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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평점 :
사람들은 누구나 타고난 제 천성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의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게 이제는 지겨워졌다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줄곧 쌀쌀맞게 지내던 사람에게 살짝 어색한 미소를 띤 얼굴로 친절하게 대하기도 하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잔돈푼을 요구하는 노숙자의 손길에 선심 쓰듯 지폐를 건네기도 한다. 그게 비록 나의 천성도 아니고, 흔한 일상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정도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인 걸' 하는 은근히 기분 좋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일시적인 친절이나 자선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흔한 모습이라면 선량함을 타고난 사람들은 오히려 모든 게 늦되거나 어수룩하다는, 한마디로 어딘가 모자란다는 평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선량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선량한 사람들의 수모는 깊고 끈질기다. 당연한 듯 행해지는 그러한 폭력은 한 세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세대를 넘어 끝없이 이어진다. 조남주의 소설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일견 주인공 고마니의 성장기를 다룬 성장소설처럼 읽힌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작가는 우리 사회의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한 삶을 살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강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이 끝나고 영화가 끝나듯 인생은 멈추어주지 않았고, 나는 눈앞에 놓인 길고 긴 시간을 건너뛰거나 내버리지 못하고 일 분 일 초 또박또박 살아내야 했다. 아마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 사소한 태도들이 모여 삶을 만들고, 그 삶들이 모여 세상이 된다. 진지한 표정과 결연한 눈빛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p188~p.189)
서울에서 못살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S동. 고마니네 가족은 그곳에 산다. 서울 올림픽에서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고마니는 그날 이후로 동네 친구들과 모여 체조 연습을 한다. 그러나 집안의 물건들을 깨는 등 사고를 치는 바람에 집 밖으로 쫓겨나고 만다. 올림픽에 나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던 마니는 친구들과 학교 뒤뜰에 모여 연습을 계속해보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간다. 동네 체조 모임이 와해된 후에도 마니는 체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마니를 돕는 사람은 마니의 엄마다. 모든 게 늦되었던 마니의 엄마는 비교적 형편이 넉넉했던 집안의 외동딸로 자랐다. 조금 모자란 듯한 마니의 엄마를 위해 외가에서는 교육에 열을 올렸고 대학에도 진학시켰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마니의 엄마는 공사 현장의 일꾼이었던 마니의 아버지를 만나 덜컥 임신을 하게 된다. 그와 같은 탄생 비화를 안고 있는 마니는 성실하지만 경제적으로 다소 무능력한 아빠와 선량하지만 나사가 하나쯤 풀린 듯한 엄마와 함께 지은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열 평짜리 주택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밤, 창 너머로 흐릿하게 반짝이는 별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 별이 보이는 거다. 그래서 아, 내가 발견한 이 별을 나의 수호성이랄까 이정표랄까 그런 걸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별에 이름도 붙이고, 소원도 빌고 그랬는데, 그 별이, 별이 아니라는 거다. 위성이라든가, 남산타워 불빛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그냥 비문증(飛蚊症)인 거다. 그럼 그 별에 빌었던 내 소원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소원도 가짜가 되는 걸까. 소원은 함부로 무언가에 대고 비는 게 아니다." (p.134)
국가대표 체조 선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마니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체조를 배우러 학원에 간다. 그러나 그곳은 체조가 아닌 에어로빅 학원이었다. 결국 마니는 체조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지만 망신만 당하고 만다. 마니는 체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아간다. 20대 때에는 서너 번의 연애를 경험했고, 취직을 했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십 년간 이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한다. 과일가게에서 채소가게로, 붕어빵을 팔고, 구멍가게를 거쳐 지금은 혼자 떡볶이와 튀김을 팔고 있는 아빠를 대신하여 십여 년간 실질적인 가장이나 다름없었던 마니.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마니는 그 사실을 숨긴 채 한동안 여느 날과 똑같이 집을 나선다.
"아저씨, 아저씨는 친절할 뿐 아니라 지혜로우세요. 하룻밤 자고 다음날 새벽에 다시 나가는 생활. 지루하기도 하고, 버겁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던 그 평범한 일상이 끝났다.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선로는 여기서 끊긴 걸까. 그럼 이제 나는?" (p.52)
재개발, 재건축, 뉴타운 등 비슷한 이름으로 진행되던 재개발 사업이 S동에서도 추진된다. 아파트에 살게 된다는 꿈에 부푼 마니의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저기 도장을 찍고 다닌다. 그러나 말만 무성할 뿐 아파트가 들어서려면 앞으로도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결국 마니네 가족은 집을 팔고 이사를 하기로 결심한다. 분양받은 새 아파트에서 살아보겠다던 엄마의 꿈도, 국가대표 체조 선수가 되겠다던 마니의 꿈도 현실이라는 높은 벽에 가로막힌 셈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원장도 그렇고, 코치도 그런 것 같고, 자세히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아버지도 아마 다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 중 한 명이 되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p.152)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선량한 사람들의 아주 작은 꿈을 지켜주지 못한다. 지켜주겠다는 의지조차 없을 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의 나약하고 착한 심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을까 궁리한다. 도시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욕심의 결집체이다. 그러므로 남을 이용할 줄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은 무능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그들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쫓겨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비정하다고 말하지는 말자. 비정하다는 말은 내가 그렇지 않을 때 타인을 향해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한데 '비정하다'는 말을 어찌 쓸 수 있을까.
"소설이 끝나고 영화가 끝나듯 인생은 멈추어주지 않았고, 나는 눈앞에 놓인 길고 긴 시간을 건너뛰거나 내버리지 못하고 일 분 일 초 또박또박 살아내야 했다. 아마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 사소한 태도들이 모여 삶을 만들고, 그 삶들이 모여 세상이 된다. 진지한 표정과 결연한 눈빛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p188~p.189)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도 다 가고 있다. 넝쿨장미가 흐드러진 어느 집 담벼락에도 욕심의 짙은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꾸는 이유도 자신의 추한 욕심을 어찌어찌 가려보려는 얕은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시나브로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 주변부로 밀려나는 선량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는 작은 그늘이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천성에 반하여 작은 친절이나 한번뿐인 자선을 베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됐다거나 충분하다 여기며 평생을 산다. 그 모든 게 위선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