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떠오른 기억은 100% 신뢰하는 편이다. 여기서 '불현듯' 또는 '뜬금없이'가 내 기억에 대한 믿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오랜 시간 고생 고생해서 억지로 떠올린 기억에 대해서는 그닥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적어도 기억 속에 등장하는 다른 누군가와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의 기억력에 대한 신뢰는 오직 '문득' 일어난 기억에 대해서만 한정된다. 그런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오래전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고 하더라도 그 시각에 추억을 공유할 만한 사람이 곁에 없거나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추억을 공유하려 했다가 되레 퉁박만 받은 채 전화가 끊겨버렸다면 그 또한 서글프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그리움의 정점을 찍게 된다. 그리고 궁금한 게 있어도 더 이상 질문을 받아 줄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나는 왜 궁금한 걸 미리미리 질문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이 더해질수록 그리움은 커진다. 사랑의 크기는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걸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가까운 지인을 만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사소한 질문이라도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는 게 나중에 후회를 덜 남기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해 준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궁금한 게 있어도 그 질문을 내일로 미루곤 한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종종 잊은 채.

 

흐렸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따가운 햇살이 열기를 더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늘을 찾아 밀려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읽고 있다.

 

"뭔가를 보는 눈이 어떤 계기로 하루 만에 확 바뀌는 때가 가끔 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자주 그러면 무척 피곤할 테죠). 잊어버렸을 때쯤 문득 찾아온다. 긍정적으로 바뀌는 때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바뀌는 때도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인 변화가 훨씬 바람직하지만……" (장수 고양이의 비밀' 중 '하루 만에 확 바뀌는 일도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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