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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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서편으로 기우는 초저녁 어스름, 한줄기 비스듬한 놀빛이 스며드는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빛바랜 사진첩을 넘겨보는 느낌이었다. 때론 사위어가는 햇살에 눈이 부시기도 하고, 희미한 어둠으로 인해 눈을 치뜨기도 하면서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들을 천천히 넘겨보는 듯한 느낌. 이따금 고개를 들었을 때 집주인이 건네는 따뜻한 미소와 동조의 끄덕임만 존재할 뿐 시간을 되짚어가는 나의 손끝과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방해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농밀한 침묵 속에서 한 여인의 과거를 가만가만 되짚어가는 시간은 그렇게 은밀하고도 무거웠다.

 

"그 겨울에는 해가 아주 빨리 져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어둠의 덮개 아래에서 나는 얼마간 안락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둠을 두려워했다. 얼핏 귀여운 특징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밤이면 아버지는 스토브와 오븐에 불을 붙이고 술을 마셨고, 천장의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쉭쉭거리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p.14~p.15)

 

육체와 마음을 옥죄는 환경이나 대상에 저항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지도 모른다. 미국의 젊은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가 그려내는 <아일린>은 그렇게 낡은 사진첩 속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여주듯 세밀하고 정성스러웠다. 1964년 12월 미국 보스턴 외곽의 작은 도시 엑스(X)빌에 사는 스물네 살 여성 아일린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조심스레 글로 풀어낸 것처럼 말이다. 짐작이 될지도 모르지만 몇 년 전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아일린은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울 정도로 지극히 비사교적이고 심각한 불행감과 분노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총기 사고를 낸 아버지는 조기 은퇴를 권유받았고, 그렇게 퇴직한 후 술병을 옆에 끼고 살면서 환상 속의 적들과 대치 중이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민간 청소년 교정시설 하급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일린은 연인은커녕 변변한 친구마저 없는 외톨이이다.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같은 직장의 교도관 랜디를 짝사랑하여 그의 집 근처를 배회하거나 몰래 지켜보는 등 스토킹을 일삼기도 하고, 가게에서 초콜릿과 스타킹 따위의 작은 물건을 훔치는 방식으로 지금 처한 자신의 환경에 저항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분노와 자기혐오, 지독한 망상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던 스물네 살의 아일린의 모습을 74살의 할머니가 된 아일린이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진첩을 슬쩍 밀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전개된다. 안정과 사랑과 풍요를 알게 된 74살의 아일린이 모든 게 불안하기만 했던 24살의 아일린에게 보내는 위로와 반성의 메시지인 듯 읽히는 이 소설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스물네 살의 여인 아일린이 겪었던 지독한 자기혐오와 망상, 미성숙함, 뒤틀린 심리,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분노 등에 대해 냉정할 정도로 담담한 필체에 담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지평선에서 떨어진 노란 햇빛 바늘들이 낮은 건물들 사이로 퍼져나와 이발소의 실내와 빵집 창문의 금색 글자들, X빌 우체국 앞 도랑 속에서 결정을 이룬 눈 얼음을 밝게 비추었다. 시내에서 나오는 길에 빛은 지분거리며 이울었다. 마치 내가 그곳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으며 언뜻 보거나 세부를 볼 수밖에 없음을 빛이 이해하는 것 같았다. 울부짖는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X빌을 이런 식으로 기억하라고 말했다. 빛과 바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곳, 지구상 한 점에 지나지 않는 곳, 다른 데와 다를 바 없는 소도시, 벽들과 창문들, 그리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갈망할 필요 없는 곳으로." (p.364)

 

'거의 모든 것을 혐오'하며 '너무나 불행하고 화가났'던 스물네 살의 아일린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X빌을 떠나 뉴욕으로 탈출할 계획을 매일같이 세우면서. 그런 암울한 일상의 하루하루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던 건 그녀 앞에 소년원 교육국장 '리베카'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하버드 대학원 출신인 리베카는 아일린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우아하고 가장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품었던 모든 환상이 구체화한 모습이었다. 리베카의 매력에 흠뻑 취한 아일린은 랜디를 향한 짝사랑과 스토킹마저 그만둔다. 두 여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격히 가까워진다.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내자는 리베카의 제안에 한껏 들떠 있던 아일린은 파티를 위해 와인을 사고 아버지가 맡겨둔 총을 챙겨 리베카의 집으로 향하는데...

 

우리는 종종 예기치 못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삶의 수렁으로부터 건져 올려지기도 하고 등 떠밀려 의도하지 않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아슬아슬한 순간들이었고, 그 모든 게 기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1964년 12월 스물네 살 아일린의 운명을 바꿔놓은 일주일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혐오하면서도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 채 분노와 망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던 아일린, 리베카의 등장과 특별하기만 했던 크리스마스를 앞둔 그해의 일주일은 X빌로부터 아일린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순간들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살아내지 못했음을 알기에 자신의 삶 앞에서 그만큼 겸손하거나 솔직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74살의 아일린이 자신의 24살 시절을 한 점 숨김없이 고백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의심 많고 까칠한 성격의 독자들을 자신이 만든 낯선 세계로 끌어들이는 게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지난 역사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거나 민담이나 신화 등 어린 시절에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익숙한 공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렇게나 까다로운 독자들의 마음을 순하게 길들여 작가의 손을 거리낌 없이 덥석 잡은 채 작가가 안내하는 장소로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게 할 수 있었던 오테사 모시페그의 능력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 책은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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