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계산대 앞에 설 때마다 드는 생각은 우리네 인생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전체요리든 메인요리든 혹은 후식이든 간에 각각의 단계별로 그때그때마다 정산을 요구받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먹은 음식은 누군가에 의해 꼼꼼히 계산되고 식당을 나서는 순간 한꺼번에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들 인생도 삶에서 누리는 순간순간마다 그 대가를 지불하거나 청구되는 건 아니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라는 가혹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삶에서 누렸던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 등에 대한 대가를 한꺼번에 요구받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우리는 식당 주인에게 언제든 정산을 요구할 수 있지만 인생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제껏 누렸던 기쁨에 대한 대가를 며칠 혹은 몇 달 아픈 것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에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길 인생의 매 순간마다 감사하며 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과연 감사할 일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어찌 됐든 나는 인생에서 누리는 모든 경험에 대하여 죽음이라는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할 텐데 말이다. 매 순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꺼번에 정산한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인데 그게 어떻게 감사할 일인지... 우리가 식당 주인에게 매 순간 정산을 요구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식당 주인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오늘은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높아진 습도 탓인지 후텁지근하다. 기말고사를 일주일여 앞둔 아들은 평소에 하지 않던 공부와 친해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사는 게 참 만만치가 않다. 그렇다고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신의 인생에서 가만가만 따져봐야 할 것은 죽음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치를 만큼 값진 인생을 살았는가 하는 문제일 듯하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만족한 삶을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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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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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기가 많은 작가라고 할지라도 안티팬은 늘 있게 마련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작가는 드물지 싶다. 작가의 신작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빠른 시간 내에 읽고야 마는 열성팬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써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안티팬으로 극명하게 나뉘니 말이다. 게다가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 또는 작가를 싫어하는 이유 또한 명확하다. 이쯤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반은 검은색, 반은 흰색으로 만들어진 별종의 인간인 듯 생각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작가의 열성팬 중 한 사람인 까닭에 그의 작품이라면 빼놓지 않고 모두 읽어본 축에 속한다(고 해야 하리라.).

 

최근에 출간된 하루키의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 역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누군가가 빨리 읽으라 닦달하는 건 물론 아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작가가 최근에 새로 쓴 에세이가 아니라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주간 아사히>에 연재된 에세이 60여 편을 모아 엮은 것으로 하루키의 팬이라면 당연히 어디선가 한 번쯤 읽어봤음직한 에세이들이 더러 포함되어 있을 터이다. <노르웨이의 숲>이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둔 이후 거듭되는 인터뷰 요청 등 인기 작가로서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소회 및 번잡한 국내 생활을 피해 외국에서 체류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일본 출판업계의 현실에 대한 단상 등이 실려 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먹고살게 되고부터 '난처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필명을 쓸 걸 그랬어' 하고 깊이 후회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혹 여러분 중에 앞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이번 글이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p.202)

 

이상한 일이지만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르게 에세이를 읽고 있노라면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큰 변화도 없이 평온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에 젖게 된다. 작가의 명성에 비해 그가 책에서 풀어놓는 에피소드의 전반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겪을 만한 작고 평범한 일상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라로 집안일을 한다는 어느 주부의 신문기사에 대한 작가의 느낌이라든가 공중 부유의 꿈을 자주 꾼다는 이야기라든가 달리기 동호회에 얽힌 에피소드라든가 작가가 기르던 순종 샴고양이 뮤즈에 얽힌 에피소드 등 나른하고 소소한 일상이 편안한 문장으로 펼쳐진다.

 

"때때로 '나이깨나 먹어서 매주 에세이에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고 부끄럽지 않냐. 좀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이야기를 쓸 수는 없느냐'는 꾸지람을 듣는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고 대꾸할 말도 없다. 그래도 이것도 쓰고 싶고 저것도 쓰고 싶어 부지런히 쓰다보면 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돼버린단 말이죠.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연유로, 이번주도 단연 세상에 보탬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p.152)

 

물론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늘 보게 되는 사전이라든가 번역의 문제라든가 좋아하는 책과 같은 주제도 빠지지 않는다. 여행할 때는 예외 없이 '체호프 전집' 중 한 권을 넣어간다거나 일생 동안 두고두고 읽는 책이 '위대한 개츠비'라는 등의 이야기는 하루키의 팬이라면 모를 리 없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사실도 그의 에세이에서 일언반구 언급을 하지 않으면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난 우리집 장수 고양이 뮤즈의 영혼에 바치고 싶습니다. 책에 실린 글을 쓰고 몇 달 뒤, 뮤즈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후 육 개월의 뮤즈가 기묘한 인연으로 고쿠분지의 우리집에 왔을 때 저는 아직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언젠가 소설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지평선 위로 조금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p.336)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따분한 한낮에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와 노닥거리는 일만큼 평온하게만 흐를 리 만무하다는 걸 잘 알지만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펼쳐 들고 읽을라치면 우리 인생이 아무런 걱정도 없이 흘러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비틀스의 노랫말 '오블라디 오블라다'처럼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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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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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쓰인 소설 한 권이 웬만한 철학 서적 몇 권의 의미를 전달할 때가 있고, 몇 권의 과학 서적에 담길 만한 미래의 변화상을 한 권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예컨대 한 권의 과학 서적이나 철학서가 여러 권의 소설이 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모두 줄 수 있다는 것. 흔치는 않지만 그와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물론 잘 쓰인 한 편의 시가 웬만한 소설 몇 권에 담길 만한 감동을 한꺼번에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장르를 고집하며 편협한 독서로 일관한다는 것은 때론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신예작가 미아키 스가루가 쓴<너의 이야기>는 감동과 의미, 미래에 대한 성찰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물론 젊은 작가들이 늘 그렇듯,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 소설 전체에서 작위적인 느낌이 살짝 묻어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통 코스를 밟지 않고 개인 웹사이트 등에 올린 자신의 창작글이 인기를 끌면서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소설의 몰입도나 완성도 면에서 이 정도의 성과를 보일 수 있다는 건 꽤나 놀라운 일이다. 일본 발매 이틀 만에 4쇄를 돌파하고 제40회 오시카와 문학 신인상 최종 후보작에도 올랐다는 <너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 <너의 이야기>를 통해 이와 같은 예측에서 한 발 더 들어간다. 삶에서 획득한 개인의 경험과 기억의 총체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확고부동한 논리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예컨대 개인이 실제 삶에서 취득한 진짜 기억을 지우고 누군가에게 의뢰한 가짜 기억을 자신의 뇌에 이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작가의 상상은 그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소설에는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낸 두 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아마가이 치히로와 나쓰나기 도카. 가족으로부터의 사랑도, 친구 간의 우정도 도통 받아본 적 없는 치히로는 대학생이 된 지금도 대인관계에 대한 지독한 콤플렉스를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선배가 유일했던 치히로는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을 지워버리는 게 자신의 남은 삶을 위해서도 차라리 낫겠다는 판단을 하고 특정 시기의 기억을 지워주는 프로그램인 '레테'를 구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매진한다. 그러나 배달 착오였는지 치히로가 '레테'인 줄 알고 먹었던 것은 새로운 기억을 심어주는 '그린그린'이었다. 그 바람에 치히로에게는 어릴 적 소꿉친구로 만나 청소년기까지 이어졌던 달콤한 사랑이야기가 심어졌다.

 

"처음부터 가질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쉽게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딱 한 걸음만 더 가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건, 한없이 미련이 남는다. 나는 의억을 통해 행복과 불행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처절하게 깨달았다.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 그 차이 하나가 천국과 지옥을 가른다." (p.164)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를 하던 치히로는 여름 축제가 열리고 있는 산사의 많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의억(가짜 기억) 속의 그녀인 나쓰나기 도카인 듯한 여인을 먼 거리에서 보게 된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가 '의억'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의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치히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행복한 꿈을 꾸던 치히로.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치히로는 어느 날 자신의 아파트에서 꿈 속의 연인 '도카'를 현실에서 맞닥뜨린다.

 

자신의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치히로는 도카를 현실의 여자 친구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도카는 치히로를 위해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같이 음악을 들으면서 치히로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쓴다. 이쯤 되면 책을 읽는 독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도카의 정체는 뭘까?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도카의 호의를 매정하게 거부하였지만 치히로 역시 도카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의억을 이용하여 사기를 친다거나 사이비 종교를 권유한다거나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태풍이 치던 어느 여름 날, 도카에게 지독한 천식이 있다는 걸 의억을 통해 알고 있었던 치히로는 혹시 기압이 떨어진 이때에 도카가 예전처럼 쓰러진 게 아닐까 걱정이 된 나머지 도카의 집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들긴다.

 

"문득 나는 이 사람을 잃으려 하고 있다.라고 남 일처럼 생각했다. 그 사실이 내게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파악할 수 없다. 세계의 종말이 내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슬픔은 지나치게 거대해 불가능하다고는 말 못해도 내 잣대로 잴 수 없는 건 분명하다." (p.338)

 

치히로는 결국 자신의 방에 도카의 출입을 허락한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음악을 듣고, 같이 추억을 공유하면서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 그리고 도카의 한 줄 일기가 매일매일 기록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도카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도카가 사라진다.

 

"정체성의 존립 근거가 기억의 일관성이라 한다면, 나는 매일매일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해 겨울로 접어들며 나는 나 자신을 의뢰인과 의억 사이에 설치된 여과 장치와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단련에 따른 사적 감정의 소멸과 다른 점은, 나라는 인간이 글자 그대로 소멸함에 따라 나타나는 부차적인 현상에 불과했다는 점일 것이다." (p.282)

 

이제 2부에서는 도카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천식으로 인해 암울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도카가 우연한 기회에 의억기공사가 되어 그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자신이 신형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 AD)에 걸렸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휩싸인다. 자신이 죽더라도 누구 한 사람 슬퍼하거나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나 비참하게만 여겨졌던 도카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한 남자의 이력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던 치히로의 이력서였다. 도카는 의억기공사로서의 규정도 어긴 채 자신이 현실에서 치히로의 진짜 연인이 되고자 한다. 그 기억을 안고 평온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일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클리닉에서 내 앞으로 의뢰인의 '이력서'를 보내준다. '이력서'에 담겨 있는 정보는 최면 상태에서 추출된 것으로 거짓은 없다. 나는 '이력서'를 읽어보고 의뢰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가공의 과거를 작성한다. '편집업자'와 몇 차례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세세한 수정을 거친 후 의억을 최종 완성본으로 정리해 클리닉에 제출한다. 이러한 일련의 공정은 대략 1개월 안에 끝난다." (p.236~p.237)

 

소설의 후반부에는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치히로가 병원에 입원하여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도카를 찾아간다. 치히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던 도카의 입장에서 이제 정반대의 입장에 놓이게 된 치히로는 도카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휴학한 채 매일매일 도카를 찾아간다. 도카는 자신이 앓고 있는 신형 AD에 내성이 있다고 알려진 의억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다. 그녀가 의억마저 잃으면 그녀의 삶은 끝나는 것이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수록 도카는 가짜가 아닌 진실된 마음을 치히로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치히로는 자신의 의억에도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도카에게 들려준다. 이야기는 그렇게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단순히 SF적 요소를 지닌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던 이야기는 치히로의 이야기에서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 채 도카의 이야기로 이어짐으로써 마치 미스터리 소설처럼 읽힌다. 내가 대개의 일본 소설에서 늘 감탄하는 대목은 독자들이 감동할 만한 포인트를 작가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스미노 요루가 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도 그렇고 이 책 <너의 이야기>에서도 작가는 감동의 실마리를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조금도 노출시키지 않고 끝까지 숨기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한꺼번에 폭발시킴으로써 감동의 크기를 배가시킨다.

 

'나는 문학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길 바라지만, 그 무엇도 인간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다. 문학은 이 사실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문학은 필요하다.'고 했던 데이비드 실즈의 말처럼 먼 훗날 지금보다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뇌 속에 각자에게 필요한 기억을 이식할 수 있는 날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기억들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거나 만들어진 기억이 삶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학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는 것처럼 기억만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영원히 남게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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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떠오른 기억은 100% 신뢰하는 편이다. 여기서 '불현듯' 또는 '뜬금없이'가 내 기억에 대한 믿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오랜 시간 고생 고생해서 억지로 떠올린 기억에 대해서는 그닥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적어도 기억 속에 등장하는 다른 누군가와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의 기억력에 대한 신뢰는 오직 '문득' 일어난 기억에 대해서만 한정된다. 그런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오래전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고 하더라도 그 시각에 추억을 공유할 만한 사람이 곁에 없거나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추억을 공유하려 했다가 되레 퉁박만 받은 채 전화가 끊겨버렸다면 그 또한 서글프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그리움의 정점을 찍게 된다. 그리고 궁금한 게 있어도 더 이상 질문을 받아 줄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나는 왜 궁금한 걸 미리미리 질문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이 더해질수록 그리움은 커진다. 사랑의 크기는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걸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가까운 지인을 만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사소한 질문이라도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는 게 나중에 후회를 덜 남기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해 준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궁금한 게 있어도 그 질문을 내일로 미루곤 한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종종 잊은 채.

 

흐렸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따가운 햇살이 열기를 더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늘을 찾아 밀려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읽고 있다.

 

"뭔가를 보는 눈이 어떤 계기로 하루 만에 확 바뀌는 때가 가끔 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자주 그러면 무척 피곤할 테죠). 잊어버렸을 때쯤 문득 찾아온다. 긍정적으로 바뀌는 때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바뀌는 때도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인 변화가 훨씬 바람직하지만……" (장수 고양이의 비밀' 중 '하루 만에 확 바뀌는 일도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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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의 심리학 -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의 기쁨
가야마 리카 지음, 조찬희 옮김 / 수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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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문직 여성들이 오히려 결혼보다는 비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과거에는 전문직 여성과의 결혼을 남성 측에서 먼저 꺼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똑똑하면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전문직에 진출하려는 여성 숫자도 손에 꼽을 정도로 현저히 적었지만 청운의 꿈을 안고 전문직에 진출한 여성들도 많은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적응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전문직 여성에 대한 이와 같은 사회적 편견 탓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여학생들의 선호 학과는 대개 유아교육과나 식품영양학과 등 육아나 요리와 관련되는 학과가 주였다. 말하자면 현모양처를 꿈꾸는 여성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전문직뿐만 아니라 교직에 진출한 여성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를테면 나이 50이 넘었는데 교장 진급도 하지 못한 채 평교사 신분으로 꾸역꾸역 출근하는 여교사들에 대한 편견은 대단했다. 남편이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출근한다는 둥 아들이 주식에 투자했다가 큰 빚을 졌다는 둥 확인도 되지 않은 소문이 무성했고 그런 뒷담화는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런 까닭에 집안에 이렇다 할 우환이 없는데도 쉰 살이 되기 전에 서둘러 사직서를 제출하는 여교사들이 참으로 많았었다.

 

일본에서 정신과 의사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가야마 리카의 신작 <나이 듦의 심리학>을 읽는 독자라면 여성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비혼의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왔고, 구체적으로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생각인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처럼 싱글로 사는 여성들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정년과 연애와 나이 듦과 주거와 건강과 자아 찾기와 심지어 패션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독신으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심정을 곁들여 어떻게 사는 게 현명한지 묻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과학과 의료기술이 진보한다고 한들 예순은 예순이다. 에순이 열아홉이 될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예순 살이니 저건 못 해'라든가, '이제 예순 살이니 이건 하면 안 돼'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뭔가 시작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그만두고 싶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시작하다'와 '그만두다'는 완전히 반대말이지만, 어떤 것을 택하든 그걸 결정할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이 사실은 나이 때문에 달라지는 게 아니다." (p.237~p.238)

 

그렇다면 이 책의 독자는 싱글의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남성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전히 순탄치 않은 여성들의 삶에 대해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되었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구별을 떠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남성과 여성을 무 자르듯 극명하게 편가름 하는 그런 책은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반면 이렇게 해라, 강한 어조로 지시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살아보니 이렇더라 그러니 저렇게 사는 게 좀 더 나아 보인다는 식의 부드러운 조언일 뿐이다.

 

"아무리 나이 따위 상관없다고 생각해도, 남자와의 관계 문제에서는 아주 조금 나이를 의식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책임감 없는 남자에게 휘둘려 상처받거나 시간과 돈을 헛되이 써버리기에는 자신의 소중한 현재가 너무 아까우니 말이다." (p.157)

 

저자는 지금 80대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고 썼다. 함께 사는 건 아니고 저자는 도쿄에서, 저자의 어머니는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데 '어머니 돌봄 문제는 어떻게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고 쓰고 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자식이 시골에 사는 부모님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만 태우는 현실. 저자는 부모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자책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관해 고민하라고 조언한다.

 

"여성이 일을 하는 것, 일하고 싶어하는 것은 '미안해할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훌륭한 일'도 아니다. 이는 그저 '당연한 일'이다." (p.44)

 

세월에 의한 관성의 힘은 꽤나 오랫동안 그 힘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과거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여성 차별의 문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법적으로 어느 정도 정비되었다고 할지라도 세월의 관성에 의한 여파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남성들의 머릿속 생각마저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싱글로 살아간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색안경을 끼고 보는 주변 환경과 마주쳐야 한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할까. 그보다는 외면한 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게 정답일지 모른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남자나 여자나 나이가 든다는 건 주변보다는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해도 된다는 사회로부터의 암묵적인 허락이자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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