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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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시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시는 마치 비가 오면 생겨나는 물웅덩이처럼 생각의 물꼬를 틔우고 갑자기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의식의 물웅덩이로 그러모은다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수면에 비치는 하늘도, 건듯 스쳐가던 바람도,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의식의 물웅덩이에 가득 담긴다. 어쩌면 시는 구절구절 우리네 짭조름한 눈물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신현림 시인이 쓴 <시 읽는 엄마>를 읽으면서 '엄마'라는 단어와 '시'라는 단어가 적당히 균형을 이룬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세월을 적셔 기적을 일구는 존재이다. 그 흠씬 젖은 세월을 기록하기에는 사실 어떤 산문으로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많은 이야기는 글 뒤에 감출 수밖에 없다. 감추어도 자꾸만 드러나는 글이어야 한다. '시'는 감출수록 드러나는 글이다. 독자가 바뀌어도 가슴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게 '시'의 힘이다. 시의 한 구절, 한 단어마다 누군가의 전 인생이 담긴다. 그 이야기들, 땀과 한숨의 젖은 세월이 마치 '엄마'를 닮은 듯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로 책은 더디게 읽혔다.

 

"어린 날 딸이 아칫거리며 걷거나 재롱부리던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어느새 딸은 혼자서도 무엇이든 다 잘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모르는 딸의 시간들이 늘어갈수록 홀가분한 마음만큼 걱정도 커진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울고 있으면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도 딸이 늘 지금처럼 밝게 웃기를, 세상 모든 어둠이 우리의 딸들을 다 피해가기를 바라며 오늘도 딸의 연락을 기다려본다." (p.134)

 

별것도 아니었던 시구가 어느 한순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어느 다정했던 친구의 위로보다도 더 달콤하고, 내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가슴을 치는 것이다. 시인이자 사진작가, 최근에는 독립출판사의 대표로서 일인다역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인은 젖먹이 어린 딸과 함께 이혼을 한 후 모녀 가장으로서의 힘겨운 삶을 살아오기도 했다.

 

"젊은 날보다 더없이 넓어지는 마음은 딸을 키우며 얻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안은 사랑의 감촉으로, 나는 더 섬세하고 긍정적이 되었다. 긍정적인 생각 속에서만 보이는 해맑은 미래. 딸을 안고 딸의 미소를 보면 슬픔도 식빵처럼 말랑말랑해지곤 했다." (p.6)

 

책에 실린 시들은 롱펠로나 헤르만 헤세, 칼릴 지브란과 같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시인의 고전 명시를 비롯하여 현세대의 세계 명시, 안현미, 신동호, 윤석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아직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시들이 있다. 신현림 시인은 자신이 읽고 용기를 얻었던 시의 시구를 일일이 열거하며 딸을 키우며 힘들었던 순간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시인의 경험이 한 겹 덧씌워진 시의 무게는 기존에 알고 있던 시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때의 엄마 목소리가 내 가슴속에서 울려 퍼진다. 엄마가 사준 세계시인선집 덕분에 시의 향기, 그리고 책 냄새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이 오늘날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느낀다. 이제까지 나는 딸을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주었지만, 정작 엄마를 위해서는 책을 읽어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몇 편의 내 시를 읽어드린 게 전부다." (p.205)

 

시의 여백에는 언제나 독자의 이야기가 담긴다. 그러므로 시를 좋아하는 독자는 시인과 더불어 새로운 작품을 써내려가는 작가이자 시인인 셈이다. 다만 그것이 오직 자신만의 책이라는 점이 기존의 책과 다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현림의 <시 읽는 엄마>는 신현림 자신의 책일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가 새로이 쓰게 될 기본서인 셈이다. 그것이 비록 독자 개개인의 가슴속에 묻힌 채 세상 사람들과 공유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별이 뜨고 바람이 불 때마다 또 하나의 시집이, 에세이가 탄생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세상의 모든 '엄마'는 '시'와 동의어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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