버렸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기에.
소설을 써보겠다는 상상이 현실화되지 못했던 데에는 그것 외에도 다른 원인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듣고 배운 후 나도 또한 그 말을 '정언명령'으로 확고하게 가슴에 새겼던지라 성인이 될 때까지 연애 경험도 전무했고, 여성의 심리나 반응에 대해서도 일체 아는 바가 없었다.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약점이 또 있을까. 나는 그야말로 소설가로서는 구제불능이었다. 물론 소설가가 돼보겠다는 한때의 꿈도,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소설 형식을 띤 잡문을 시험 삼아 써본 적이 있다는 경험도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나만의 개인적인 흑역사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슈테판 보너와 안네 바이스가 쓴 <베타맨>을 읽으며 나의 과거 경험이 떠올랐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안네 바이스처럼 걸출한 재능의 여자 친구가 곁에 있었더라면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슈테판 보너와 안네 바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남자와 여자의 시각에서 교차하며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독특한 구성의 소설이기에 나도 한번 소설을 써볼까 생각했던 과거에 나의 단점을 보완해 줄 누군가가 옆에 있었더라면 나도 또한 이런 구성의 소설은 충분히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 또한 실없는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이 소설은 두 명의 남녀 작가가 각각의 남녀 주인공을 맡아 각자의 입장에서 쓰고 있다. 한 출판사에서 근무하게 된 안네와 슈테판. 재능과 성격에서 똑 부러지는 알파걸 안네는 책임감도 경제적 능력도 없었던 전 남자 친구 올리버와 막 헤어진 상태였다. 그 후 안네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산드라와 셰어하우스를 하며 '진짜 남자'를 찾아 헤매게 된다. 반면에 슈테판은 여자 친구 마야가 임신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예비 장인어른은 슈테판을 영 못 미더워하고 마야의 전 남자 친구 토르스텐마저 슈테판의 심기를 괴롭힌다.
"나는 진하게 커피를 내려서 발코니에 나가 앉는다. 카페인과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 좀 더 정신이 맑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안고 말이다. 만약 남자아이라면, 내가 온전히 기뻐할 수 있을까? 어젯밤 한 차례 재앙을 겪고 나자 헬무트가 나에게 도움을 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위해 아버지를 대신해줄 만한 인물은 그밖에 없다." (p.155)
안네와 슈테판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진짜 아빠'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테판과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진짜 남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안네의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을 짓게 했다. 안네는 산드라로부터 여러 남자들을 소개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들일 뿐, 안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남자에 대한 거부감만 더한다. 한편 슈테판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생부를 찾아가게 된다.
"지난 몇 개월은 격동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에 감사한다. 내가 뭔가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즉 세상에 완벽한 남자는 없다는 것. 지금부터 내 일은 내가 헤쳐 나갈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할 때 일도 놀라우리만치 순조롭게 진행된다." (p.494)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달리 말하자면 남자는 여자에 비해 지극히 단순하거나 철이 없다는 얘기가 될 터였다. 내가 살아보니 정말 그렇다. 나이가 들건 그렇지 않건 남자는 어쩔 수 없는 남자일 뿐이다. 똑똑한 여자가 결혼이 늦은 이유도 생각해 보면 그런 남자들 속에서 특별한 남자를 찾느라 헛고생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 서경식 교수와 타와다 요오꼬의 편지를 엮은 <경계에서 춤추다>가 생각나기도 했던 이 책은 위트와 유머가 돋보이는 소설로서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그 구분은 갈수록 더 모호해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