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의 현실을 접했던 건 대학에 진학한 후 같은 학과의 동기생을 통해서였다. 몇 번의 재녹화가 이루어졌는지 추정마저 불가능한, 낡은 비디오테이프의 흐릿한 화면 영상을 우리는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잔악한 살육의 장면을 흐릿한 영상으로 보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같은 영토 안에서, 자국의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자국민을 향한 살육의 장면을 국민들 대부분이 보지도, 알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했다. 언론통제가 얼마나 철저했던가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전쟁보다 더 끔찍했던 폭력과 살육의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는 헛구역질을 했다. 엄혹했던 군사정권하에서 '광주'는 잊힌 지명이자 기피해야 할 단어였다.

 

매년 반복되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볼 때마다 나는 대학 새내기 시절 과 동기의 자취방이 떠오르곤 한다. 누가 볼세라 방의 작은 창문마저 두꺼운 종이를 덕지덕지 붙이던 친구의 떨리던 손길. 영문도 모른 채 친구의 행동거지를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던 나. 재생되는 영상에 머리가 쭈뼛 섰던 친구와 나. 너무나 끔찍해서 눈을 뜨고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장면 장면들. 방 안에 떠돌던 분노와 공포.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자괴감.

 

오늘은 제38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이따금 비가 내렸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낭만인생 2018-05-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 지인 중에 몇 분이 돌아 가셔서 아직도 심장이...

꼼쥐 2018-05-21 20:39   좋아요 0 | URL
아아,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