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기척도 없이 계절이 오고 또 간다. 도시에서 맞는 계절의 순환은 늘 그런 식이다. 덥다 싶으면 니도 모르게 차량 에어컨을 틀게 되고, 춥다 싶으면 히터를 틀기도 하고,우루루 떼를 지어 꽃놀이를 가기도 하고, 단풍놀이를 가기도 하면서 어름어름 계절을 가늠하는 것이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봄비가 잦았다. 그 덕분에 지독한 미세먼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었고, 이른 더위로부터 한 발 물러날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완전히 멎고 초여름 햇살이 강하게 쏟아졌다. 은사시나무의 여리고 둥근 잎들이 하늘하늘 흔들릴 때마다 투명한 햇살이 좁은 틈새를 비집고 새어 들었다.

 

오늘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날, 묘하게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첫 재판이 열렸다. 추도식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에 비하여 이명박 전 대통령의 법정 방청석은 그에 대한 미움을 반영한 듯 그야말로 휑뎅그렁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현실에서 내가 실감했던 건 따로 있었다. 교통위반 딱지를 끊기 위해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던 경찰관들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교통위반 단속을 하는 게 사고의 예방 차원이 아니라 마치 부족한 세수를 보충하기 위한 꼼수로 비쳤었는데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지도자 한 명 바뀌었을 뿐인데 나라 전체가 달라지는 걸 보면서 투표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9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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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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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생각나는 이름 하나가 있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그 이름은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그림자처럼 희미해지다가도 부지불식간에 튀어 오르곤 하는 이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사람의 이름을 나는 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의 판단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에 단지 귀동냥으로만 들었던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김창선이라고 했다. 1967년 9월 7일 충남 청양의 구봉 광산에서 근무했던 그는 불의의 매몰 사고를 당했고 갱에 갇힌 지 15일 8시간 35분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구조 기술이나 장비가 신통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무사 구조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매체는 구조 현장에 집결했고, 대통령을 비롯한 온 국민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고 했다. 최장의 매몰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던 그의 사고와 구조 과정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덧붙여지고 크게 부풀려졌던 그의 이야기는 광산촌 주민들의 영웅담이 되었다.

 

벨마 월리스가 쓴 <두 늙은 여자>는 내 어린 시절의 영웅으로 자리 잡았던 그 이름 '김창선'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성장했던 강원도의 광산촌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던 까닭에 불굴의 의지로 죽음을 이겨낸 '김창선'과 같은 무용담이 광부들의 가슴에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로 작용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김창선'을 되뇌면서 암울한 미래와 죽음의 공포를 어렵게 이겨냈을 터였다.

 

"그래 죽음이라는 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약점을 보이는 순간 우리를 움켜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말이야. 나는 당신과 내가 겪을 그 어떤 고통보다도 그런 죽음이 두려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우리 뭔가 해보고 죽자고!"    (p.45)

 

작가가 들려주는 '사'와 '칙디야크'의 이야기는 알래스카 인디언 부족에 전해오는 삶과 고난 극복의 무용담이다. 그것이 비록 시대를 특정할 수 있는 사실이든 아니든, 특정 문화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이야기든 아니든 굳이 따지고 배척할 필요는 없을 듯 보인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세월을 이겨낸 무겁고 단단한 교훈과 특별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책의 주인공인 '사'와 '칙디야크'는 부족의 젊은 사람들로부터 보살핌을 받던 한낱 연약한 노인이었다. 혹독한 추위가 몰려왔던 어느 해 겨울, 사냥조차 어려웠던 부족은 급기야 두 노인을 버려둔 채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와 '칙디야크'에게 남겨진 것은 '칙디야크'의 손자가 두고 간 손도끼와 딸이 남겨준 사슴 가죽끈 한 다발이 전부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는 '사'의 말에 '칙디야크'도 용기를 낸다.

 

"사는 자신 같은 사람, 짐승, 나아가 나무까지 압도하는 대지의 힘에 감탄했다. 그들 모두는 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지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 부주의하고 무가치한 생명에는 즉각 죽음이 닥칠 터였다."    (p.60)

 

사냥감이 풍부했던 옛 기억 속의 장소를 찾아 '사'와 '칙디야크'는 혹독한 추위와 싸우면서 이동을 계속한다. 젊은 사람들의 보살핌만 받아오던 그들이 혹독한 자연과 맞서 싸워나가는 과정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그러나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겨울을 이겨냈고, 봄이 오고 따뜻한 여름이 왔음에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식량과 땔감을 비축했다. 다시 겨울이 오고 견디기 어려운 추위가 그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칙디야크는 친구에게 다가가 한쪽 팔을 둘렀다. 그들은 강렬한 감동에 싸인 채 말없이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난날 친구, 가족과 더불어 그곳에서 행복했던 추억이 그들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이제는 자기네 부족에게 배신당하고 단둘이 이곳에 오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p.72)

 

1년 만에 부족을 이끌고 돌아온 족장은 두 노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을 내보낸다. 며칠을 헤매던 부족원들은 두 노인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많은 식량을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부족을 위해 '사'와 '칙디야크'는 자신들이 비축한 식량과 도구를 내어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 부족의 사람들이 '사'와 '칙디야크'의 거처를 오가면서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부족원들은 두 노인에게 진심을 담은 존경과 신뢰를 표한다. 그에 따라 '사'와 '칙디야크'의 경계심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마침내 '칙디야크'의 딸과 손자와의 상봉도 성사된다.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한다면, 마음은 친구를 필요로 하지."    (p.84)

 

책에서든 현실에서든 살다 보면 잊히지 않는 이름들이 하나 둘 생겨나곤 한다.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존 프란시스가 그렇고, <예언자>를 쓴 칼릴 지브란이 그렇고, 법정 스님이나 이해인 수녀님이 그렇다. 나와는 상관도 없을 듯한 닥터 노먼 베쑨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그렇기도 하다. 어쩌면 그런 잊히지 않는 이름들이 모여 나의 영혼을 이만큼 성장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름들과 함께 '사'와 '칙디야크'라는 낯선 이름이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처럼 서늘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어느 날이면 그런 낯선 이름을 우연히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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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의 현실을 접했던 건 대학에 진학한 후 같은 학과의 동기생을 통해서였다. 몇 번의 재녹화가 이루어졌는지 추정마저 불가능한, 낡은 비디오테이프의 흐릿한 화면 영상을 우리는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잔악한 살육의 장면을 흐릿한 영상으로 보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같은 영토 안에서, 자국의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자국민을 향한 살육의 장면을 국민들 대부분이 보지도, 알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했다. 언론통제가 얼마나 철저했던가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전쟁보다 더 끔찍했던 폭력과 살육의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는 헛구역질을 했다. 엄혹했던 군사정권하에서 '광주'는 잊힌 지명이자 기피해야 할 단어였다.

 

매년 반복되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볼 때마다 나는 대학 새내기 시절 과 동기의 자취방이 떠오르곤 한다. 누가 볼세라 방의 작은 창문마저 두꺼운 종이를 덕지덕지 붙이던 친구의 떨리던 손길. 영문도 모른 채 친구의 행동거지를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던 나. 재생되는 영상에 머리가 쭈뼛 섰던 친구와 나. 너무나 끔찍해서 눈을 뜨고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장면 장면들. 방 안에 떠돌던 분노와 공포.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자괴감.

 

오늘은 제38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이따금 비가 내렸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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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8-05-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 지인 중에 몇 분이 돌아 가셔서 아직도 심장이...

꼼쥐 2018-05-21 20:39   좋아요 0 | URL
아아,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합니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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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실연은 더없이 아픈 경험이다. 그 상처는 깊고, 치유의 시간은 길고 더디게 흐른다. 아무한테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뭉근하게 발효되는 동안 나의 시간과 외부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나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스스로의 감옥에 수감된다. 허기진 시간들이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아물 것 같지 않던 상처에도 조금씩 새살이 돋는다. 되살아난 의지가 푸른빛으로 단단해질 때까지 추억은 더러 잊히고 또 더러는 제 위치를 찾아 갈무리된다.

 

디제이 아오이의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에는 실연의 터널을 현명하게 통과하는 방법에 대한 알찬 글들이 실려 있다. 일본에서 35만 명의 SNS 구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저자의 명성에 걸맞게 헛된 위로나 무의미한 말잔치로 그치지 않고 홀로 남겨진 사람들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하는 실용적인 조언들로 가득하다.

 

"이별을 말한 사람이 되도록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상냥한 거짓말을 하는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배려랍시고 내뱉은 그 말은 오히려 상대를 상처에 오래 시달리게 만듭니다. 배려 깊은 거짓말보다 현실은 훨씬 혹독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진정 성숙한 이별 통보입니다. 헤어진 후에는 남남으로 돌아서는 게 우선이에요." (p.27)

 

실연의 상처에 오래 시달리는 까닭은 과거의 연인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놓지 못하는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실연에 봉착한 사람들은 대개 직전에 헤어진 연인이야말로 자신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최상의 연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 믿음이 어찌나 확고한지 새로운 연애 같은 건 다시는 하지 못할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마저 희미해질 때쯤이면 헤어진 연인의 진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실연의 괴로움에 문득 눈을 뜨는 경험은 누구나 할 텐데요. 그건 그의 현재 모습이 비로소 뚜렷이 보이는 때예요. 이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그가 아니라는 현실이요. 오늘을 살지 않으면 현재는 보이지 않아요. 과거에 살기를 멈춰야 드디어 현재에 눈뜰 수 있습니다." (p.111)

 

실연의 괴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쩌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지적 오류를 해결하는 인지행동치료에서 취하는 것처럼 거울을 보듯 가만히 지나간 시간들과 감정을 바라보고, 아픔을 소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저자는 권한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한다는 건 나의 감정을 타자화하는 일이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분히 불교적이기도 한 이 방법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연애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리고 혼자서도 잘 생활해나가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비로소 연애로부터 진정한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연애에서 나만의 자리를 찾지 못하면 자립적인 연애를 할 수 없어요. 상대방을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어졌다면 그 연애는 이미 끝난 겁니다." (p.191)

 

살아가는 한 사랑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마음과 마음이 만나 연인이 되고 진득하지 못한 마음들은 또 그렇게 이별을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이다. 그러나 이별을 통보하는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이나 실연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이별을 하고, 한동안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어느 날이면 또 툭툭 털고 일어나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어디 연애에만 국한된 일이랴. 큰 틀에서 보면 우리네 삶이 그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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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죽어감'은 엄연히 삶의 이쪽 편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이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들이 단지 죽음을 향해 조금씩 끌려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죽음의 정적 속으로 사라져버린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건 건강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싶다.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이어가는 환자를 면회할 때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종일 비가 내렸던 엊그제, 큰 수술을 앞둔 친척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그날 인터넷 기사에서 우연히 읽었던 기사는 '죽음'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104세의 호주 과학자인 제임스 구달 박사가 자신의 생을 마칠 권리를 찾아서 스위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신체의 노화로 더이상 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며 안락사를 택한 그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저승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고 느꼈다.

 

파키스탄의 소설가 모신 하미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사랑, 다정함, 경이로움, 기쁨 등을 경험한다. 우리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점은 우리의 연민의 근간을 형성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아무리 서로 출신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다들 똑같이 죽음을 겪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친근감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친근감이 더 낮아진 것이 아니다. 죽기 때문에 친근감이 더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은 강렬했다. 우리는 이 같은 소망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기계들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 기계들과 한 몸이 되고자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의 유한함을 없애기 위한 시도를 하다가 이제 우리 스스로를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위를 하는 가자 지구의 사람들을 향해 이스라엘의 군인들이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나 보다. 최강대국 미국을 등에 업었다는 이유로 21세기의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인면수심의 악마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전제는 종교나 이념, 애국심 등 그 모든 것에 앞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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