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다. 예컨대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의 여성이 존재하거나 페미니스트 운동이 마치 남성 혐오인 양 편가름을 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오히려 성차별을 부추기는 양상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여성들도 많다는 데서 기인한 말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어제 자유당의 여성당원 행사에서 바지를 내리고 관객들을 향해 엉덩이를 흔드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논란이 되었던 '자유한국당 우먼 페스타'만 보더라도 역시 '여성의 적은 여성'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지금까지 있었던 자유당 국회의원이나 당직자들에 의한 부적절한 행동이나 언사로 인해 '성누리당'이라는 오명을 써왔던 사실을 여성당원이라고 모를 리 없었을 터, 당 대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성적 퍼포먼스를 펼치는 게 가장 유리한 방법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국회의장을 지냈던 자유당의 박 모 전 의원도 여성 캐디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함으로써 구설에 올랐던 사실을 보더라도 자유당의 남성 당직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미인계와 같은 성적 수단이 가장 유효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방법은 유치하지만 말이다. 그와 같은 차원에서 본다면 어제의 행동이 그닥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정권에 빌붙어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공공장소에서 여성성을 동원한다는 자체는 정말 수치를 모르는 구시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는 당대표나 자신 역시 여성인 원내대표는 또 뭐란 말인가. 7,80년대의 사고를 지닌 인물들이 자유당의 대표로 존재하는 한 여성에 대한 성 인식은 후진성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라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구시대적 유물인 것이다. 페미니스트에는 관심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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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손그림 일러스트 - 펜과 색연필로 끄적이는 정말 쉬운 손그림
김인호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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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건 손글씨를 쓸 기회가 점점 줄어들면서 뭔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집착이 그에 비례하여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십자수나 요리나 그림그리기나 도예 등 하나부터 열까지 손을 쓰지 않고는 도무지 일을 완성할 수 없는 그런 일들에 대한 향수와 집착이 갈수록 커지는 바람에 이런저런 동호회를 기웃거리게도 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관련 도서를 사보기도 한다. 물론 그중 8,90%는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한 채 흐지부지 없었던 일로 되돌아가곤 하는데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보면 그 액수도 만만치 않다. 술, 담배를 하지 않으니 그 정도쯤이야 괜찮지 않을까와 같은 별별 자기합리화로 일관하게 되지만 말이다.

 

한 기업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블로그 '우아한 달팽이'의 쥔장이기도 한 김인호의 저서 <빈티지 손그림 일러스트>는 나처럼 빈약한 지구력과 무지에 가까운 그림 실력을 지닌 '그림 하층민'에게 꽤나 유용한 책인 듯 보였다. 물론 '유용하다'는 판단은 일단 (손그림 일러스트 그리기) 시도를 한 후 적어도 두어 달 동안 지속적인 실습을 거쳐서 내리는 게 마땅하지만 나는 책을 읽은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금 실기가 아닌 상상 속 체험은 벌써 수십 번 또는 수백 번에 이른 까닭에 이처럼 자신(은 없지만 뻔뻔하게)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기초나 테크닉 같은 스킬적인 부분을 알려주진 않아요. 그 대신 '어떻게 하면 편안하고 가볍게 대충 낙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림을 하나의 놀이처럼 즐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만든 책입니다." ('머릿말' 중에서)

 

총 8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이 책은 PART1 커피가 생각나는 카페용품 일러스트, PART2 요리하고 싶은 주방용품 일러스트, PART3 떠나고 싶은 여행용품 일러스트, PART4 업무 시간이 즐거워지는 사무용품 일러스트, PART5 사랑스러운 애완동물 일러스트, PART6 기억하고 싶은 기념일 일러스트, PART7 다양한 표정의 캐릭터 일러스트, PART8 일러스트레이터로 손그림 그리기의 목차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물에 대한 재미있는 일러스트 자료들이 빼곡하다.

 

 

 

마음 같아서는 그까이 거 대충 쓱쓱 그리면 될 것 같은데 실제로 해보면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모든 게 디지털로 변한 요즘, 아날로그 시대로 되돌린다는 게 어디 쉽기야 할까마는 몸의 관절도 녹이 스는지 손을 놀릴 때마다 끽끽 소리도 나는 듯하고, 집중하여 그리다 보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를 깜빡 잊고 있다가 까맣게 태워먹기도 한다. 그래도 하나 좋은 게 있다면 무료했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빠르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그림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지만 이따금 손을 놀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몸에 기름칠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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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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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서편으로 기우는 초저녁 어스름, 한줄기 비스듬한 놀빛이 스며드는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빛바랜 사진첩을 넘겨보는 느낌이었다. 때론 사위어가는 햇살에 눈이 부시기도 하고, 희미한 어둠으로 인해 눈을 치뜨기도 하면서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들을 천천히 넘겨보는 듯한 느낌. 이따금 고개를 들었을 때 집주인이 건네는 따뜻한 미소와 동조의 끄덕임만 존재할 뿐 시간을 되짚어가는 나의 손끝과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방해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농밀한 침묵 속에서 한 여인의 과거를 가만가만 되짚어가는 시간은 그렇게 은밀하고도 무거웠다.

 

"그 겨울에는 해가 아주 빨리 져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어둠의 덮개 아래에서 나는 얼마간 안락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둠을 두려워했다. 얼핏 귀여운 특징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밤이면 아버지는 스토브와 오븐에 불을 붙이고 술을 마셨고, 천장의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쉭쉭거리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p.14~p.15)

 

육체와 마음을 옥죄는 환경이나 대상에 저항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지도 모른다. 미국의 젊은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가 그려내는 <아일린>은 그렇게 낡은 사진첩 속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여주듯 세밀하고 정성스러웠다. 1964년 12월 미국 보스턴 외곽의 작은 도시 엑스(X)빌에 사는 스물네 살 여성 아일린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조심스레 글로 풀어낸 것처럼 말이다. 짐작이 될지도 모르지만 몇 년 전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아일린은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울 정도로 지극히 비사교적이고 심각한 불행감과 분노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총기 사고를 낸 아버지는 조기 은퇴를 권유받았고, 그렇게 퇴직한 후 술병을 옆에 끼고 살면서 환상 속의 적들과 대치 중이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민간 청소년 교정시설 하급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일린은 연인은커녕 변변한 친구마저 없는 외톨이이다.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같은 직장의 교도관 랜디를 짝사랑하여 그의 집 근처를 배회하거나 몰래 지켜보는 등 스토킹을 일삼기도 하고, 가게에서 초콜릿과 스타킹 따위의 작은 물건을 훔치는 방식으로 지금 처한 자신의 환경에 저항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분노와 자기혐오, 지독한 망상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던 스물네 살의 아일린의 모습을 74살의 할머니가 된 아일린이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진첩을 슬쩍 밀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전개된다. 안정과 사랑과 풍요를 알게 된 74살의 아일린이 모든 게 불안하기만 했던 24살의 아일린에게 보내는 위로와 반성의 메시지인 듯 읽히는 이 소설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스물네 살의 여인 아일린이 겪었던 지독한 자기혐오와 망상, 미성숙함, 뒤틀린 심리,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분노 등에 대해 냉정할 정도로 담담한 필체에 담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지평선에서 떨어진 노란 햇빛 바늘들이 낮은 건물들 사이로 퍼져나와 이발소의 실내와 빵집 창문의 금색 글자들, X빌 우체국 앞 도랑 속에서 결정을 이룬 눈 얼음을 밝게 비추었다. 시내에서 나오는 길에 빛은 지분거리며 이울었다. 마치 내가 그곳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으며 언뜻 보거나 세부를 볼 수밖에 없음을 빛이 이해하는 것 같았다. 울부짖는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X빌을 이런 식으로 기억하라고 말했다. 빛과 바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곳, 지구상 한 점에 지나지 않는 곳, 다른 데와 다를 바 없는 소도시, 벽들과 창문들, 그리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갈망할 필요 없는 곳으로." (p.364)

 

'거의 모든 것을 혐오'하며 '너무나 불행하고 화가났'던 스물네 살의 아일린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X빌을 떠나 뉴욕으로 탈출할 계획을 매일같이 세우면서. 그런 암울한 일상의 하루하루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던 건 그녀 앞에 소년원 교육국장 '리베카'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하버드 대학원 출신인 리베카는 아일린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우아하고 가장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품었던 모든 환상이 구체화한 모습이었다. 리베카의 매력에 흠뻑 취한 아일린은 랜디를 향한 짝사랑과 스토킹마저 그만둔다. 두 여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격히 가까워진다.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내자는 리베카의 제안에 한껏 들떠 있던 아일린은 파티를 위해 와인을 사고 아버지가 맡겨둔 총을 챙겨 리베카의 집으로 향하는데...

 

우리는 종종 예기치 못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삶의 수렁으로부터 건져 올려지기도 하고 등 떠밀려 의도하지 않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아슬아슬한 순간들이었고, 그 모든 게 기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1964년 12월 스물네 살 아일린의 운명을 바꿔놓은 일주일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혐오하면서도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 채 분노와 망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던 아일린, 리베카의 등장과 특별하기만 했던 크리스마스를 앞둔 그해의 일주일은 X빌로부터 아일린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순간들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살아내지 못했음을 알기에 자신의 삶 앞에서 그만큼 겸손하거나 솔직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74살의 아일린이 자신의 24살 시절을 한 점 숨김없이 고백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의심 많고 까칠한 성격의 독자들을 자신이 만든 낯선 세계로 끌어들이는 게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지난 역사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거나 민담이나 신화 등 어린 시절에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익숙한 공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렇게나 까다로운 독자들의 마음을 순하게 길들여 작가의 손을 거리낌 없이 덥석 잡은 채 작가가 안내하는 장소로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게 할 수 있었던 오테사 모시페그의 능력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 책은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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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조금 힘들어하는 듯했다. 물론 장마가 물러난 뒤의 찌는 듯한 폭염에 비하면 지금의 더위는 그럭저럭 견딜 만한 더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년에 비해 습도가 높지 않다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는 것일 테다. 습도는 높고 바람 한 점 없는 가마솥 더위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기는 하지만...

 

어제는 여야 원내대표들이 80여 일만에 국회 정상화를 합의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유당 국회의원들에 의해 정상화 합의문 추인이 불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뉴스를 접한 국민들 대다수는 '이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잔뜩 뿔이 난 표정이었다. 인터넷에서 소식을 접한 후배는 동네 양아치들도 이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거라며 씩씩거렸다. 게다가 강원랜드에 인사청탁을 했던 자유당 권모 의원도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니 정치인들이 뜨거운 날씨에 국민들의 더위를 식혀주기는커녕 오히려 열기에 불을 들이대는 셈이 아닌가. 진상 짓도 이보다 더한 진상 짓이 없다.

 

그나마 속 시원했던 소식은 광화문 광장을 불법 점거한 채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별 해괴한 짓거리를 일삼던 대한애국당 천막 농성인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는데 무사히 철거했다고 하니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하다. 우리 사회의 암덩어리로 작용하는 존재는 조폭과 다름없는 극렬 자유당 의원들과 대한애국당 졸개들이 아닌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토론과 대화가 가능할 터인데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아집과 부당한 논리에 사로잡힌 이상한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10년쯤 지나면 그들도 다 죽고 없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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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유정식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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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언제나 창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 기존에는 없던 것, 있었지만 좀 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작의 본능을 지닌 가능성의 존재인 동시에 창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창작을 밥벌이나 생계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한 창작은 그 자체로서 삶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유희의 일종이거나 기쁨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잠을 자거나 숨을 쉬는 게 지겹지 않은 것처럼 생각 자체가 지겨울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을 업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결코 기쁨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창작자 개인의 욕심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도 그것이 교과서에 수록되는 순간 학생들로부터 소설의 재미를 몽땅 빼앗아가는 것처럼 창작이 업으로 전환되는 순간 기쁨보다는 고단함이 더 깊게 파고드는 것이다. '책을 쓰는 일은 마치 오랜 지병을 앓듯이 지긋지긋하고 진을 빼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했던 조지 오웰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만약 당신이 경계를 느슨히 한다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과 욕구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짝을 이루며 당신을 착각과 자만심에 쉽게 빠뜨릴 수 있다. 불안하고 두려워할수록,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작품을 다시 개선하고 수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높아질수록 프로젝트는 훌륭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당신의 창작물로 인해 조금이라도 전율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당신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p.93)

 

<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를 쓴 라이언 홀리데이는 창작이 단순히 개인의 선천적 재능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닌, 시간과 노력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창작이 놀이나 취미의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불멸의' 또는 '불후의'와 같은 수식어를 달기 위해서는 창작자의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어야 함은 물론 그와 더불어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대학을 자퇴하고 다양한 분야의 '창작 산업'을 두루 경험했던 저자는 현실에서 좋은 작품은 어떻게 잘 만들어내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잘 홍보하고 잘 판매할 수 있는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작가 중의 작가라 말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재미일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비즈니스에서 생존하려면 다른 사람들과 당신 자신이 돈을 가져다주도록 해야 한다. 즉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 반대를 믿는다면 비즈니스는 망하고 만다." (p.151~p.152)

 

저자는 모든 창작에 있어 작품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목표 대상(고객)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목표 대상에 맞게 미세한 조정과 개선 작업을 반복하는 건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지난한 작업의 과정이다. 장난거리이자 오락의 수준에서 그치는 많은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있는 반면 '불멸의' 작품을 창조하는 위대한 크리에이터가 드문 까닭은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그와 같은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작품의 진가를 즉각 알아보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크리에이터로서 마땅히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높은 일이다.

 

책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두 장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창작물을 '만드는' 태도와 방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좋은 창작물을 만들었다고 하여 그 결과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창작자의 결과물을 도달시킬 수 있을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셈이다. 저자는 뒤의 두 장에서 '시장에서 창작물이 오래 팔리도록 하는 방법'과 '타깃이 되는 소비자군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하여 알려준다.

 

'타이탄의 도구들'의 저자 팀 해리스와 '과감한 선택'을 쓴 제임스 알투처가 어떻게 자신의 책들을 성공시켰는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감행했던 마케팅 전략, 도요타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원칙, 록 밴드 '아이언 메이든'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등 풍부한 사례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흥미를 끈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광고 캠페인이 되려면 두 개의 핵심요소를 기억해야 한다. 고객의 '생애 가치Lifetime Value, LTV'를 알아야 하고 '행동당 비용Cost per Acquisition, CPA'을 파악해야 한다. 고객 생애 가치란 결국 고객이 당신의 고객으로 남아 있는 동안 발생하는 수익이 얼마나 되는가이고, 행동당 비용은 클릭시 비용, 반응제 광고 등으로도 불리는데 간단히 말하면 광고를 통해 고객을 확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된 방정식에서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의식(예를 들어 "매일 아침 신문 광고에 내 작품이 나오는 걸 보는 것이 너무 좋아!"라는 생각)을 없애면 남는 것은 그런 방정식의 작동 여부가 전부다." (p.234)

 

우리는 종종 제품의 생산이나 특정 창작물의 제작에 있어 잘만 만들면 알아서 잘 팔리겠거니 생각하곤 한다. 말하자면 좋은 작품이 좋은 판매로 직결된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좋은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지독한 판매 부진으로 인하여 망하는 경우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저자는 책에서 '영원불멸의 걸작은 불멸의 마케팅을 필요로 한다.'고 썼다. 최상의 전략을 찾고 효과가 이어지는 한 그 전략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이다.

 

저자는 책에서 크리에이터 자신의 능력과 노력, 마케팅 전략 등을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행운'에 대해 짧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통제 가능하지 않은 분야로서의 '행운'은 일회성이 아닌 '영원불멸의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크리에이터로서의 창작과 판매에 전력을 다한 후에 기대할 수 있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그럴 때 쓰는 말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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