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가 불과 10여 일 남짓하게 남았을 뿐인데 선거 열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분위기이다. 모름지기 선거라는 게 여러 후보자 중 누가 당선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일 때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는 법인데 이번 선거는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여당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듯 이따금 여당의 후보로 누가 나왔는지 거리에 내걸린 현수막에서 그들의 이름만 확인할 뿐 야당 후보는 숫제 관심조차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도 야당 후보로 누가 나왔는지 도통 관심이 없다. 심지어 줄곧 보수 성향의 후보에게 투표를 하여 왔던 사람조차 투표는 해서 뭐하냐며 6월 13일에 당일치기 여행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 몰고 온 최대의 공로자는 제1야당의 대표인 홍준표가 아닐까 싶다.

 

지난 선거만 하더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지금의 여당인 민주당이 득세를 하지는 못했다. 시장을 포함한 시의원 대부분이 지금 제1야당이 된 자유한국당 소속이었다. 그랬던 게 이렇게 급변할 줄이야. 상전벽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직접 보고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실 한 사람의 사상이나 이념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약속이나 한 듯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모두 진보주의 성향으로 바뀌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것이 상식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이념을 떠나서 누군가의 선동과 잘못된 정보를 통하여 눈과 귀가 가려졌던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인터넷과 SNS라는 통제불능의 매체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텔레비전과 신문 매체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고 권력의 승계는 언론 통제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양한 매체에 의해 전달되는 다양한 정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는가는 상식의 문제일 뿐이지 이념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야당의 대표는 지금도 이념을 통한 분열과 결집을 꾀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말이 통하는 상식의 사회로 변화되어 가는 작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반갑다. 6월이 되자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불볕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는 있지만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의 운명은 지금부터 서서히 풀려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상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건 전 세계인이 놀라고 경악할 일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미개와 비이성의 시대를 살아온 게 사실이지 않은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은 서로의 이념이 다를지라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한 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 세대는 지금의 기성세대보다 더 수다스럽고 말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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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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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시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시는 마치 비가 오면 생겨나는 물웅덩이처럼 생각의 물꼬를 틔우고 갑자기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의식의 물웅덩이로 그러모은다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수면에 비치는 하늘도, 건듯 스쳐가던 바람도,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의식의 물웅덩이에 가득 담긴다. 어쩌면 시는 구절구절 우리네 짭조름한 눈물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신현림 시인이 쓴 <시 읽는 엄마>를 읽으면서 '엄마'라는 단어와 '시'라는 단어가 적당히 균형을 이룬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세월을 적셔 기적을 일구는 존재이다. 그 흠씬 젖은 세월을 기록하기에는 사실 어떤 산문으로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많은 이야기는 글 뒤에 감출 수밖에 없다. 감추어도 자꾸만 드러나는 글이어야 한다. '시'는 감출수록 드러나는 글이다. 독자가 바뀌어도 가슴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게 '시'의 힘이다. 시의 한 구절, 한 단어마다 누군가의 전 인생이 담긴다. 그 이야기들, 땀과 한숨의 젖은 세월이 마치 '엄마'를 닮은 듯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로 책은 더디게 읽혔다.

 

"어린 날 딸이 아칫거리며 걷거나 재롱부리던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어느새 딸은 혼자서도 무엇이든 다 잘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모르는 딸의 시간들이 늘어갈수록 홀가분한 마음만큼 걱정도 커진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울고 있으면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도 딸이 늘 지금처럼 밝게 웃기를, 세상 모든 어둠이 우리의 딸들을 다 피해가기를 바라며 오늘도 딸의 연락을 기다려본다." (p.134)

 

별것도 아니었던 시구가 어느 한순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어느 다정했던 친구의 위로보다도 더 달콤하고, 내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가슴을 치는 것이다. 시인이자 사진작가, 최근에는 독립출판사의 대표로서 일인다역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인은 젖먹이 어린 딸과 함께 이혼을 한 후 모녀 가장으로서의 힘겨운 삶을 살아오기도 했다.

 

"젊은 날보다 더없이 넓어지는 마음은 딸을 키우며 얻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안은 사랑의 감촉으로, 나는 더 섬세하고 긍정적이 되었다. 긍정적인 생각 속에서만 보이는 해맑은 미래. 딸을 안고 딸의 미소를 보면 슬픔도 식빵처럼 말랑말랑해지곤 했다." (p.6)

 

책에 실린 시들은 롱펠로나 헤르만 헤세, 칼릴 지브란과 같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시인의 고전 명시를 비롯하여 현세대의 세계 명시, 안현미, 신동호, 윤석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아직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시들이 있다. 신현림 시인은 자신이 읽고 용기를 얻었던 시의 시구를 일일이 열거하며 딸을 키우며 힘들었던 순간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시인의 경험이 한 겹 덧씌워진 시의 무게는 기존에 알고 있던 시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때의 엄마 목소리가 내 가슴속에서 울려 퍼진다. 엄마가 사준 세계시인선집 덕분에 시의 향기, 그리고 책 냄새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이 오늘날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느낀다. 이제까지 나는 딸을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주었지만, 정작 엄마를 위해서는 책을 읽어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몇 편의 내 시를 읽어드린 게 전부다." (p.205)

 

시의 여백에는 언제나 독자의 이야기가 담긴다. 그러므로 시를 좋아하는 독자는 시인과 더불어 새로운 작품을 써내려가는 작가이자 시인인 셈이다. 다만 그것이 오직 자신만의 책이라는 점이 기존의 책과 다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현림의 <시 읽는 엄마>는 신현림 자신의 책일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가 새로이 쓰게 될 기본서인 셈이다. 그것이 비록 독자 개개인의 가슴속에 묻힌 채 세상 사람들과 공유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별이 뜨고 바람이 불 때마다 또 하나의 시집이, 에세이가 탄생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세상의 모든 '엄마'는 '시'와 동의어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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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 From Paris 피에스 프롬 파리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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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의 청춘남녀 중에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기대나 믿음이 의외로 강한 듯하다. 학력이나 지적 수준, 연령이나 외모에 상관없이 말이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단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갈 뿐 아니라 한 번 맺어진 그들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다소 유치하거나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은 가슴에 품은 그러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사람에 대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낭만적인 감성을 지녔다거나 때 묻지 않고 여전히 순진하다는 둥 다소 호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듯하다. 그러나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기저에는 사랑에 대한 개인의 가치 판단이 작용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자신이 믿고 있는 운명적 사랑만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랑이고 우리 주변에서 보는 흔한 만남이나 보편적인 사랑, 나아가서는 조건을 따져 만나고 사랑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나 반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강하게 부정한다는 건 자신이 사랑에 대해 분류를 하고 자신만의 기준에 의해 등급을 매기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말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크 레비의 신작 장편소설 <P. S. From Paris>를 읽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처음 만남이야 어찌 되었건 사랑에 등급이 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이 들었던 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 경험일 뿐 소설의 내용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주관적 생각을 왜 언급하느냐고? 운명적 사랑을 믿는 것이 개인의 자유인 것처럼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생각의 틀을 분석해보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리고 블로그라는 공간은 개인의 사적 공간이기도 하니까.

 

"작가는 쉬운 직업이라고 생각들 하죠. 뭐,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런 점도 있으니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거 해라, 하지 마라 하며 지시를 내리는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의 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조직 없이 혼자 일한다는 건 작은 배를 타고 바다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어요." (p.153)

 

위에 소개한 짧은 인용문만으로도 소설의 중심 내용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렇다. 주인공 남자의 직업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업 작가이다. 미국에서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취미 삼아 글을 쓰던 폴은 친구 부부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을 출간하게 된다. 수줍음이 많았던 그가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되자 도망치다시피 선택한 곳이 파리였다. 첫 책의 성공 이후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한 채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폴을 보기 위해 그의 오랜 친구 커플인 아서와 로렌이 방문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서와 로렌은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 폴의 프로필을 대신 올린다. 그리고 아서는 한 술 더 떠 여자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쪽지를 보낸다. 그렇게 초대된 여인이 '미아'였다.

 

"다이지의 말이 맞았다. 상상일 뿐이라고, 또는 무시하고 싶은 막연한 희망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폴은 몇 주일 동안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 미아의 향기를 맡았다. 마치 미아가 앞서 지나갔기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미아를 놓친 것처럼. 다음 사거리에서는 그녀와 마주칠 거라고 확신하면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여자를 미아라고 부르며 붙잡기도 하고, 밤거리를 무작정 걷기도 하고, 불 켜진 창문들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젖기도 했다." (p.373)

 

영국에서 '멜리사 바로우'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었던 미아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속을 끓이다가 소꿉친구 다이지가 사는 파리로 훌쩍 떠나온 상황이었다. 몽마르트르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다이지는 미아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였다. 독신이었던 다이지는 식당 일로 늘 바빴고, 미아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 모양을 바꾼 채 그녀의 식당에서 서빙을 돕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지의 노트북으로 자신에게 온 메일을 확인하던 미아는 다이지가 가입했던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발견하게 되고 장난 삼아 자신의 프로필을 올려본다. 폴과 미아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나 그가 떠나온 미국에서 책의 매출은 미미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에서 오는 인세 덕분이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국인 번역가 경은 일 년에 두 번 2주 동안 프랑스에서 폴과 함께 머무는 등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는 한국에서 열리는 서울 국제 도서전에 초청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비행기표를 내민다. 비행기로 하는 장거리 여행에 공포가 있는 폴은 한국으로의 여행을 망설이게 된다. 어렵게 발을 디딘 한국에서 폴은 자신이 알고 있던 번역가 경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미아와의 사랑은 깊어지는데...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것처럼 자신이 지금 하고 있거나 미래에 하게 될 사랑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연애의 상대방을 선택하는 건 오직 개인의 기호와 취향의 문제일 뿐 운명적이거나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경험한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뻔한 계기로 서로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험한 사랑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되면 될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특별하거나 운명적인 사랑처럼 보이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사랑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을 특별하게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탐닉하게 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이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고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은 아주 쉽게 읽힌다. 대화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공 폴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한국인 번역가 경의 등장도 이채롭다. 그다지 색다를 것 없는 스토리이지만 책을 쉽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빠른 전개와 소설 속 한국 번역가를 통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스토리에 녹여내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매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특별하지 않던 사랑도 소설 속에서는 특별해진다. 매 순간 지지고 볶기만 하는 우리의 인생도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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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무척이나 더운 날씨였습니다. 단순히 기온이 높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세먼지 탓이겠지만 꿉꿉하고 탁한 느낌도 지울 수가 없었죠. 한반도에 불던 훈풍이 누군가에 의해 싸늘한 냉기로 돌변했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금요일이었죠. 다음달 12일로 예정되어 있던 북미 정상회담이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의해 한순간에 없었던 일로 돼 버리고 보니 허탈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 나만 그런 마음이었던 건 아니었을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한반도에 드리웠던 우울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걷히게 되리라는 걸. 어제 저녁 속보로 떴던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소식은 상황을 급반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에 의한 깜짝쇼는 국민들을 위한 커다란 선물이 되었을 듯합니다. 늦은 저녁을 먹던 나도 그 소식에 숟가락을 놓고 TV 앞으로 달려갔으니까 말이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했습니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응원글이 온 국민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원진행중

문재인 대통령님께 청원합니다.

참여인원 : [ 178,510명 ]

청원개요

문재인 대통령님

헌법개정안 실패, 풍계리 폭파, 북미정상회담 중지 등 오늘 하루만 해도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국가적 혹은 역사적 사건들이
좋든 싫든 결국에는 우리 국민들이 더 잘사는 나라로, 안전하고 희망이 있는 행복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줄것임을 믿습니다.

한번에 모든 일이 성사될 수는 없습니다.
반 백년에 걸쳐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냉전 분위기와 더불어 각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얽혀있는 이 순간에 저는 아니 저를 비롯한 우리 국민들은 다시 한번 우리가 뽑은 당신에게 기대를 걸려고 합니다.

당신이 1년 남짓한 시간들 속에서 보여준 모든 일들이 당신과 함께라면 역사에, 이념에, 타국의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세계의 우뚝 선 대한민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언론이니 당리당략이니 이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반대세력들에게 조차도 험한 말을 하며 화살을 돌리는 행위조차 당신의 철학에 맞는 일이 아닐테니까요.


이 시국에 우리 국민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당신을 믿고 응원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길었을 1박 4일간의 여정은 이제 우리 국민들이 이어 받겠습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
전쟁과 혐오가 혐오대상이 되는 세상.
당신과 함께라면 꼭 오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청원합니다.
부디 힘을 내어주세요.

그러니 당신에게, 우리 대통령님에게 직접 청원합니다.
언제나 국민이 뒤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러니 당신에게, 문재인이라는 당신에게 청원합니다.
꼭 같이 국민들 손잡고 행복하고 모두가 먼저인 세상이 도래하는 순간에 같이 눈물흘리며 부둥켜 안고 눈물 한바가지 흘려봅시다.

지난 일년과 앞으로의 4년.
그리고 특히 오늘 하루.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24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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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5-2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응원하고 왔습니다^^

꼼쥐 2018-05-27 17:11   좋아요 1 | URL
이런 청원이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동의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ㅎ
북프리쿠키 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셨을 듯...
 
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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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타고난 제 천성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의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게 이제는 지겨워졌다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줄곧 쌀쌀맞게 지내던 사람에게 살짝 어색한 미소를 띤 얼굴로 친절하게 대하기도 하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잔돈푼을 요구하는 노숙자의 손길에 선심 쓰듯 지폐를 건네기도 한다. 그게 비록 나의 천성도 아니고, 흔한 일상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정도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인 걸' 하는 은근히 기분 좋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일시적인 친절이나 자선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흔한 모습이라면 선량함을 타고난 사람들은 오히려 모든 게 늦되거나 어수룩하다는, 한마디로 어딘가 모자란다는 평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선량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선량한 사람들의 수모는 깊고 끈질기다. 당연한 듯 행해지는 그러한 폭력은 한 세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세대를 넘어 끝없이 이어진다. 조남주의 소설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일견 주인공 고마니의 성장기를 다룬 성장소설처럼 읽힌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작가는 우리 사회의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한 삶을 살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강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이 끝나고 영화가 끝나듯 인생은 멈추어주지 않았고, 나는 눈앞에 놓인 길고 긴 시간을 건너뛰거나 내버리지 못하고 일 분 일 초 또박또박 살아내야 했다. 아마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 사소한 태도들이 모여 삶을 만들고, 그 삶들이 모여 세상이 된다. 진지한 표정과 결연한 눈빛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p188~p.189)

 

서울에서 못살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S동. 고마니네 가족은 그곳에 산다. 서울 올림픽에서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고마니는 그날 이후로 동네 친구들과 모여 체조 연습을 한다. 그러나 집안의 물건들을 깨는 등 사고를 치는 바람에 집 밖으로 쫓겨나고 만다. 올림픽에 나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던 마니는 친구들과 학교 뒤뜰에 모여 연습을 계속해보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간다. 동네 체조 모임이 와해된 후에도 마니는 체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마니를 돕는 사람은 마니의 엄마다. 모든 게 늦되었던 마니의 엄마는 비교적 형편이 넉넉했던 집안의 외동딸로 자랐다. 조금 모자란 듯한 마니의 엄마를 위해 외가에서는 교육에 열을 올렸고 대학에도 진학시켰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마니의 엄마는 공사 현장의 일꾼이었던 마니의 아버지를 만나 덜컥 임신을 하게 된다. 그와 같은 탄생 비화를 안고 있는 마니는 성실하지만 경제적으로 다소 무능력한 아빠와 선량하지만 나사가 하나쯤 풀린 듯한 엄마와 함께 지은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열 평짜리 주택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밤, 창 너머로 흐릿하게 반짝이는 별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 별이 보이는 거다. 그래서 아, 내가 발견한 이 별을 나의 수호성이랄까 이정표랄까 그런 걸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별에 이름도 붙이고, 소원도 빌고 그랬는데, 그 별이, 별이 아니라는 거다. 위성이라든가, 남산타워 불빛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그냥 비문증(飛蚊症)인 거다. 그럼 그 별에 빌었던 내 소원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소원도 가짜가 되는 걸까. 소원은 함부로 무언가에 대고 비는 게 아니다." (p.134)

 

국가대표 체조 선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마니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체조를 배우러 학원에 간다. 그러나 그곳은 체조가 아닌 에어로빅 학원이었다. 결국 마니는 체조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지만 망신만 당하고 만다. 마니는 체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아간다. 20대 때에는 서너 번의 연애를 경험했고, 취직을 했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십 년간 이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한다. 과일가게에서 채소가게로, 붕어빵을 팔고, 구멍가게를 거쳐 지금은 혼자 떡볶이와 튀김을 팔고 있는 아빠를 대신하여 십여 년간 실질적인 가장이나 다름없었던 마니.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마니는 그 사실을 숨긴 채 한동안 여느 날과 똑같이 집을 나선다.

 

"아저씨, 아저씨는 친절할 뿐 아니라 지혜로우세요. 하룻밤 자고 다음날 새벽에 다시 나가는 생활. 지루하기도 하고, 버겁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던 그 평범한 일상이 끝났다.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선로는 여기서 끊긴 걸까. 그럼 이제 나는?" (p.52)

 

재개발, 재건축, 뉴타운 등 비슷한 이름으로 진행되던 재개발 사업이 S동에서도 추진된다. 아파트에 살게 된다는 꿈에 부푼 마니의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저기 도장을 찍고 다닌다. 그러나 말만 무성할 뿐 아파트가 들어서려면 앞으로도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결국 마니네 가족은 집을 팔고 이사를 하기로 결심한다. 분양받은 새 아파트에서 살아보겠다던 엄마의 꿈도, 국가대표 체조 선수가 되겠다던 마니의 꿈도 현실이라는 높은 벽에 가로막힌 셈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원장도 그렇고, 코치도 그런 것 같고, 자세히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아버지도 아마 다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 중 한 명이 되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p.152)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선량한 사람들의 아주 작은 꿈을 지켜주지 못한다. 지켜주겠다는 의지조차 없을 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의 나약하고 착한 심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을까 궁리한다. 도시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욕심의 결집체이다. 그러므로 남을 이용할 줄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은 무능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그들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쫓겨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비정하다고 말하지는 말자. 비정하다는 말은 내가 그렇지 않을 때 타인을 향해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한데 '비정하다'는 말을 어찌 쓸 수 있을까.

 

"소설이 끝나고 영화가 끝나듯 인생은 멈추어주지 않았고, 나는 눈앞에 놓인 길고 긴 시간을 건너뛰거나 내버리지 못하고 일 분 일 초 또박또박 살아내야 했다. 아마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 사소한 태도들이 모여 삶을 만들고, 그 삶들이 모여 세상이 된다. 진지한 표정과 결연한 눈빛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p188~p.189)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도 다 가고 있다. 넝쿨장미가 흐드러진 어느 집 담벼락에도 욕심의 짙은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꾸는 이유도 자신의 추한 욕심을 어찌어찌 가려보려는 얕은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시나브로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 주변부로 밀려나는 선량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는 작은 그늘이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천성에 반하여 작은 친절이나 한번뿐인 자선을 베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됐다거나 충분하다 여기며 평생을 산다. 그 모든 게 위선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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