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죽어감'은 엄연히 삶의 이쪽 편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이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들이 단지 죽음을 향해 조금씩 끌려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죽음의 정적 속으로 사라져버린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건 건강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싶다.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이어가는 환자를 면회할 때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종일 비가 내렸던 엊그제, 큰 수술을 앞둔 친척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그날 인터넷 기사에서 우연히 읽었던 기사는 '죽음'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104세의 호주 과학자인 제임스 구달 박사가 자신의 생을 마칠 권리를 찾아서 스위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신체의 노화로 더이상 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며 안락사를 택한 그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저승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고 느꼈다.
파키스탄의 소설가 모신 하미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사랑, 다정함, 경이로움, 기쁨 등을 경험한다. 우리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점은 우리의 연민의 근간을 형성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아무리 서로 출신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다들 똑같이 죽음을 겪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친근감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친근감이 더 낮아진 것이 아니다. 죽기 때문에 친근감이 더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은 강렬했다. 우리는 이 같은 소망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기계들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 기계들과 한 몸이 되고자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의 유한함을 없애기 위한 시도를 하다가 이제 우리 스스로를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위를 하는 가자 지구의 사람들을 향해 이스라엘의 군인들이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나 보다. 최강대국 미국을 등에 업었다는 이유로 21세기의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인면수심의 악마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전제는 종교나 이념, 애국심 등 그 모든 것에 앞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