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쿡 - 애플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조용한 천재
린더 카니 지음, 안진환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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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어떠한 분야 또는 어떠한 직업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을 관통하는 가치관, 세계관, 혹은 인생관이 존재하느냐의 문제로 집약된다. 말하자면 한 사람을 위인으로 이끄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평생을 관통하는 신념의 문제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주 여러 번 직업을 바꿀지언정 가슴에 품은 하나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전체 삶을 불태울 수 있는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 앨라배마 시골 마을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오번 대학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IE, 컴팩 등을 거쳐 그의 나이 37세였던 1998년 사업운영 부문 수석부사장으로 애플에 영입된 인물. 강력한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근로자의 근로 환경 개선을 추진하며, 인권과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자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 하였던 인물. 그리하여 스티브 잡스의 사망 이후 8년 만에 애플의 시가총액은 1조 달러를 돌파하였고, 현금 보유고는 2010년 이래 네 배가량 증가했으며, 프리미엄 스마트폰 매출 1위, 애플 워치를 통하여 웨어러블 시장 창출 등 애플을 명실공히 세계 1위 기업으로 만든 인물. 그의 이름은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팀 쿡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애플에 합류하는 것이 창의적인 천재와 일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의 직감은 더 이상 정확할 수 없었다. 2010년 오번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그는 말했다. "애플에서 일하는 것은 제 스스로 짜보았던 어떤 계획에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제가 내린 최고의 결정이었습니다." (p.121)

 

2011년 10월 5일 혁신의 아이콘이자 천재적인 사업가로 추앙받던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다. 사람들은 애플의 미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운영만 아는 '따분한 살림꾼'이 과연 스티브 잡스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잡스가 떠난 지 8년이 되는 지금,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자 완전한 오해였다고 판명 난 셈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쿡의 안목은 애플의 위대한 3막을 여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식되었다. 의학과 보건, 피트니스, 자동차, 스마트홈 등 아직 컴퓨팅이 정복하지 못한 무대에서 애플은 새로운 혁신을 이룩할 것이고 전망 또한 밝게 점쳐지고 있다.

 

"쿡은 '잘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격언을 스스로 입증하고 잇다. 스티브 잡스는 "기업이란 사람들을 같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쿡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는 기업이 상업적인 것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기업은 사람들의 집합일 뿐이다. 사람이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면, 기업 역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애플은 쿡의 지휘 아래 세계에서 최초로 1조 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지만, 그가 한 일은 그 이상임에 틀림없다. 그는 애플을 더 나은 회사로 만들었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 (p.403)

 

쿡이 애플의 CEO가 된 후에 기업 환경이 항상 애플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잡스가 자신의 사후에 있을 기업 환경을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성향과 정반대인 팀 쿡을 CEO로 지목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잡스의 선택은 옳았다. 잡스가 제품 전문가로서 애플을 세계 1위 기업에 올려놓았다면 다음 CEO는 효율적인 사업 운영과 관리를 통해 안정적인 발전을 꾀할 관리형 리더가 필요했고 그러한 면에서 쿡은 '준비된 적임자'였다.

 

애플 전문 저널리스트로서 20년 동안 애플을 취재해 온 린더 카니가 쓴 <팀 쿡>은 팀 쿡 개인에 대한 평전인 동시에 애플의 CEO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애플의 미래에 대한 평가 보고서이기도 하다. 쿡은 회사가 훌륭한 전략은 물론 '훌륭한 가치관'을 겸비해야 한다고 믿는다며 그 핵심 가치 여섯 가지를 피력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기술에 대한 접근가능성, 모든 사람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권리, 환경에 대한 의무감, 포용성과 다양성, 프라이버시와 안전, 공급자 책임이 그것이다. 책을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팀 쿡의 놀라운 성과가 거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결국 재능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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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즐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습관적으로, 또는 막연한 의무감으로 아침 운동을 하는 까닭에 무슨 일만 있으면 하루쯤 거르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곤 한다. 예컨대 전날 저녁에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몸이 찌뿌듯하다거나 미세먼지 수치가 조금 높다거나 해도 '에이, 오늘은 쉬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거른 날이면 몸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고 누가 캐묻는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그렇게 나는 수십 년 동안 아침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골골 백세'를 떠올릴 만큼 겨우겨우 또는 꾸역꾸역.

 

아침 운동을 꾸준히 이어오는 까닭에 새벽 등산로에서 자주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주로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다. 구체적인 나이는 몰라도 대략 칠십대인지 팔십대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지라 며칠만 눈에 띄지 않아도 은근한 걱정을 하게 된다. 물론 집도 모르고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굳이 찾아갈 것도 아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 후로는 영영 보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이다.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다른 등산로를 택했을 수도 있고, 등산이 아닌 다른 운동을 시작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우울한 추측 속에서 여러 날을 지내게 된다.

 

오늘도 나는 지난해 겨울부터 통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당뇨를 앓고 있는데 새벽의 찬 공기가 몸에 좋지 않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에 따라 겨울에는 10시쯤, 여름에는 6시쯤에 운동을 나오는 것으로 시간을 바꾸는 바람에 겨울이나 여름이나 늘 5시 30분에 집에서 나오는 나와는 마주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내려가는 나와 이제 막 산 능선에 도착한 할머니와의 반가운 만남은 아주 짧게 끝이 났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라며 떨떠름해하는 나의 손에 교회 주보를 쥐어주었다.

 

교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올해 초 한기총의 대표회장에 선출된 모 목사는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내 성도가 됐는지 알아보려면 젊은 여집사에게 빤스(팬티)를 내려보게 하는 옛날 방법이 있다."고 운을 뗀 후 "여집사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빤스 벗으라면 다 벗는다. 목사가 벗으라고 해도 안 벗으면 내 성도가 아니다. 한 번 자고 싶다고 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라는 성희롱성 발언을 서슴없이 한 적이 있다. 목사, 언론인, 고위 공직자 등 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온갖 특혜를 누려온 사람들은 결국 우리 사회의 괴물로 성장하게 마련이다. 김학의가, 정준영이, 모 신문사의 사주가 그런 괴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사회가, 그들의 선민의식이 적당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던 건 아닌지.

 

나는 천주교에 적을 두고는 있지만 착실한 신앙인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아침에 만난 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냉큼 개종을 할 정도로 허약한 신앙인도 아니다. 할머니가 쥐어 준 교회 주보를 보며 나는 문득 우리 사회가 길러낸 거대한 괴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오늘도 몸피를 키우며 성장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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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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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모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지인 한 분을 만났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말하자면 범생이 스타일의 인물인지라 여유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더러 시간이 난다 할지라도 부족한 잠을 자거나 공부에 빠져드는 통에 친한 사람도 그의 얼굴 한 번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어쩐 일인지 먼저 전화까지 주면서 만나자고 하니 만사 제쳐두고 나갔던 것이다. 혹시나 본인의 신변에 이상이 있거나 가족 중 누군가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거나 하는 불길한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내 나이 또래에 으레 있음 직한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지만 얼굴 한 번 보는 게 나라님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사람이 만나자고 전화까지 준 마당에 버선발로 나가지는 못할망정 다음에 보자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그간의 소식을 캐묻다 보니 인사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났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길한 소식을 듣는 게 무서워서 일부러 말을 빙빙 돌렸는지도 모른다.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 아니냐고 어렵게 물었더니 그런 거 없다면서 실없이 웃었다. 나는 그제야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여유로운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이가 젊었을 적에는 몰랐는데 해가 갈수록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보고 싶어 지더라는 그 사람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있노라니 그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의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오후의 여린 햇살에 비친 그의 표정은 한결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 꽤나 자세히 들려주었다. 호르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는 그는 현대인의 질병 중 상당 부분이 호르몬 불균형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개개인의 적정 호르몬 수치가 다 다르고 각각의 적정 호르몬 비율도 다 다른 까닭에 표준화를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결국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에 있어서도 호르몬 분야는 밝혀진 게 그닥 많지 않을뿐더러 원인을 알아도 치료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농담처럼 "결국 우리가 건강하게 제 수명대로 살 수 있는 건 단지 우연일 뿐이야."라고 말했다. 과학자의 말로는 적절치 않을 수도 있는...

 

"사회 공공성의 문제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재수없는 소수 the unlucky few로 몰아서 고립시키는 공작은 '안보와 경제'가 문제를 회피하는 오래된 방식인데, 세월호 참사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도 어쩌다가 재수 좋아서 안 죽고 남아 있는 꼴이 되었고, 삶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한 우연의 장난으로 느껴졌다." (p.96 '동거차도의 냉잇국' 중에서)

 

여전히 원고지에 육필로 원고를 쓰고 있다는 김훈은 자신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삶이 우연처럼 느껴진다는 노작가와 우리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어느 과학자의 말은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허술한 말로 들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 나이라면, 우연처럼 쉽게 맞을 수 있는 것 또한 죽음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알림' 중에서)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대개가 비슷하다. 생각이 모아지는 지점도, 나이가 들어 주름이 지는 모습도 종국에는 한 지점에서 수렴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각기 다른 직업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늙어간다는 건 인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정도의 나이대가 되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나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건 곧 닥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적당히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었던 삶의 기억들은 저마다 다를지언정 많은 이들이 죽음이라는 소실점을 향해 한없이 수렴되는 게 인생의 경이가 아니던가.

 

"내 고향의 한양도성 둘레에는 거대한 판자촌이 들어서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이 마을보다 지대가 낮은 평지였다. 초기에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땅을 파서 움막을 지었고, 판잣집, 천막들은 그후에 들어섰다. 판잣집들은 사람들의 출신지를 따라서 고향별로 구획을 이루었다." (p.209 '귀향' 중에서)

 

새삼 달라질 것도 없는 일상사를 작가는 자신의 오래전 경험과 기억을 밑천 삼아 부드럽게 써내려가고 있다. 그것들은 때로는 사회 일반에 맞닿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 정치의 대척점에 서기도 하고, 또 때로는 순전히 작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머물기도 한다. 작가의 저서 <칼의 노래>에 미처 담을 수 없었던 '인간 이순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와 박정희와 함께 들어온 비틀스의 음악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작가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다투어 읽어왔던 나로서는 작가의 연필심이 점차 뭉툭해지고 있구나, 하는 소회를 지울 수가 없다. 정신이나 글이 무뎌졌다는 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 핵심을 파고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 언어의 적확성과 완벽한 문장의 추구 등 빈틈이 엿보이지 않았던 지난날의 글쓰기 행태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숨이 턱턱 막히게 했던 모습은 그의 책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나이가 들어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일이다. '여유'와 '비어 있음'이 노인의 특권이다. 작가도 이제 그 특권을 누릴 만한 자격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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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의 하늘은 어찌나 푸르던지요. 오늘은 1년 24절기 중 여덟째 절기인 소만(小滿)이자 부부의 날.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찬다고 해서 '만(滿)'을 썼다지요. 이맘때면 가을보리를 베고, 모내기를 하고, 밭에 나가 김을 매던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릅니다. 여름으로 가는 햇살은 따가웠고, 봉숭아의 잎과 꽃잎을 찧어 백반과 소금을 섞어 손톱에 얹고 호박잎이나 피마자잎을 덮어 노끈으로 챙챙 동여주던 누나의 다정했던 손길이 무척이나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잠깐 걸었습니다. 더위를 식힐 정도의 적당한 바람이 불었고, 그늘 밑 벤치에는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인적이 드문 구석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김훈의 <연필로 쓰기>를 마저 읽었습니다. 심술궂은 바람이 제멋대로 책장을 넘기고, 까무룩 들던 낮잠을 저만치 쫓아냅니다.

 

가지런한 봄이 작아지고(小), 바지런한 여름으로 채워지는(滿), 오늘은 소만(小滿). 쾌청한 하늘이 좋아서, 바람이 적당해서, 자꾸만 밖으로 시선이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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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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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의 소설에서는 언제나 치열함이 엿보이지만 에세이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풀어져 있는 작가의 면모를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소설 쓰기에 집중하느라 바짝 열이 올랐던 몸을 설렁설렁 에세이나 쓰면서 쉬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가가 에세이를 쓸 때는 성의 없이 '설렁설렁' 쓰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 있는 나로서는 작가가 때로는 '설렁설렁' 글을 쓰는 것도 괜찮겠다 싶기는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비판적인 시각에서 하루키의 작품을 대하는 독자라면 그와 같은 사실이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거나 다시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팬의 입장에서 읽는 까닭에 책을 읽을 때마다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러므로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나의 리뷰는 어쩌면 편파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는 하루키의 팬이 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라는 다소 특이한 제목의 에세이는 작가가 1983년부터 약 오 년에 걸쳐 쓴 것으로 '하이패션'이라는 잡지에 게재했던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의 나이로는 서른넷에서 서른아홉까지의 시기인데 작가가 막 유명세를 타던 시기와 겹치는 까닭에 이사도 잦고 매우 바빴던 시기이기도 했다.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별 볼일 없는 인간은 별 볼일 없는 일로 기뻐하는 동시에 별 볼일 없는 일로 화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원칙적으로 묘한 일에 기뻐하고 감격하는 사람을 그리 신용하지 않는다. 가령 '아무래도 이건 아니잖아, 잘못짚은 거 같은데' 싶을 정도로 누군가가 나를 열심히 칭찬해준다고 치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바로 이런 타입이다. 칭찬하는 거니 뭐 어떠랴 하다보면, 또 반드시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완전한 소모다. 그 사람이 'little mind'든 아니든 'little things'에 기뻐하는 사람은 굳이 상대하지 않는다-이게 인생의 철칙이다. 이렇게 말하고서 내가 'little things'에 기뻐하면 우스운 꼴이겠지만." (p.117)

 

 

이 책에서도 작가는 자신의 이런저런 경험담과 더불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커포티에 대해 언급한다.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는 챈들러를, 재테크에는 젬병인 자신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공통점을, 그럼에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이 조금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물론 이 책 역시 가벼운 신변잡기를 다룬 에세이인 까닭에 지금은 사라진 광고나 오래전에 읽었던 신문기사,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이 실려 있다.

 

 

"가난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나는 때로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노인네 같다며 싫어할 테지만, 옛날(이십 년 전의) 여자들은 "가난한 건 절대 싫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그랬다. 그녀들에게는 돈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여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도 꽤 많았다. 외제차가 있는 남자랑만 데이트하는 여자애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여자는 어디까지나 극소수였고, 적어도 나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내 주위의 보통 여자들은 차가 없거나 돈이 없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데이트 때도 내게 돈이 없으면 상대가 냈다. 그런 일은 수치도 뭣도 아니었다." (p.195)

 

 

책에 수록된 여러 꼭지의 글을 소개하면서도 정작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의 소개는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글이 하루키를 향한 비난의 빌미가 되거나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하루키 작품 전체에 대한 매도나 폄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그의 글에 의하면 하루키가 십 년 동안 품어온 꿈이 쌍둥이 여자친구를 갖는 것이란다. 설명에 따르자면 그가 본 영화 <하이스쿨Almost Summer>은 캘리포니아 고등학생들의 생활을 그린 청춘영화인데, 영화의 마지막 졸업 기념 파티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재킷을 멋지게 차려입고 양옆에 쌍둥이 여학생을 거느리고 나타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나 멋져 보였다는 것이다. 성적인 영역으로 확대할 필요도 없이 그저 특별한 경험으로서 쌍둥이 자매와 파티에 가고 싶을 뿐이라는 것.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으니 뭐라 거들거나 덧붙일 말은 없지만 아무튼 하루키는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

 

 

내가 하루키의 소설뿐만 아니라 그의 에세이까지 빼놓지 않고 읽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가 쓴 작품 몇 권쯤은 읽어봐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책을 읽는 재미가 우선인 경우가 많다. 학술적 목적도 없는데 굳이 어떤 작가의 작품 성향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하루키의 저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책을 읽은 후에는 '이 사람은 정말 독특한걸.'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나와 어떤 공통점이 있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가슴으로 느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얘기다. 우리 주변에는 나와 다른 사람보다는 비슷한 사람이 더 많은 까닭이다. 이놈 저놈 하면서 욕할 대상만 아니라면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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