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S. From Paris 피에스 프롬 파리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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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의 청춘남녀 중에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기대나 믿음이 의외로 강한 듯하다. 학력이나 지적 수준, 연령이나 외모에 상관없이 말이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단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갈 뿐 아니라 한 번 맺어진 그들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다소 유치하거나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은 가슴에 품은 그러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사람에 대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낭만적인 감성을 지녔다거나 때 묻지 않고 여전히 순진하다는 둥 다소 호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듯하다. 그러나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기저에는 사랑에 대한 개인의 가치 판단이 작용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자신이 믿고 있는 운명적 사랑만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랑이고 우리 주변에서 보는 흔한 만남이나 보편적인 사랑, 나아가서는 조건을 따져 만나고 사랑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나 반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강하게 부정한다는 건 자신이 사랑에 대해 분류를 하고 자신만의 기준에 의해 등급을 매기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말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크 레비의 신작 장편소설 <P. S. From Paris>를 읽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처음 만남이야 어찌 되었건 사랑에 등급이 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이 들었던 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 경험일 뿐 소설의 내용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주관적 생각을 왜 언급하느냐고? 운명적 사랑을 믿는 것이 개인의 자유인 것처럼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생각의 틀을 분석해보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리고 블로그라는 공간은 개인의 사적 공간이기도 하니까.

 

"작가는 쉬운 직업이라고 생각들 하죠. 뭐,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런 점도 있으니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거 해라, 하지 마라 하며 지시를 내리는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의 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조직 없이 혼자 일한다는 건 작은 배를 타고 바다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어요." (p.153)

 

위에 소개한 짧은 인용문만으로도 소설의 중심 내용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렇다. 주인공 남자의 직업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업 작가이다. 미국에서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취미 삼아 글을 쓰던 폴은 친구 부부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을 출간하게 된다. 수줍음이 많았던 그가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되자 도망치다시피 선택한 곳이 파리였다. 첫 책의 성공 이후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한 채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폴을 보기 위해 그의 오랜 친구 커플인 아서와 로렌이 방문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서와 로렌은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 폴의 프로필을 대신 올린다. 그리고 아서는 한 술 더 떠 여자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쪽지를 보낸다. 그렇게 초대된 여인이 '미아'였다.

 

"다이지의 말이 맞았다. 상상일 뿐이라고, 또는 무시하고 싶은 막연한 희망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폴은 몇 주일 동안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 미아의 향기를 맡았다. 마치 미아가 앞서 지나갔기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미아를 놓친 것처럼. 다음 사거리에서는 그녀와 마주칠 거라고 확신하면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여자를 미아라고 부르며 붙잡기도 하고, 밤거리를 무작정 걷기도 하고, 불 켜진 창문들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젖기도 했다." (p.373)

 

영국에서 '멜리사 바로우'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었던 미아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속을 끓이다가 소꿉친구 다이지가 사는 파리로 훌쩍 떠나온 상황이었다. 몽마르트르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다이지는 미아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였다. 독신이었던 다이지는 식당 일로 늘 바빴고, 미아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 모양을 바꾼 채 그녀의 식당에서 서빙을 돕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지의 노트북으로 자신에게 온 메일을 확인하던 미아는 다이지가 가입했던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발견하게 되고 장난 삼아 자신의 프로필을 올려본다. 폴과 미아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나 그가 떠나온 미국에서 책의 매출은 미미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에서 오는 인세 덕분이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국인 번역가 경은 일 년에 두 번 2주 동안 프랑스에서 폴과 함께 머무는 등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는 한국에서 열리는 서울 국제 도서전에 초청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비행기표를 내민다. 비행기로 하는 장거리 여행에 공포가 있는 폴은 한국으로의 여행을 망설이게 된다. 어렵게 발을 디딘 한국에서 폴은 자신이 알고 있던 번역가 경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미아와의 사랑은 깊어지는데...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것처럼 자신이 지금 하고 있거나 미래에 하게 될 사랑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연애의 상대방을 선택하는 건 오직 개인의 기호와 취향의 문제일 뿐 운명적이거나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경험한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뻔한 계기로 서로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험한 사랑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되면 될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특별하거나 운명적인 사랑처럼 보이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사랑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을 특별하게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탐닉하게 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이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고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은 아주 쉽게 읽힌다. 대화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공 폴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한국인 번역가 경의 등장도 이채롭다. 그다지 색다를 것 없는 스토리이지만 책을 쉽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빠른 전개와 소설 속 한국 번역가를 통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스토리에 녹여내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매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특별하지 않던 사랑도 소설 속에서는 특별해진다. 매 순간 지지고 볶기만 하는 우리의 인생도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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